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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마을 전체 투표용지에 찍고 또 찍고…

[해방일기] 1948년 5월 10일

1948년 5월 10일

국련위원단 감시 하의 남조선 총선거는 5월 10일 상오 7시를 기하여 일제히 투표를 개시하였다. 회고컨대 남조선 선거가 시행되기까지에는 허다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즉 1946~7 양년에 걸쳐 열린 미소공위 결렬에 이어 미국이 조선 문제를 국련에 상정한 결과 소련 관하 북조선의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가능 지역의 선거를 결정 추진시켜 금반 선거가 시행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남조선 선거는 지지 반대의 쌍주곡을 울리면서 지지 측의 선거 추진과 반대 측의 남북 협상 추진 및 이에 관한 미소 양당국의 상반한 태도 등 복잡 미묘한 국내외 정세리에 당초부터 자유 분위기 조성 문제를 둘러싼 논의를 일으키면서 마침내 전 유권자의 95퍼센트 선거 기록과 909명의 입후보 난립을 보이면서 호불호 간에 10일을 맞이하여 투표는 일제히 개시되었다.

준순(逡巡)을 거듭하여 온 남조선 정세도 한 바퀴 돌게 되어 다난성을 보이는 조선 독립사의 일면의 새로운 일선이 그어져 가고 있다. 그리하여 또한 투표일을 전후한 당국의 비상경계 중에도 경향 각지에서 습격 피살 사건이 발생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큰 지장 없이 선거실시는 완료되었다.

국련 감시와 미군정 하에 시행되는 선거이지만 조선으로서는 처음 있는 남조선 총선거의 날인 5월 10일 서울 시내는 한적한 시골거리처럼 하루 종일 잠잠한 분위기 속에 투표의 날을 보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혹은 학교 혹은 무슨 사무실 등에 설비된 시내 약 730투표소에는 투표하려 나온 아낙네 노인 젊은이가 한 줄로 늘어서서 한 사람씩 순번대로 투표지를 받아가지고 간격소에 들어가 기입한 다음 투표함에 넣고 나오곤 하였다. 주위에는 장총을 들은 경관, 곤봉을 들은 향보단원들이 길목마다 지켜 엄격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관공서 각 학교, 상점, 음식점, 극장 기타 일체 신문사외의 사회 기관은 설날처럼 문을 꼭꼭 닫치고 나다니는 길손도 미군 자동차 외에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고 무덥게 흐리터분한 하늘에 미군 비행기의 폭음소리가 한갖 고요한 기분을 자아내었다. 이리하여 이날 새벽에 장충단 마포 등 투표구에 수류탄 사건이 발생하여 범인 2명이 사살당하고 수명이 체포되었다는 벽보가 나붙어 길손들이 지나가다 들여다보는 정경 이외는 큰 일 없이 투표를 끝마친 것이다. 그 후 즉시로 투표지는 시내 선거구 한 개소씩 모두 12개소의 개표장으로 한데 가져다 모아 무장 경관 70명, 사복 경관 30명, 향보단원 등 물샐 틈 없는 경비진 속에서 개표가 시작된 것이다. 오늘 아침 무렵에는 당선 대세가 거의 결정된 선거구도 있을 터이고 한창 투표 숫자의 격전이 벌어져 고비를 달리고 있는 곳도 있을 것이거니와 시내는 늦어도 12일 남조선 전 구역은 15일까지 당선상황이 알려질 것으로 보인다.

1948년 5월 11일자 <조선일보>에 그려진 선거 풍경이다. 휴일로 지정된 날인데도 사람들의 움직임이 매우 적었던 모양이다. 서울 시내에도 장총 든 경찰과 곤봉 든 향보단이 길목마다 지키고 있다니 시골 분위기는 불문가지다. 사람들은 움츠려 있었다.

우려와 달리 난폭한 선거 방해 움직임은 극히 적었던 모양이다. 5월 11일자 <경향신문>에는 서울 시내의 두 개 사건이 보도되었다.

"시내 2처에 괴한이 폭거"

조선 민족이면 누구나 다 경축해야 할 총선거일인 10일은 평온리에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일부 도배들이 준동하여 선거를 방해하고 치안을 문란케 하기 위하여 온갖 행동을 기도하고 있었다. 즉 동일 오전 중 현재 수도청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동일 오전 7시경 서울 시내 장충동2가 모 선거투표사무소에 권총을 가진 괴한 수 명이 침입하여 경비 중이던 향보단원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발에 부상을 입히고 도주하는 것을 경관에게 체포되어 반항하다가 경관에게 사살당함.

* 동일 오전 9시경 시내 중구 광희동 투표사무소 근처에 괴한 6명이 수류탄을 던져 건물 1동이 파괴되고 1명이 폭상을 당하였는데 전기 범인 6명 중 1명은 사살되고 5명은 포박당했다.

5월 12일자 <동아일보> 머리기사 "총선거의 성과 민족 전도를 축복"에는 "정권 협상배는 맹성하라"란 부제가 달려 있었다. 기자는 "서울 시내에 있어서도 투표장을 습격하여 수류탄을 던지는 등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을 하는 가운데도 "투표 성과가 90퍼센트를 돌파하였다는 것을 보면 우리 겨레가 얼마나 총선거를 통한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였던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며 민의의 소재가 확인되었다고 강조한다.

서울 시내의 11일 정오 현재 개표 성적을 보면 무효 대략 3퍼센트 내외라 한다. 문맹자가 많은 실정을 아울러 생각한다면 선거 열의가 왕성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등록이 얼마나 자유 분위기에서 실시되었으며 좌익층과 중간층이 야합하여 추진하였던 남북 협상이 얼마나 민의를 무시한 정권 협상배의 망동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같은 날 <동아일보>의 "남조선 선거 대성공" 기사에는 유엔 조위 시리아대표 무길의 말이 이렇게 인용되어 있다.

"10일의 남조선 선거는 성공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투표장을 순시하였는데 투표는 극히 원활하고 조직적이었다. 나는 남조선 단독 선거에 반대하였으나 만약 원칙이 수락된다면 이는 극히 양호한 거사이다."

정확한 것인지 매우 의심스러운 인용이다. 유엔위원단의 공보 제59호가 5월 13일 발표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제59호 공보의 내용은 위원단의 다른 공보처럼 신문에 게재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위원단 회의에서는 공보 제59호에 실린 임시의장 무길의 소감이 무길 개인의 소감일 뿐이며 유엔위원단 전체의 소감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공보 59호 조위 의견 아니다. 무길 씨의 사적 견해에 불과"

14일 조위에서는 오전 중에 전체 회의를 열고 13일 발표된 공보 제59호에 관하여 토의한 후 공보 제63호를 발표하기로 되었다. 원래 제59호는 조위에서 채택된 것이 아니며 각 대표들은 이 공보가 발표된 것을 13일 밤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공보 중에는 2000만 조선의 열렬한 애국심과 피로써 획득한 전고무비한 5월 10일 총선거 결과에 대한 모욕적 표현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위에 대한 3000만 조선인의 열화와 같은 기대를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어구도 발견되었던 고로 한 번 그것이 세간에 발표되자 관계당국은 물론 민간 측에서도 일시 수습키 어려운 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가 즉시 조위에 반영되어 공보 제63호가 발표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보 제63호에는 무길 씨가 기자단에게 공보 제59호는 자기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부언하여 두는 바이다. 그리고 조위는 14일 오후 3시 반부터 주요위원회를 열고 이승만 박사와 협의하였으며 동 4시 반부터는 김성수 씨와 협의하였다 한다.


밑줄 친 문장은 맥락을 알 수 없다. 아무튼 무길이 임시 의장으로서 공보 제59호를 발표하면서 "총선거 결과에 대한 모욕적 표현"과 "조선인의 기대를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어구"가 담긴 소감을 실었기 때문에 관계당국과 민간 측이 격한 파란을 일으켰고 위원단의 다른 위원들이 요구해서 위원단 전체 의견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도대체 무길이 무슨 소리를 한 것일까?

<한국사 데이타베이스>의 "자료 대한민국사"에는 "경향신문, 동아일보 1948년 5월 14일, 15일" 기사라며 공보 제59호 내용이 실려 있다. 실제로 두 날짜 두 신문에는 실려 있지 않은 내용이다. (5월 14일자 <경향신문> "선거 성적 양호, 무 씨 공보59로 발표" 기사 중에는 공보 내용이 "그 내용은 선거는 대체로 양호하였다고 평하였다"라고만 되어 있다.) 자료 표시에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그 내용은 공보 제59호가 맞다고 보고 옮겨놓는다.

◊ 공보 59호

조위는 언론집회 및 출판의 기본적 자유가 존중되고 보장되었다고 확인할 때 남조선에 있어서의 선거를 감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4월 29일 조위는 여사한 업무의 달성에 대한 군 당국의 조력과 호의를 만족히 여기어 미주둔군 사령관에 의하여 선언된 선거를 감시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금번 선거는 조선의 남북을 포함치 않으며 현재 정당 및 단체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포함치 않았다는 의미에서 전국적인 선거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위 전 대표는 조선 문제에 관한 관심에 있어서 언제나 만장일치였지만 금번 선거를 찬양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 간에 어떠한 의견의 상이가 있다.

대표들 중에는 금번 선거의 결과가 조선 문제의 해결에 공헌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대표도 있으며 그들이 설사 이러한 의심을 포회치 않는다 하드라도 그들은 남조선에 있어서의 선거를 전국적인 것으로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이 용어를 약간 주저하기는 하나 금번 선거를 '결정으로 우익적인 선거'라고 부르고자 한다.

조위의 다른 대표들은 조위의 업적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으나 금번 선거는 조선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의 전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확실히 금번 선거를 우익적 선거라고 부르기를 싫어하며 그렇다 하드래도 비 우익 분자 또는 선거를 반대하는 인민 수효는 극소수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다른 대표들은 사태에 대한 최종적인 의견을 표명할 준비가 아직도 되어 있지 않다.

금번 선거 진행 중 몇몇 대표는 선거법 위반과 본 위원회의 건의사항 위반 등을 지적한 바 있다. 열거하면 우리들(본 위원단 감시원)은 투표소 내와 그 주위에서 향보단원을 발견한 일이 있다. 향보단은 경찰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며 안녕질서를 유지함에 있어 경찰을 방조하는 것이다. 향보단은 투표자의 자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투표소에서는 투표장 안에 경관이 들어와 있은 적도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청년단원(혹자는 제복까지 착용)이 투표소 내와 그 주위를 빙돌고 있었다. 우리들 중의 혹자는 몇 개 투표소에 있어 비밀투표가 여행(勵行)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금반 선거는 원활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또한 능률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투표수자가 2~3시간 내에 고율에 이르렀다는 사실 자체가 금반 선거의 능률성을 증시(證示)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능률성을 찬양함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신중한 보류가 필요함을 나는 명기하는 바이다. 여하튼 이번 감시 결과에 대한 최종적 결론은 후일에 내릴 터이며 총회에 대한 보고서에 포함시킬 것이다.

선거 감시는 본위원단 사명의 1계제를 완결하였다는 사실을 본위원단은 잘 알고 있다. 본 위원단은 상금 이번 피선된 의원들이 즉시 국민 정부를 수정하도록 그들에게 권고를 발한 일은 없다. 그리고 각 피선 의원들은 조선의 통일을 위하여 정부 수립에 있어 선거를 반대하던 분자들의 지지를 얻도록 진력할 것을 기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본 위원단은 선거 감시를 본 위원단 업무의 명확한 단계라고 앞서 규정하였으며 총회에 대한 보고서의 최초의 부분은 선거에 관한 것을 내용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동 보고서 작성에만 노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동 보고서의 작성은 조선 외의 어떠한 장소에서 하기로 하였다. 그 기간 중에 있어서는 서울에 연락반을 잔류시키고 일본을 보고서 작성지로 선정하였던바 맥아더 장군은 본위원단의 방일을 거부하여 왔다. 연이나 본 위원단은 가급적 속히 조선 외에서 보고서의 제1편을 작성한다는 결정을 재확인하는 바이다. 맥아더 장군의 과반 성명에 대해서 본 위원단은 연합국 사령부에 대하여 동 보고서 작성에 심심 관심하여 줄 것을 요청 중에 있다.

이 내용은 일개 위원 입장이 아니라 임시 의장 입장에서 쓴 것이다. 자기가 선거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부정적으로 보는 위원들도 있고 긍정적으로 보는 위원들도 있으므로 최종적 결론은 후일에 내릴 것이라고 했다.

경찰과 향보단이 무장을 하고 투표소를 비롯한 곳곳에 깔려 있었다는 사실은 감시단이 투표소를 방문하지 않고 경찰 발표와 언론 보도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선거의 '자유 분위기'를 해친다고 보는 위원들이 일부 있다는 얘기도 임시 의장이 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5월 14일 위원단 전체 회의에서 공보 제59호가 실질적으로 취소되는 사태만 보더라도 유엔위원단의 '선거 감시'가 어느 수준이었는지 대충 알아볼 수 있다.

제주도 외의 도별 투표율은 경기도와 경상북도의 90퍼센트에서 강원도의 98퍼센트까지 모두 90퍼센트를 넘겼다. 숫자로는 정말 성공적인 선거다. 그런데 3월 29일부터 4월 9일까지 12일간의 선거인 등록 때 등록률이 80퍼센트에 미치지 못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뭔가 이상하다.

선거인 등록 때 자발적 등록이 극히 적었다는 사실은 4월 10일자 일기에 소개한 한국여론협회의 4월 12일 조사에 극명하게 나타난다. 서울의 등록률은 92.3퍼센트였는데 조사 대상자 1262명 중 26퍼센트인 328명이 "등록 안 하였소" 대답했다니, 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 중에도 상당수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게다가 등록했다고 대답한 934명 중 91퍼센트인 850명이 등록을 강요당했다고 응답했다 한다. 12일간의 등록 기간에 등록 대상자의 80퍼센트 등록시키기가 그토록 어려웠는데, 단 하루의 투표날에 90퍼센트 이상의 선거인이 투표장에 갔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두 개만이 무효가 되었다.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남제주군은 86.6퍼센트 투표율로 유효로 인정되었고, 북제주군의 두 개 선거구는 많은 투표소의 선거 시행에 실패해 무효가 되었다. 10여 년 전 4·3 취재반과 가까이 지낼 때, 왜 사태 초기에 북군보다 남군의 상황이 더 안정되어 있었을까 물어볼 때 누군가가 웃으며 대답하던 기억이 난다. "남군에는 경찰관 인원이 적어서 아니었을까요?"

남제주군 선거 역시 엄밀히 따지면 유효를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4·3 취재반이 채집한 증언 중에 당시 24세였던 남제주군 안덕면 상천리 고대성의 증언이 있다.

"5·10 선거가 되니 경비대에서 10명가량 나와 마을의 경비를 섰습니다. 투표소는 향사가 없어서 따로 마련 못하고 이장 집에서 투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장과 리서기인 나, 그리고 마을 유지 한 분 등 세 사람이 마을 유권자들의 투표용지에 모두 투표를 했습니다. 한 후보에게 몰표가 간 것은 사실입니다. 투표함은 경비대에서 갖고 갔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치 이에 항의하는 주민도 없었습니다." (<4·3은 말한다 2>, 236쪽)

상천리 투표함도 개표소에 도착해서 86.6퍼센트 투표율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것이 남제주군만의 일이었을까? 억지로 끌어올린 선거인 등록률이 80퍼센트에 못 미치는데 투표율이 전국적으로 90퍼센트를 넘었다면 상천리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전국 도처에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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