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138호는 '아까운 책' 특집호로 꾸몄습니다. 지난해 가치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고 우리 곁을 스쳐가 버린 숨은 명저를 발굴해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열두 명의 필자가 심사숙고 끝에 고른 책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함께 '나만의 아까운 책'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작업은 출판사 부키와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여기 공개되는 원고를 포함해 총 47편의 서평이 실리는 단행본 <아까운 책 2013>이 오는 5월 초 부키에서 발간됩니다. <편집자> |
철학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마르크스 이후 지속되어온 하나의 지적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마르크스부터가 그랬다. 당시에는 독립된 학문으로서 경제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지만(그래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했지만), 그는 동시대 다른 경제학자들에 비해 아마추어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하여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시도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 앞에 언제나 마르크스의 이름을 떠올린다.
한국의 맥락에서 보자면 이제 우리에게는 김상봉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오버'나 과잉해석이 아니다. 김상봉은 자신이 거의 알지 못하는 분야에 맨발로 뛰어들어, 그 기본 원리부터 차근차근 공부한 후, 현재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해답을 찾아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김상봉 지음, 꾸리에 펴냄)는 모든 대선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자신의 공약으로 삼고 떠벌이고 있던 시점에, 정작 그 '경제민주화'의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 그런 책이지만, 합당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신간이 깔리는 매대에서 밀려났다.
▲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김상봉 지음, 꾸리에 펴냄). ⓒ꾸리에 |
철학자가 '물음'을 던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이상하지 않다. 어떤 철학자들은 사회가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대답'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근거'를 대기 위해 자신이 아는 분야 너머를 공부하는 철학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김상봉은 그런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기초한 진보신당의 강령에 적혀있는 "오직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의 자유와 참된 만남의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문구를 그는 곱씹는다. 자본주의를 극복한다고 하는 말은 좋다.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김상봉은 진보신당에서 발생한 수많은 소모적 논쟁에 자신의, 혹은 자신이 만든 강령의 책임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랬으니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당 차원의 토론도 실천도 없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7쪽)라고 후회하는 것이다. 거리의 철학자가 <민법총칙>과 같은 법학 교과서를 펴들고, 경제학을 새삼스럽게 다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에서 김상봉은 마르크스부터 가라타니 고진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이론가'로 통용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됐건, 가라타니 고진이 제안하는 '세계 공화국'이 됐건, 그것들은 "근본에서 보자면 사회주의를 추구하든 아니면 자본주의를 인정하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전제, 즉 정치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본권력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전제에 입각"(49쪽)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상봉이 볼 때 이 전제는 기업의 힘이 정부의 힘을 압도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 초국적 자본이 국경을 넘어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국사회주의'가 됐건 '영구혁명'이 됐건, 정치권력을 잡아서 자본을 제압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김상봉은 "기업의 현행 지배구조 그 자체를 해체하여, 대대로 세습되는 왕국과도 같은 기업을 노동자들이 주인 되는 공화국으로 바꾸는 것"(54쪽)이 해법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기업이 국가보다 더 크고 강한 공동체가 되어 국가가 기업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 그리고 기업이 독재적 조직이어서 거기 속한 노동자들의 자유가 억압받고 노예상태로 전락한다면, 기업의 지배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어버리면 되는 것이다."(같은 곳)
김상봉에 따르면 이러한 발상은 사회주의 운동의 초창기부터, 특히 마르크스 자신에 의해 비판받았다. "기업 내에서 노동자의 노예화는 마치 전쟁터에서 병사가 장군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한 사람에 의해 계획되고 지휘되어야 할 기업생산의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55쪽)고, 마르크스가 주장하고 있음을 김상봉은 지적한다. 하지만 그 군대가 상명하복에 기반한 오늘날의 것이 아니라, 민주적 토론과 합의로 지휘되던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군대라면 어떨까? 김상봉은 철학자다운 과감한 상상력을 발휘해 머뭇거리는 우리를 새로운 차원의 문제로 이끌어간다.
이것이 이 책이 갖는 첫 번째 가치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운동권'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지만, 변화한 현실에 맞춰 이론을 수정하고자 기꺼이 노력하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을 타고 이른바 '운동권'들은 민주노동당의 깃발 하에 대거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국회 내에서 10석의 의석을 확보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정치 세력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의 정치적 성취가 곧 경제적 평등의 확보로 이어졌던가? 이후 연신 분당과 탈당, 선거 부정 등을 겪으며 진보정치의 깃발은 땅에 내팽개쳐진지 오래다.
한국의 운동권들이 이른바 '비합법투쟁'을 통한 혁명에서 '부르주아 의회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자는 인식 전환을 이루어낸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민주화 이후 급격하게 성장해버린 경제 권력과의 투쟁에 너무 순진한 태도로 뛰어든 것은 아닐까? 한때 현대그룹의 총수였던 정주영은 국회 청문회에 불려나와 '왕회장' 답지 않게 벌벌 떠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제 삼성의 이건희는 대통령을 포함해 대한민국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 권력을 획득하여 경제 권력을 통제한다는 아이디어의 유통기한은 이미 지났다고 김상봉은 판단하고 있고, 그의 현실 인식에 반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현실이 바뀌었으면 당연히 우리가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다듬고 벼리는 '이론'도 바뀌어야 한다. 이 당연한 결론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김상봉은 해냈다. 앞서 인용된 구절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외국의, 혹은 과거의 이론가에게 기대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재단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의 이론이 지금의 현실에 통하지 않는 이유를 묻고 따지며, 새로운 이론을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의 지식인이 이러한 행보를 보여주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리기도 했다. 이른바 '이론 수입상'에서 벗어나 스스로 답을 찾아나서는 철학자의 책이라는 것, 그것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를 되짚어보게 만드는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독일에서 칸트 철학을 전공한 김상봉에게 '주식회사'라는 주제가 익숙할 리 없다. 하지만 그는 서슴없이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의 책을 펼쳐들고, 온갖 법학 교과서를 뒤적이며, 그리하여 본인이 찾을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을 제시한다. 이러한 지적 정직성과 노력의 모습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후학'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사회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속한 분야의 연구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지만, 모르면 모른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공부해나가는 학자의 작업물은 그 자체가 흥미진진한 지적 여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역설적이게도 '공부란 무엇인가', '지식인은 어떻게 자신이 모르는 분야를 배워나가는가' 등의 질문에 대해서도 해답, 혹은 모범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그것이 이 책이 갖는 세 번째 가치라고 할 수 있겠다.
'경제민주화'라는 껍데기뿐인 구호를 뒤로 하고, 주주자본주의가 옳으냐 아니면 재벌가의 지배를 인정하되 '사회적 대타협'을 요구하는 것이 옳으냐 같은 기존의 논쟁을 잠시 접어두고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자. 법원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편법상속을 솜방망이 처벌하면서 사실상 합법화해주는 판국에 주주자본주의의 실현이 가능한가? 중고등학생들도 이건희를 농담 삼아 '건희제'라고 부를 만큼 재벌 가문의 위세가 등등한 판에 누가 누구에게 '대타협'을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 철학자가 고심끝에 내놓은 '노동자에 의한 주식회사의 소유'가 공상적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초현실적인 현실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이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쩌면, 경제학에도 법학에도 전문가가 아니지만, 진지하고도 집요하게 주식회사의 소유권을 고민해낸 한 철학자의 목소리일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국내의 진보적인 연구자들이 이렇게, 기존 '운동권' 논리와 이론의 범위를 벗어나 독보적인 학문의 영역을 개척하는 일이 종종 눈에 띈다. 그 중 가장 탁월한 책을 하나 꼽자면 홍기빈이 쓴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책세상 펴냄)일 것이다. 스웨덴에 사민주의를 정착시킨 위대한 정치가 비그포르스의 이력을 꼼꼼하게 짚어내는 이 책을 쓰기 위해, 홍기빈은 마치 김상봉이 법학을 공부하듯 스웨덴어를 익혔고, 그리하여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인물과 문헌들이 대거 등장하는 '학문적 블록버스터'를 완성해냈다. 특히 264쪽에서 267쪽까지 소개되어 있는 비그포르스와 칼레뷔의 논쟁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주제의식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들의 진지한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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