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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문화의 용광로'는 미국 아닌 중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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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문화의 용광로'는 미국 아닌 중화다

[동아시아를 묻다] 신장(新彊) : 두 개의 하늘

조화 사회

오랜만에 서역을 간다. 신장위구르 자치구이다. 서역과 북방은 흉노 이래 중원의 위상과 정체성을 규정짓는 중차대한 역할을 했다. 몽골, 티베트, 신장은 소수 민족 문제를 넘어서 중국이라는 제국의 존재 형식을 결정짓는 핵심 현장이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2009년 우루무치 폭동 사건이다. 그러나 접근 방식에 불만이 없지 않다. 대저 한족과 위구르족의 민족 대립으로 묘사된다. 변방에 대한 중앙의 억압, 소수 민족에 대한 한족의 압박이라는 맥락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런 현실이 없다고 부정하기는 어렵다. 나도 그런 시각이 강했다. 10여 년 전, 어학 연수로 처음 베이징을 갔다. 마침 학교 안에 위구르 식당이 있었다. 양꼬치 맛에 반해 종종 찾았다. 그들에게 떠듬거리는 중국어로 물었다.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하나, 위구르인으로 생각하나?

은근히 위구르인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티베트 독립 운동도 지지하던 무렵이다. 역으로 '중국'에 대한 이해가 몹시 모자랐던 때이다. 지금은 그런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여긴다. 중국인과 위구르인은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사회학(西學)으로 단련되었던 나의 지식체계가 편향되었던 것이다.

분리 독립 운동이 활발하던 때가 있었다. 1990년대, 동투르키스탄 독립 운동이 일었다. 외부 요인이 컸다. 소련 해체 이후 중앙유라시아에 이슬람 공화국이 속속 등장했다. 그 여파로 신장도 독립을 꾀하는 세력이 있었다. 한족은 물론 회민(回民)마저 소거 대상으로 삼았다. 회민은 이슬람을 믿는 한족이다. 일부는 터키를 서투르키스탄으로, 신장을 동투르키스탄으로 이스탄불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대투르키스탄 연방을 꿈꾸기도 했다. 과연 문명의 뿌리는 깊다. 20세기의 이념은 껍데기였다.

그러나 그 열기는 곧 식었다. 독립 운동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여기에 100년이 못되는 소비에트 연방과 누천년 중화 제국의 차이가 있다. 신장의 억압 구조를 인종적, 민족적 언어로만 묘사하는 것은 실상과 어긋난다. 중국의 민족, 인종, 종족에 대한 감각은 서구와는 판이하다.

이미 '한족(漢族)'부터가 복합적인 민족 융합체이다. '유럽인'보다 더 포괄적이다. 북중국과 남중국의 언어 차이는 북유럽과 남유럽보다 크다. 알파벳 같은 표음 문자를 사용했다면 수십 개의 나라로 쪼개졌을 것이다. '한문(漢文)'은 정녕 제국의 문자이다. 하나의 문자를 여러 지방/종족의 발음으로 읽으면서 거대한 정치 공동체를 지속시킨다. 신장에는 또 위구르족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신장 한인(漢人)'들도 많다. 18세기 이래 신장에 정착한 '토박이 한족'들이다. 이들은 이웃성의 한족보다 차라리 위구르족과 친하다. 한족-위구르족의 분별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작금 신장의 화근에는 개혁 개방이 있다. 개혁 개방이 변방에 미친 후유증이 관건이다. 개혁 개방이란 자유 경쟁의 도입이다. 사람, 물자, 자본의 월경적 이동을 적극 허용한다. 그래서 불균등 발전을 촉발했다. '선부론(先富論)'이다. 그래서 중앙 정부가 추진했던 소수 민족우대 정책의 효과가 잠식되었다. 사회적 평등을 보장하던 시스템이 해체된 것이다. 빈곤 지역 출신의 한족들도 불만이다. 그들에게 소수 민족 우대 정책은 역차별이다. 위구르족에 맞서 시위에 참여한 한족들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래된 '신장 한인'도 아니고, 문화 자본을 보유한 동부 연안 출신도 아니다. 대저 주변성에서 최근에 이주해온 떠돌이 한족들이다. 번다한 농민공의 시위에 가까웠던 것이다.

본디 우루무치 폭동 사건을 촉발한 위구르인도 '공정'한 대우를 요구한 것이다. 불평등의 시정을 중앙 정부, 즉 중국 공산당에 요청했던 것이다. 즉 독립 운동이기는커녕, '격차 사회'에 대한 집합적 저항 운동이다. 국책이라는 '조화 사회'를 서둘러 실현하라는 것이다. 동시대의 99퍼센트 운동과도 연동되는 세계적 현상의 일환이다.

▲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우루무치의 한 골목길에서 촬영한 위구르족 노인. ⓒ로이터=뉴시스

조화 세계

그럼에도 신장은 중국 내정으로 그치지 않는다. 유라시아의 한복판에 자리하는 탓이다. 중원에서는 주변이고 변경이지만, 지정학적 지경학적 지문화적 요충지이다. 특히 이슬람 세계와 중화 세계의 접경이라는 점이 범상치 않다. 천주 문명과 천하 문명이 교통하는 특별한 장소이다. '두 개의 하늘'이 신장에서 포개진다.

9·11 이래 미국은 좀체 중동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럽은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을 둘러싸고 수십 년째 논쟁 중이다. 이슬람 공화국을 떼어준 러시아도 여전히 체첸 문제를 안고 있다. 이슬람교는 신도 수의 증가 면에서 가장 역동적인 종교이다. 터키부터 인도네시아까지 광대한 지역을 포괄한다. 21세기는 이슬람 중흥의 역사로 기록될 공산이 크다. 이슬람 세계와의 공존은 화급한 화두이다.

신장이 공식적으로 중국에 편입된 것은 대청 제국 시절이다. 만주에서 발원한 청이 북방 유목 세계를 평정한 마지막 장소가 신장이었다. 그래서 새 강토(新疆)이다. 그럼에도 지배 방식은 유연하고 탄력적이었다. 이슬람 문명은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아니 바로 그러한 포용력으로 중원의 유교-농업 세계와 초원의 이슬람/불교-유목 세계를 통합할 수 있었다.

번부의 자율을 누리던 신장이 신장성(省)으로 개편된 것은 1884년이다. 일본의 류큐 처분(1879년)과 엇비슷한 시점이다. 즉 신장의 '중국화'는 류큐의 '일본화'와 동시대적 현상이다. 동아시아의 지역 질서가 유럽식 국가 간 체제로 재편되면서 내부 억압의 연쇄가 증폭되어 간 것이다.

근대의 양대 정치 혁명으로 미국 혁명(1776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을 꼽는다. 헌데 왕의 목을 친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면이 덜하다. 중국에는 진즉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았다. 무능한 왕은 일개 필부였다. 왕을 갈아치우는 역성 혁명 또한 빈번했다. 그에 반해 미국 혁명이야말로 독특하다. '독립' 혁명인 탓이다. 지금도 미국의 최대 국경일은 7월 4일, '독립 기념일'이다. 화려한 불꽃놀이가 여름밤을 수놓는다. 구대륙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한 '신세계'를 자축한다.

이는 대서양을 격절한 신대륙이라는 예외적인 장소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독립 혁명'은 향후 200년간 전 세계를 감화시켰다. 20세기는 온통 '독립 혁명'의 세기였다. 지구는 200개의 영토 국가로 분열했다. 즉 독립(independent)이 아니면 종속(dependent)이라는 이분법이 범람한 것이다.

중화 세계 안에서 자주를 누렸던 질서는 허락되지 않았다. 상호 의존(interdependent)하며 호형호제했던 유기적 문명 공동체도 해체되었다. 이웃이 가장 위험한 원수가 된 것이다. 원교근공(遠交近攻)과 합종연횡(合縱連橫)의 전국 시대 논리가 '현실주의'라는 이름의 국제 정치 문법이 되었다.

새로운 천년, 상호 의존하던 구세계의 복원이 인류의 과제이다. '조화 세계'의 달성이다. 신장은 이중적인 상호 의존을 도모하고 있다. 신장 내 15개 주와 도시가 중원의 주, 시, 현과 우호 협력 네트워크를 맺었다. 초원과 중원을 잇는 연결망의 복원이다. 아울러 중앙유라시아 국가들과도 경제 교류를 증진시키고 있다. 호시(互市), 즉 변경 무역의 부활이다.

동부 연안이 일본, 한국, 대만, 동남아와 태평양을 잇는 해양 생산 네트워크(바닷길)를 구축한 것처럼, 신장을 포함한 서부 내륙 또한 유라시아 네트워크(초원길)로 엮어가는 것이다. 신장-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을 거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 철도는 가히 실크로드의 복원이라 할만하다.

물론 이러한 연결망 구축은 지정학과 지경학적 목적이 농후하다. 자원 확보와 변경 안정을 꾀한다. 하지만 지문화, 혹은 지문명적 접근이 더욱 발군이다. 지배성(ascendancy)만큼이나 초월성(transcendency)에 주목해야 한다. 문명 간 분기로부터 융합으로의 반전이다. 이는 비단 이슬람 세계를 향한 외부 투사로만 그치지 않는다. 내부의 자기 문명과의 화해의 결실이다. 즉 중원의 점진적인 전통 문명 회복과 깊이 연동되어 있다. 20세기를 지배했던 좌우 이념으로부터 초탈한 것이다.

신장의 이슬람 사원이 가장 전면적으로 파괴되었던 시절이 문화 대혁명기이다. 고전 문명에 대한 근대 문명의 무지몽매한 적대가 정점에 달한 산물이다. 당시 '신청년'들은 모스크뿐 아니라 공자 사당, 불교 사찰도 수없이 불태워버렸다. 사회주의 대민주(大民主)를 천주처럼 떠받드는 유일 사상, 유일 체제였다. 이념을 맹목하는 민주 체제가 천하 문명을 어지럽힌 것이다. 냉전의 본질 또한 좌/우 이념을 추앙하는 신앙 집단 간의 종교 전쟁이 아니었을까.

천주(天主)와 천하(天下)

유럽의 축구 챔피언스 리그에는 터키가 참여한다. 1923년, 600년 오스만 제국의 붕괴 이래 터키공화국은 탈이슬람화로 내달렸다. 1949년 나토에도 가입하고, 한국 전쟁에도 참전했다. 확실하게 서구 편에 선 것이다. 그러나 그 충성에도 불구하고 EU 가입은 보류 중이다.

터키보다 상황이 못한 동유럽 국가들은 가입되는데도 브뤼셀은 여태 이스탄불을 꺼리고 있다. 결국 유럽과는 뿌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념이 달랐던 동유럽은 품어도, 문명이 다른 터키는 주저한다. 즉 EU는 여전히 샤를마뉴 대제 이후 기독교 공화국의 세속적 형태에 그친다. 8세기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이래, 서로 다른 천주 문명이 각기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거듭되는 외면과 유로존의 위기 탓인가. 최근 터키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더 이상 진척이 없다면 EU가 아니라 SCO(상하이 협력 기구)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SCO는 중국이 주도하는 지역 기구이다. 소련에서 이탈한 중앙유라시아 국가들을 끌어안았다.

그 헌장이 매우 흥미롭다. 국제법의 준수만큼이나 '문명과 문화의 다양성 보호', '문명과 종교 간 대화의 심화'라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주권국가간 국제주의라는 근대의 논리와 문명과 종교의 공존이라는 중화의 논리가 접맥되어 있는 것이다. 즉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만큼이나 문명 간 체제(inter-civilization system)를 숙고한다. 제국의 유산이다. 중국은 이를 '상하이 정신'이라 하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옛 말로 풀었다. 국제 질서와 중화 질서를 결합한, 아니 국제 질서마저 중화 질서 안에 녹여낸 신천하(新天下)라고 할 수 있을까.

샤를마뉴와 마호메트가 로마 제국을 나누어 갔던 동시기에 동방에는 대당 제국이 일어났다. 불교와 이슬람을 껴안은 복합 제국이었다. 천주와 천주 간의 불화는 새 천년에도 지속 중이다. 한 하늘 아래 두 주님을 모시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천하 문명은 여러 천주를 품어낼 수 있었다. 선지자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신앙 문명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학습을 기쁨으로 여기는 인문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신장과 서역의 향배 또한 중원이 얼마나 이 인문 문명을 복원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천하가 오래된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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