뿐일까. 이발소가 딸린 목욕탕이 있는가 하면 우체국과 자전거 수리점이 골목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겠지. 혹 그 옆에는 전당포가 성업 중일지도 모르겠다. 책은 점점 안 팔리고 사람들은 하늘 대신 손바닥 안의 핸드폰을 보느라 고개가 구부러진다. 아이들은 수학을 싫어하고 부모님은 자식의 성적 때문에 고민이 많겠지.
섬이라도 무인도가 아니라면 있을 건 다 있다. 그곳에도 정 붙이고 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희노애락이 있고 생로병사가 있다. 바람을 거스리기도 하면서 풀은 위로 힘껏 자라나고 나무의 그림자는 아래로 뛰어내린다. 여기서도 중력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될 테니깐. 민요를 좋아하는 사람도 유행가에 빠진 사람도 따로따로 있을 것이다.
대마도도 마찬가지였다. 제법 큰 섬인 그곳에는 도시가 형성되어 있고 아주 번화한 거리가 흥청대면서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줄기에서 가지 뻗어나가듯 호기심을 가득 데리고 작은 길이 저 멀리 골목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간판도 있었다. 고객들로 붐비는 십팔(十八) 은행. 점잖은 금융 기관치고는 이름이 퍽 희한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대마도의 그런 낯선 풍경 속을 내달릴 때 문득 시선을 당기는 게 있으니 그것은 터널이었다.
터널 안은 국경을 초월해서 다들 비슷하다. 시멘트를 칠하거나 타일로 마감한 벽에 촉수 낮은 전등이 박혀 있다. 그리고 천장은 모두들 아치형으로 둥글고 터널 안은 조금씩은 둥글게 휘어진다. 햇빛을 좀체로 구경할 수 없는 그곳에는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고 매연이나 소음을 먹고 자라는 기이한 먼지들이 진을 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터널은 꼭 한 두 개의 전등이 고장 나 있다. 아예 그냥 깜깜한 곳도 있다.
터널. 멀리서 보면 그곳은 작은 구멍이다. 그 안을 통과해가면 어떤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 것 같은 예감이 고여 있는 곳이다. 몇 해 전 가까운 친구들과 중국의 서안(西安) 지역을 여행할 때였다. 어느 고원 지대를 갔는데 도로 한 가운데 우뚝 터널이 뚫려 있었다. 과연 없는 게 없다는 중국다운 중국제 구멍이었다. 골짜기나 숲길이 아닌 황량한 지역에서 서 있는 터널은 무슨 경계를 나타나는 표지석 같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터널을 통과할 때 이런 상념에 젖어보았다.
집으로부터 조국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지금, 여기, 이곳. 내 모든 신분과 습관과 일상과 언어와 관계를 일거에 단절하고 잠적해 볼까. 순식간에 나를 전혀 다른 나로 변신시켜 어떤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볼까. 그렇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친구들은 사라진 나를 얼마 동안 찾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귀국할까. 가족들은 행방불명된 가장의 지푸라기 같은 흔적을 수소문하러 이 터널까지 과연 찾아올까. 칙칙한 중국식 터널의 불빛 아래에서 그런 뚱딴지같은 생각을 잠시 해 보았던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생각에서 생각으로만 그치고 이내 소심한 여행객의 신분으로 돌아와 터널이 끝나자마자 지갑을 꺼내 딸아이의 사진을 보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 나에겐 한 가지 증세가 생겼으니 터널만 보면 돌연한 잠적과 유폐와 변신을 떠올리며 그 어떤 한 경계(境界)를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출퇴근하기 위해 남산터널을 통과할 때면 이 복장 이대로 그 어디론가 자발적 망명을 떠날까, 하는 생각을 한 번씩 해본다는 것!
대마도 식물 기행 사흘째. 날씨는 맑았다. 아침 일찍 만관교를 걷고 대마도에서 가장 높은 에보시타케 전망대에 올라 대마도 전역의 경관을 두루 감상하였다. 통상 여행을 가면 가이드가 나서서 관광지에 대해 설명을 하면 그래도 듣는 척이라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단의 사람들은 그저 멀뚱멀뚱하기만 하다.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관광지 주위의 풀이나 나무, 고사리에 빠져들기에 바쁘다. 인공의 관광지가 제아무리 빼어나도 자연의 그것에는 못 미친다는 것을 이미 체득한 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와타츠미 신사를 둘러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행은 산사의 담에서 콩짜개덩굴, 산쪽풀, 밤일엽, 가는새고사리, 돌잔고사리를 식별하였다. 도요타마 공주를 모신다는 신당 앞의 우람한 나무가 팽나무인지 느티나무인지를 동정하다가 서로 의견이 팽팽히 부딪혔다. 그리하여 처음엔 팽나무가 우세한 것 같더니 발밑에 떨어진 젖은 낙엽을 근거로 마지막엔 느티나무로 기울었다.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는 센달나무도 찾아내었다.
▲ 콩짜개덩굴. ⓒ이굴기 |
▲ 산쪽풀. ⓒ이굴기 |
그리고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미타케(御嶽, 479미터) 산을 향하여 가는 길. 시내를 빠져나와 산길로 가는 동안 터널을 만났다. 나는 버스의 맨 뒷좌석에 앉았다가 터널을 통과한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사진을 찍었다. <十善寺 トンネル>. 나도 그간 식물에 대한 귀동냥을 좀 했다고 터널 입구에는 각종 이끼와 고사리 종류가 잔뜩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했다. 그리고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한 생각이 떠올랐으니 그것은 그 어떤 경계(境界)에 관한 것이었다.
▲ 대마도에서 만난 十善寺 터널. ⓒ이굴기 |
부산에서 한 시간 거리이지만 국경을 달리 하는 일본이라서 그랬을까. 일본의 북해도에는 지금 이상 기후로 생활의 위협을 줄 만큼 폭설이 내리고 있다고 한다. 내가 지금 식물 탐험을 하고 있는 여기는 대마도. 일본 본토에서는 여기를 오지 중의 오지로 여긴다 한다. 하늘도 그렇게 여기는 것일까. 대마도엔 눈을 한 톨도 보내지 않았다. 터널을 빠져나오는데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년)의 그 유명한 소설 <설국>의 첫 대목이 떠올랐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구불구불 임도를 오르던 버스가 미타케 산 등산로 주차장의 무인차단기 앞에 멈춰 섰다. 나는 배낭을 챙기고 등산화 끈을 조인 뒤 버스에서 내렸다. 낯선 고장의 낯선 산. 골짜기를 바라보니 햇빛이 환히 내리쬐고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일행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입장했다. 식물의 고장이었다. 낮의 궁둥이가 녹색이었다.
▲ 미타케 산 골짜기의 한 풍경.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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