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럴 줄 알았다. 겨울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다. 쉽게 물러나는 법이 없다. 4월의 꽃샘추위로 한바탕 요란을 떠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것이 올해의 마지막 눈이겠군! 성급하게 짐작했던 사람들의 기대를 보기 좋게 따돌린 셈이었다.
지난 4월 20일은 24절기상으로 곡우(穀雨)였다. 곡우는 곡식에 필요한 비가 내린다는 날이다. 그런데 비가 아니라 강원과 경북, 충청 등 중부 내륙과 산간 지방에 때 아닌 눈이 내렸다. 1935년 기상 관측 이래, 추풍령은 77년 만에, 대구는 52년 만에 가장 늦은 눈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겨울은 그 끈질긴 생존 전략을 어디서 터득한 것일까. 이런 예상치 못한 눈은 식물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이날 나는 재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전남 순창의 회문산에 올랐다. 간밤에 축축하게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깔끔하게 걷혔다. 하지만 기온은 제법 추워 몸을 딱딱히 굳게 만들었다. 이런 기온을 예상치 못한 허술한 옷차림에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하였지만 산중에서 그게 나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 같아 위안을 삼기로 했다.
그 귀하다는 남방바람꽃을 입구에서 보았다. 남방바람꽃은 우리나라에서 관리 소홀로 자생지와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멸종 위기에 놓인 식물이다. 그래서 무분별한 채취와 훼손을 막기 위해 펜스로 막아 보호하고 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울타리 주위를 어슬렁거리는데 그런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무리에서 떨어져 펜스를 훌쩍 뛰어넘은 남방바람꽃 몇 송이! 날씨 탓인지 제대로 피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 남방바람꽃. ⓒ이굴기 |
▲ 남방바람꽃. ⓒ이굴기 |
제비꽃 종류가 많았다. 자주제비꽃, 태백제비꽃, 둥근털제비꽃. 발등 높이로 피어난 그 제비꽃을 보려면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다. 나도물통이, 앵초, 윤판나물도 마찬가지다. 작고 여린 그것들이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서서히 몸에도 에너지가 생겼다. 어느 덧 하늘에도 따뜻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 높지 않은 회문산. 수령 100년으로 짐작되는 보호수인 서어나무를 지나 능선에 이르렀다. 좌우로 소나무, 미역줄나무, 덜꿩나무, 철쭉, 진달래 등이 이상 기후에 어리둥절한 채 서 있었다. 하늘의 심술에 놀라기는 이 나무들도 많이 놀랐던가 보다.
회문산 능선에도 눈이 왔던 모양이다.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잔설이 희끗희끗 눈에 띄었다. 정상인 큰 지붕(해발 837미터)로 접근할 무렵이었다. 눈에 익은 나무가 서 있었다. 그것은 대팻집나무. 재질이 단단하고 치밀해서 '대팻집을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라고 해서 그 이름을 얻은 나무이다. 목수가 나무를 깎을 때 물론 대패의 칼날이 직접적으로 하겠지만 그 칼날이 힘을 용이하게 쓰이도록 하는 게 바로 이 단단한 나무가 하는 일이겠다. 말하자면 제 몸을 스스로 깎는데 안성맞춤인 나무.
이 나무는 해마다 자란 표시를 가지 끝에 스스로 해 둔다. 나무가 나이테를 몸 안에 기록해 두듯 이 나무는 1년의 표시를 그런 식으로 별도로 한다. 이른바 단지(短枝)라는 것이다. 작은 가지에 촘촘한 반지처럼 나 있는 그것은 이 나무를 구별하는 큰 특징이기도 하다.
대팻집나무를 가만히 본다. 간밤에 눈이 오고 기온이 뚝 떨어졌던 모양이었다. 가지 끝에 얼음이 잔뜩 달려 있다. 이것도 단지의 작용일까. 곁에 서 있는 참나무 종류의 다른 가지들보다 이 나무에는 얼음이 유난히 많이 달려 있다. 우둘투둘한 단지는 반지 같아서 얼음을 꽉 끼고 있는 것이렸다. 바람이 휭 불면 투둑투둑 얼음이 떨어진다. 이 척박한 땅에서 공중을 떠도는 근심을 빗질이라도 하는 것일까. 그 얼음은 꼭 참빗 같았다.
▲ 대팻집나무. ⓒ이굴기 |
▲ 대팻집나무의 단지에 붙어 있다가 떨어진 참빗 같은 얼음 조각들. ⓒ이굴기 |
얼음이 떨어져 나간 대팻집나무 줄기 끝을 다시 가만히 본다. 이 나무의 조직이 단단하고 치밀한 비밀은 이 작은 단지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처럼 이 작은 단지의 어엿함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닐까. 대팻집나무는 가지의 중간 중간에 엄지손가락처럼 단지를 치켜세우고 있다. 그리고 손가락에 반지 끼우듯 작은 홈들이 차곡차곡 끼워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혹은 꼬부라지고, 혹은 비뚜름하고, 하고 엇비슥하게, 그 어디로 나아가는 듯하다. 마치 경복궁의 날렵한 처마 지붕에서 공중의 난간을 밟고 줄지어 가는 동물 모양의 잡상(雜像)들처럼!
회문산은 기가 센 곳이라 한다. 그래서 유난히 무덤이 많다. 정상에는 여러 기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무덤 위에 또 무덤이 포개져 있는 형국이다. 그 많은 무덤을 통과하여 회문산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였다. 오늘의 꽃산행도 마무리 단계이다. 이제 식당으로 가는 길에 접어드니 침이 꼴깍 넘어간다. 내 마음은 날렵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해 닭도리탕에 소주 한 모금이면 무덤처럼 그냥 허물어지는 것이다.
식당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큰개불알풀을 찍고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가까이에서 나의 눈에 척 걸려드는 나무와 그 나무의 가지와 그 가지에 달린 잎사귀가 있었다. 특히 잎사귀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사춘기 소녀의 귓볼처럼 솜털이 자욱했다. 내 꽃동무 중의 한 분이 알맞게 표현한 바처럼 이만한 봄날에 산천을 수놓는 '연두에서 초록까지'의 한 단계를 멋들어지게 담당하는 빛깔이기도 했다.
따뜻한 봄날에 파릇파릇 노루의 귀처럼 돋아나는 잎들은 모두 줄기 위에 똑바로 꼿꼿하게 얹혀 있었다. 하나같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공중에 난 계간을 밟고 그 어딘가로 걸어가는 형제들의 행렬처럼 보였다. 낭창낭창한 가지를 밟으며, 햇빛을 톡톡 튕기며, 하얀 솜털을 미세하게 나부끼며, 궁금한 세상을 향해 잎사귀를 벌리며, 녹색의 즙을 칙칙 뿌리며, 그 어딘가로 나아가는 때죽나무 잎사귀들의 행진! 이 낮은 곳에서 구름의 난간으로 통, 통, 통 걸어가는 봄날의 행진!
▲ 때죽나무 잎사귀들.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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