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 138호는 '아까운 책' 특집호로 꾸몄습니다. 지난해 가치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고 우리 곁을 스쳐가 버린 숨은 명저를 발굴해 소개합니다. 다양한 분야 열두 명의 필자가 심사숙고 끝에 고른 책은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함께 '나만의 아까운 책'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 작업은 출판사 부키와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여기 공개되는 원고를 포함해 총 47편의 서평이 실리는 단행본 <아까운 책 2013>이 오는 5월 초 부키에서 발간됩니다. <편집자> |
지난 백 년은 '서구화'의 시대였다. 서양식 스타일이 우리 삶의 좌표축, 곧 북극성이 되었다. 사람의 생존을 영위하는 물질적 조건을 의, 식, 주라고 칭한다. 서양식 삶을 갈망한 우리 욕망은 그 세 방면의 명칭 변화에 잘 들어있다. 그동안 옷은 양복으로, 먹을거리는 양식으로, 집은 양옥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여기 접두사 '양'은 모두 서양을 지칭한다. 서구화란 곧 문명화의 길로 여겨졌으니 양복을 입고, 양식을 먹고, 양옥에서 사는 것이 문명인의 조건이 되었다. 여기서 서구화=문명화의 등식이 성립하였다.
서구화=문명화의 등식은 1910년, 일제 식민지가 되면서부터 이 땅을 덮친 지진이었다. 일제하에서 그 지각변동은 비틀어진 형태로 분출하였고 또 그 과정은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발밑의 지각변동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발밑의 요동이 심할수록 우리는 더더욱 광적으로 서양이라는 북극성을 갈망했을 따름이다.
그 와중에 조선적인 삶은 야만적인 것으로 내몰렸다. 서양식 옷인 양복이 의복의 대명사로 취임하는 순간 조선옷에는 '한복'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양옥이 집의 보통명사가 되는 순간이 땅의 집들은 '한옥'이 되었으며, 양식이 먹을거리의 표준이 되면서 우리 밥은 '한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양'이라는 단어가 선망과 바람의 접두사라면, 여기 '한'이라는 접두사는 모멸과 소외의 상징이 된다. 한복은 치마저고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옥은 초가와 기와집으로 한정되고, 한식은 밥과 국에서 더 이상의 진화가 불가능하다.
1.
의식주가 인간 삶의 외면이라면 지식은 그 속살이다. 급급한 서구화의 갈망은 정신 방면에서는 더욱 심대하고 강력하게 작용했다. 사서삼경으로 대표되는 유교서적들이 급속도로 서가에서 빠지는 대신 그 자리를 서양의 '명작'들이 채웠다. 향교와 성균관은 소학교와 대학교로 재편되었다. 그 사이에 지식 세계의 모습이 급변했다.
그 변화상은 지식을 담는 그릇인 책의 변모와, 유교경전이 누워있던 '서가'에서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 책이 들어찬 '서재'로 바뀐 데서 잘 나타났다. 책은 재료부터 바뀌었다. 종이는 '한지'가 아닌 양지(洋紙)로, 즉 흰색의 서양종이로 바뀌었고, 판형은 실로 꿰맨 들쑥날쑥한 모습에서 국판 또는 크라운판의 '양장'이 되었다. 식민지시대 책 광고를 잠시 빌리자면, "4*6판 크로스 양장(洋裝), 호화미본(豪華美本), 용지(用紙) 최고(最高) 순백양지(純白洋紙)"라야 책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단단한 표지에 금색으로 제목을 찍은 금박의 양서(洋書)는 소유자의 교양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고, 양서들이 서재에 도열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인은 근대의 문명인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책의 속살은 한번 따져볼 여가도 없이, 껍데기만으로 받아들이기에 급급한 '속물교양'이 이 땅에 탄생하는 순간이다.
2.
▲ <속물 교양의 탄생>(박숙자 지음,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
이 책에서는 명작이 '교양의 증서'가 되는 식민지의 역사를 돌아보며 무엇이 명작이고 명작이어야 하는지를 묻고자 했다. 실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문학전집이 필독서로 읽히고 교양의 증서로 엘리트의 서재를 장식하고 있다. (…) 명작이 비싼 양장본으로 제본되어 소장 가치로 전전하는 과정을 실상 지식을 자본화하고자 했던 근대의 일면이다. 이렇게 명작이 소비되는 과정에서 유령처럼 가라 앉아있는 속물적인 욕망을 되짚어 보려고 했다.(19쪽)
책을 읽으면서 문득 부끄러웠다. 내 욕망의 출발점을 이 책에서 발견했던 때문이다. 내 발밑을 처음 보게 된 당혹감이라고 할까. 젊은 시절 꾸었던 꿈, 이를테면 남향의 양옥집에 서재를 마련하고 의자에 앉아 느긋이 책을 읽으며 살리라는 독서인의 바람은 지금도 기억한다. 이제 책상물림이 되어, 단독의 서재는 만들지 못했으나 거실을 서재로 겸하여 쓰고 있으니 '절반의 꿈'은 이룬 셈이라 할까. 그러나 그 꿈의 내력은 한 번도 따져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식교양인의 바람이 고작 식민지 체험을 기원으로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 놀랍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개인사를 넘어 한국지성사의 근원에까지 닿는다. 여태껏 우리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금언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살았지만 그 책이 '어떤' 책이며, 그 길이 '어떤' 길인가는 거의 질문하지 않았다. 책은 한서(漢書)에서 양서(洋書)로 바뀌고, 길은 중국으로 나있던 것이 서양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책은 우리 책이 아니요, 언제나 남의 책이었다. 나의 필요가 아니라 바깥에서 주어졌다는 점에서 '경전'이든 '명작'이든 다를 바 없었다.
3.
그러면 속물교양의 탄생을 알려주는 "명작으로서의 세계문학의 목록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우리는 당연하게 <일리아드>와 <신곡>으로 시작하는 세계문학을 상상하는데 과연 이러한 기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세계문학이 곧 서구문학으로 동일시된 이 기억과 구성, 그리고 목록은 언제부터 고정된 것일까? 이런 의문 속에서 흥미로운 것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대중이 한결같이 '세계문학전집'을 (일본)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신조사판 세계문학전집'은 세계문학전집의 대명사처럼 통용되었다.(59~60쪽)
일본의 일개 출판사, 신조사(新潮社)의 '세계문학전집' 목록이 새로운 경전, 곧 명작의 계보로 등장하였다. 전근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맞으면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고민하지 못하고 식민 모국에서 전해준 명작(새로운 경전)을 무반성적으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만 골몰한 것, 이것이 한국지성사의 근원적 부끄러움이다. 그것은 조선시대 속유(俗儒)들이 유교경전을 암송하기에 몰두했던 것과 같은 정신 상태로서, 일개 식민모국의 출판사가 작성한 세계명작을 따져보지 못하고, 통째로 흡수하였을 따름이다. '속유'가 '속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기원한 속물교양이 오늘날도 버젓이 횡행한다는 자괴감은 그 부끄러움이 현재진행형임을 확인시킨다.
참담하게도 남의 책을 암송하고 남의 삶을 숭배하는 속물교양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식민지시절 '명작'의 시대를 거쳐 지금 우리는 '원서'의 시대를 살고 있다. 대학은 영어강의가 필수요건이 되고, 하버드대학 교수의 강의록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은 오늘도 출판사의 좋은 먹잇감이고, 새 학기마다 고전 필독서가 전집의 형태로 제시된다. 아니 중, 고교에서부터 교과서라는 이름의 '사용설명서'(교과서는 '책'이 아니다)를 암송하는 공부가 온존하고 있다. 원산지 증명서만이 바뀔 뿐(중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아직도 속물교양의 시대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은 부끄러움을 넘어 참담함을 갖게 만든다.
이제는 남의 것 '배우기'를 그만 두고 내 삶을 '잘 살기'를 고민해야 하리라는 유치한 각오가 이 책의 독후감이다. 그리고 서툴더라도 '과연 잘 살기란 어떤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 그제야 참된 교양, 올바른 글 읽기와 쓰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너무나 근본적인 다짐이 맥을 빠지게 만든다. 문득 평생 농투성이로 살다 죽은 전우익의 비평이 겹쳐든다.
"요즘 한국의 학문풍토는 다 가짜 같아요. 그들은 누가 더 정확한 '반사체'인가를 다투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소화가 제대로 안 되면 먹은 것이 그대로 나옵니다. 먹은 것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 정확한 반사체와 비슷한데, 그것이 병인지 모르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사람이란 처음에야 딴 사람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라 하더라도 좀 지나면 씹고 걸러 자신의 것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반사체는 아무리 커 봤자 생명이 없고 열이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린 비록 작고 작을지라도 '발광체'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전우익 지음, 현암사 펴냄, 86쪽)
지금도 이 땅에 횡행하는 속물교양은 전우익의 표현으로 하자면, '반사체'다. 새롭게 건설해야 할 것은 "비록 작고 작을지라도 발광체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내 삶 속에서 빚어진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터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책이요, 참된 교양이 될 것이다. 이제쯤 우리는 이 질문을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저자 박숙자도 그 질문의 끈, 희망을 끝까지 놓치지 않은 듯하다. 식민지 조선의 모방과 속물의 홍수 속에서나마, 미약하게 출현한 '민중대학을 표방하는 새로운 문고본'의 기획을 두고 끈을 찾는다. 이 책의 마지막에 저자는 그 희망을 이렇게 남겨놓는다.
"좋은 책으로의 귀환과 복귀, 이러한 가능성이 우리 역사 안에 이미 있었다. 이것이 바로 명작의 시대에 물어야 하는 질문이 아닐까? 민중대학을 표방하는 새로운 문고본 기획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면서 '책'을 어떻게 읽고 성찰해야 하는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324쪽)
4.
이 책을 읽으면서 얻는 부가소득도 만만치 않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기억하는 선열들의 겨레말 지키기가 단순히 일본어 상용의 강요에 기인한 것만이 아니라, 화려하고 편집이 잘되어있고 또 값도 저렴한 일어판 문학전집을 선호하는 식민지 대중의 기호가 더 큰 위협이 되었다는 숨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고유의 말과 글을 지키려는 노력은, 단순히 고운 말을 쓰고 정확한 글을 쓰기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말과 글을 담는 형식으로서 책과 미디어에도 주의해야 한다. 즉 출판환경을 보존하는 것도 우리 말글을 지키는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덧붙여 이 책의 사이사이마다 게시한 당시 사진들과 책 광고들은 독자를 생생한 당시 현장으로 초대한다. 또 식민지 지식인들, 이를테면 이광수, 김동인 등이 선망한 서양문학의 체험을 인터뷰한 내용이 부록으로 처리되어있어 본문의 서술의 근거를 확보한다는 점도 장점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일종의 자료집으로서 가치도 지닌다.
다만 일본에서 서양 명작들이 어떻게 계보화되고 또 전집으로 꾸려졌는지를 좀 더 소상히 살펴주었다면, 조선의 것과 비교하여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런 주문은 이 책의 범위를 넘는 일이리라.
속물 교양의 탄생은 식민지 조선의 처지와, 또 일본 지식계의 상황과 밀접한 상관이 있다. 이에 다음 책들을 함께 읽으면 깊은 독서가 될 것이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1. <번역과 일본의 근대>(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이산 펴냄) 일본의 근대가 서양어 번역을 통해 이뤄졌다는 사실을 두 석학의 대화를 통해 쉽게 서술한 책. 2. <영웅에서 위인으로: 번역 위인전기 전집의 기원>(김성연 지음, 소명출판사 펴냄) 식민지 시기 발간된 번역 위인전기 총서를 대상으로 근대적 서양 위인들의 전기와 자서전이 어떻게 생산되고 소비됐는지 살펴본 연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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