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26일
여러 갈래 중요한 사태가 긴박하게 펼쳐지고 있다. 2월 말의 유엔 소총회 결의를 기점으로 시작된 '가능 지역 선거' 추진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고, 이에 맞선 '남북 협상'이 평양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제주에서 터진 4·3 사태는 미군정의 모순과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해방 일기' 작업 초반에는 뚜렷한 지표가 되는 사건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평온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진행 속에서 미묘한 의미를 짚어내는 데 힘을 쓸 수 있었다. 조선 밖으로 눈을 돌려 세계적 변화를 살필 여유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조선의 운명을 가름하는 중요한 사태를 쫓아다니며 꼭 필요한 해설을 하기가 바쁘다.
상황의 분화와 고착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제국 붕괴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붕괴 직후에는 예정되어 있는 변화들이 아직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잠재되어 있거나 혼선을 빚고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의 주체들이 형성되어 각자 분명한 지향성을 갖고 서로 어울리고 부딪치는 단계에 온 것이다.
한 달 넘게 일기 내용이 가능 지역 총선거, 남북 협상, 4·3 사태의 세 가지 주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런 상황이 앞으로도 몇 주일 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주제를 한 차례 다뤄야겠다. 4월 하순 일본에서 일어난 '한신(阪神) 교육 투쟁'이다.
해방 당시 조선에는 약 70만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고 일본에는 200여만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 종전 후 재조선 일본인은 거의 남김없이 일본으로 돌아간 반면 재일 조선인은 3분의 1 이상이 일본에 남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남조선 여건이 귀환민 정착에 좋지 않은 것이 큰 이유였다는 사실은 많은 귀환민의 일본으로의 역류 현상이 입증한다.
1947년 7월부터 매월 1만 명 전후의 조선인 밀항자가 일본에서 체포되기 시작했는데, 밀항에 실패한 사람보다 성공한 사람이 더 많았기 때문에 밀항 시도가 늘어났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1948년 초 시점에 약 80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눌러앉을 생각으로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6년 6월 21일, 9월 2일, 11월 4일자 일기)
맥아더 사령부 점령 하의 일본에서 조선인 집단의 위상에는 근본적인 불안정성이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종래의 피압박 민족에게 얼마간의 우대와 보호를 베풀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조선인 중에는 주어지는 정도의 우대와 보호를 넘어 전승국 국민의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경향이 많은 일본인을 격분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발언이 1946년 가을 중의원에서 나왔다. 시이나 사부로(椎熊三郞) 의원의 대정부 질문이었다.
"(…) 종전 당시까지 일본에 재주하여 일본인으로서 생활하고 있었던 대만인, 조선인 등이 종전과 동시에 흡사히 전승국민과 같은 태도를 하고 방약무인의 행동을 감행해 왔던 것은 실로 아등이 취시할 수 없는 바이다. (박수)
최근에 이르러 한번 귀국하였던 그들이 특히 조선인에 있어서는 혹종의 조직력을 가지고 재차 일본에 밀항 잠입하려는 자가 축일 증가하여 규슈(九州) 산인(山陰) 방면에 있어서 그 수 실로 수만에 달한다고 듣는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 경찰력의 미약함을 틈타서 흉기를 가지고 도당을 짜고서 놀랄만한 흉악성을 발휘하여 당해 주민의 생활을 위협하는 것은 실로 언어에 절하는 감이 있다고 듣는다. (박수)
지금 아직 내지에 있어 외국인이란 특수한 지위를 악용하여 경찰력의 무력화에 틈타서 모든 불법을 감행하는 자가 다수 있다는 것은 이미 제군도 양지할 것이다. 우리는 유감하나마 패전 국민이기는 하지만 종전의 순간까지 동포로서 같이 이 나라의 질서 밑에서 생활한 자로 갑자기 변해서 흡사히 전승국민과 같이 게다가 (…) 그 행동은 패전의 고통에 신음하고 온 우리에게 있어서 참말 전신에 혈조가 역류하는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다. (박수)" (<서울신문> 1946년 11월 7일자)
패전 직후의 일본 경제는 참혹한 상황이었다. 생존을 위해 암시장 등 불법 행위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인 중에는 점령군의 단속을 덜 받는다는 이점을 활용, 조직 활동과 불법 행위를 자행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일본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릇된 월권행위가 아니라 압박에서 풀려난 민족으로서 당당한 권리를 되찾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민족 교육을 위한 조선인학교 운동이 그런 예다. 200여만 거류민 자제들이 일본교육을 강요당하던 상황을 벗어난 이제 일본의 소수 민족으로서 제 자리를 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일본인은 조선인들의 당연한 권리 주장에서조차 피해의식을 느꼈다. 그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환경 때문에 조선인을 질시한 면도 있고, 일부 조선인의 난폭한 행동 때문에 편견을 가지게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 사령부도 조선인 집단을 치안 불안 요소로 보게 되어 일본에 정착할 조선인은 일본인으로 간주하는 정책을 굳히게 된다.
재일 조선인 사회가 이 시기에 처해 있던 사정에 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을 텐데, 나는 이런 연구를 많이 찾아보지 못했으나 대략의 사정이라도 밝혀두고자 한다. 조선에서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미국과 소련의 노선이 부딪치는 상황이 재일 조선인 사회에도 투영되어 온 사실을 알아볼 수 있는 기사가 보인다.
"재일 동포도 3·1절 기념"
[동경 2일 발 AP 합동] 당지에서는 3·1 운동 제29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약 1만 명의 조선 동포 남녀노소가 2개 단체로 나누어 영-미-소 등의 기를 들고 시가 행진을 하였다. 그런데 그중 한 단체는 조선으로부터의 양군의 동시 철퇴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또 한 단체는 조선 정부 수립 촉진을 부르짖고 조선을 통일시키려는 유엔 안을 지지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2일)
재일 조선인의 귀환이 같은 미군정 아래 있던 이남 쪽이 이북 쪽보다 순조로웠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런데 재일 조선인 집단에 대한 정책은 군정청 지배 하의 이남에 비해 자주성이 강한 인민위원회 체제의 이북 쪽이 더 활발했으리라는 것 또한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리고 재일 조선인의 권리 운동에는 공산당 등 좌익 일본인들의 참여와 동조가 있었다.
1945년 10월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은 좌우 구분 없는 민족주의 단체였는데 1년 후 우익 성향의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민단)이 떨어져 나가면서 조련이 좌익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고, 그를 기반으로 1955년 5월에 재편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이 재일 동포 사회에서 오랫동안 민단을 압도하게 되는 출발점이다.
한신 교육 투쟁의 발단에 대한 <위키 백과> '한신 교육 투쟁' 조의 설명을 옮겨놓는다.
1947년 10월, 연합군 최고 사령부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 정부에게 재일 조선인을 일본의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에 따르게 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당시 재일 조선인의 아이들은 전쟁 전·전시의 황민화 교육 때문에 조선어를 읽고 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일본 각지에 국어 강습회가 개최되어 한글과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재일 조선인의 아이들에게 독자적으로 제작한 교재로 조선어를 가르쳤다. 국어 강습회는 재일본조선인연맹(약칭 '조련') 사무소나 공장 철거지, 현지의 초등학교 교사 등을 빌려 열렸다. 그 후 국어 강습회는 조선인 학교로 개편되어 갔다. 이 학교는 전국에 500여 개, 학생 수는 6만여 명에 이르렀다.
1948년 1월 24일, 문부성 학교국장은 각 도-도-부-현 지사에 대해 '조선인 설립 학교 취급에 대해서'라는 통지를 내려 조선인 학교를 폐쇄하고 학생을 일본인 학교로 편입시키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조선 학교 폐쇄령이다. 오사카 부와 효고 현은 이에 근거해 조선 학교의 폐쇄를 명령했다.
같은 해 1월 27일, 조련은 제13회 중앙위원회를 개최해 조선 학교 폐쇄령에 대해 반대를 밝혔다. 그리고 '3·1 독립 운동 투쟁 기념일'에 맞추어 민족 교육을 지키는 투쟁을 전국에서 전개할 것을 호소했다.
4월 하순의 사태 진행을 <위키 백과> 같은 조 내용을 통해 살펴본다. 4월 10일 효고 현 지사가 조선인 학교 폐쇄 명령을 내리고, 이 명령이 4월 23일 두 곳 학교에서 시행되었다. 이튿날 이에 항의하는 조선인과 일본인 군중이 현청에 몰려들어 시위하다가 현청에 진입해 점거하는 사태로 발전했고, 기시다(岸田幸雄) 지사를 일시 감금하기까지 했다. 이 사태로 미군 점령 후 최초의 비상사태가 효고 현 군정부에서 발령되기도 했다. 1000여 명이 검거되었고, 그중 23명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한편, 오사카에서는 4월 23일 아침에 7000여 명이 참가한 '조선인 학교 탄압 반대 인민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뽑힌 16인 대표단이 부청에 가서 교섭을 요구했고, 지사가 부재 중이라 부지사가 교섭에 나섰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던 중 오후 3시경 군중이 부청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 날 충돌로 조선인 한 명이 죽고 20명이 다쳤으며 경찰도 31명이 부상당했다. 26일 다시 열린 인민 대회에는 2만 명이 모였고, 그중 일부가 부청을 향해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과 충돌, 조선인 한 명이 죽었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조련과 교섭, 5월 5일에 조련 교육대책위원장과 문부대신 사이에 각서가 체결되었다. 조련 측은 "교육기본법과 학교교육법을 준수한다", 일본정부 측은 "사립학교의 자주성의 범위 안에서 조선인 독자적인 교육을 인정하고, 조선인 학교를 사립학교로서 인가한다"는 내용의 각서였다.
4월 들어 일본 정부의 조선인학교 폐쇄 방침이 실행 단계로 접어들면서 국내에서도 재일 동포의 상황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 1945년 4월 15일자 <서울신문>에는 "그들은 안전하게 귀국한 감사를 무엇으로 갚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앞세워 "심지어는 공부하는 권리까지 빼앗는 전대미문의 만행"을 일삼는다며 일본 내의 민족 갈등 사례를 열거한 기사가 실렸다. 일방적 비판이기 때문에 시비를 살핌에 주의를 요하는 것도 있지만, 갈등이 심각한 정도를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사례들이다.
▷일본 대의원의 폭언: 1946년 4월 일본 선거 때 가메다(龜田)라는 대의원은 깜찍하게도 조선과 만주는 당연히 일본이 위임 통치를 해야 할 것이라는 폭언을 토하여 그들의 야욕과 치몽(痴夢)의 일단을 보여 우리를 놀라게 하는 동시에 세계의 물의를 샀다.
▷중의원의 발악 : 동년 8월 17일 중의원회의 때 시이구마(椎熊)라는 자는 말하기를 일본에 있는 조선 놈들은 모두 도적놈들이다. 그러니 이들을 모조리 조선으로 추방시켜야 한다는 발악을 하여 위원 전부로부터 일대 갈채를 받았다는 것이다.
▷일인 취급으로 자주권 박탈 : 1946년 12월 안으로 모두 귀국하라. 귀국 않는 조선인은 모두 일본인으로 간주하여 일본법을 준수시키게 한다는 법령을 내려 떳떳한 외국인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하며 조선인의 자주성을 빼앗으려 했다.
▷재일 동포 자산 반입 방해 : 갖은 학대 아래서 온갖 피땀 흘려 벌어 놓았던 고귀한 동포들의 재산을 찾아오려는 것을 그들은 갖은 모략을 세워 그것은 모두 일본 재산이라느니 무어니 간계를 꾸며 못 가져가도록 맥아더 사령부에 중상을 하고 있다.
▷재일 동포 대표자들의 추방 : 1946년 12월 24일 재일 조선인생활보장위원회에서는 동포의 모든 권리의 옹호와 등록항의 재산세예금보험금의 봉쇄 반대 대회를 궁성 앞에서 열고 요시다(吉田) 수상에게 진정 간 대표 10명을 수위와 경관이 구타 검거 폭도라는 죄명으로 군률재판에 걸어 결국은 고국으로 추방당했다.
▷북해도 사건 : 1947년 9월 11일 북해도 北見이라는 곳에서는 일인 80명이 동포 40명을 둘러싸고 구타하는 동포 2명이 죽고 다섯 명의 빈사자가 생긴 일대 불상사가 일어났다.
▷소위 등록 문제 : 1946년 12월 오사카(大阪)에서는 특히 조선인을 상대로 한 소위 외국인 등록제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조선인의 손과 발을 얽어매는 법령임에 일대 반대로 법령을 거둬들였으나 1947년 9월 다시 발포하여 등록 안하면 체형까지 한다고 협박 물의를 일으켰다.
▷악질 시즈나가(靜永)의 악행 : 경성지방검사국 경제과장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던 시즈나가란 놈은 귀국 후 오사카에서 여전 검사의 직을 가지고 동포 학대가 어찌 심한지 맥아더사령부에서 조선에 있을 때 그놈의 행장을 조사하겠다고까지 한다.
▷재일 학생의 추방 간계 : 1947년 2월경 귀국 못하고 그대로 남아 있으며 면학의 길을 걷고 있는 학생들은 쫓아내려는 음모를 세워 못된 계획을 꾸미고 있다.
▷도적놈 취급 : 1947년 1월경 전쟁 후 도적이 성행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던 나머지 방범주간을 설치했는데 그 포스터에다 도적놈을 그리고 태극기를 머리에 그려 붙여 도적놈은 전부 조선 놈이니 잡아 죽이라고 떠들어댔다는 것이다.
한신 교육 투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4월 23일자 <동아일보>에는 민단 박열 단장의 비서 박성진의 진술이 보도되었다. "남북 협상은 현실을 무시-문교부 제정 교과서 사용한 재일 동포 학교에는 간섭 없다"란 제목의 이 기사 중 "일본의 우리 동포 교육 문제의 진상" 부분을 옮겨놓는다. 박성진은 4월 16일에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한다.
"나는 본국에 돌아오기 전에 이번 대판에서 일어난 일본 정부에서 탄압을 가한 우리 동포 교육 문제에 대하여 대판에 들려 당지 교육회장 최 씨와도 만나 실정을 듣고 보았다. 이번 일본 정부에서 우리 조선인 학교에 탄압을 가하였다는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포하여오던 문제가 이번에 폭발된 것이다.
발단은 우리 동포가 경영하는 대판사범학교에서 폭발된 것인데 즉 해방 후 일본에는 조선인의 경영으로 703교가 있다. 그중 정식으로 연합국 사령부와 일본 정부에 인가를 얻어 남조선 과도 정부 문교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로 교수하는 학교는 불과 3할밖에 안 된다. 그 나머지 7할이란 것은 좌익 단체인 조선인연맹이란 단체 산하에 속하여 정식 인가도 없이 교육을 시키는 학교들이다.
그러면 이 조선인연맹 산하에 7할이란 학교는 교육은 제2요, 좌익 사상 선전 기관으로 북조선과 연락하여 검정도 없는 교과서를 사용하고 애국가 대신 해방의 노래를 부르며 교학 기관이라기보다 좌익 선전 기관화하고 있다. 한 말로 말하면 일본 정부는 그 동안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필경 이번과 같은 조치로 나오게 된 것이다. 거룩한 우리 동포의 교육 기관이 좌익 사상적 침해로 말미암아 교육이 침해당하고 민족이 박해를 당하게 된 큰 원인이다.
다만 한 가지 국내 동포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우리의 국어를 사용 못하게 한다든가 우리의 역사를 못 가르치게 하는 등 명령을 내린 사실은 없다. 정당히 당국의 허가를 받고 남조선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한다면 이런 폐단은 없을 것이다. 그의 한 예로는 조선교육회 경영인 경도의 조선공업학교라든가 조선중학교 같은 것은 일본인도 놀라고 찬사를 하고 있을 만큼 훌륭한 조선 교육을 시키고 있다. 문제는 재일 동포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면 본국에서 교본과 충실한 교원을 일본에 파견하여 재일 조선인 교육기관을 개편하면 문제는 해결될 줄 안다."
민단이 미군정에게 얼마나 순종적이고 국내 총선거 추진 세력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진술이다. 몇 주일 후 5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민단이 이승만 측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재일 거류민 연락소 이 박사와는 무관"
이화장 비서국 및 박열 씨 비서 박성진 씨는 18일 재일본거류민단 본국연락소 설치와 동단 부서에는 이 박사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요지의 공동 담화를 발표하였다.
조선인 학교 폐쇄 반대 운동을 좌익과 연결시키는 민단의 관점을 맥아더 사령부 고위층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일 미8군사령관의 발언에서 알아볼 수 있다.
"재일 동포 소요는 선거 견제가 목적?"
[오사카 28일발 UP 조선] 조선인과 일본공산당은 다 같이 부정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 측 옵서버 측에서는 당지 및 고베에서 발생한 조선인과 일본공산당이 공동으로 계획한 학교법에 반대하는 소동과 당국에 대한 시위 행동은 5월 10일의 남조선 선거에 앞서서 반미 감정을 전파하기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제8군사령관 로버트 엑컬버거 중장은 고베에서의 조선인 사건에 공산주의자는 관계가 없다는 도쿄 요코하마 지구의 지명(知名) 조선인 성명을 반박하는 성명서를 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다.
"우리는 현재 고베 사건에 관계한 것이 확인된 7명의 자백한 일본 공산주의자를 고베에서 검거하여 왔다. 그리고 대판의 부지사청에서 행한 폭동에 참가하고 있는 유명한 조선 공산주의자의 사진을 가지고 있다. 고베 오사카 지구 정세는 현재 정온하여 완전히 진정되었다.
한편 미국 점령당국에서는 폭동화한 금번의 군중 데모를 주최한 재일조선인연맹은 과거에 있어 누차나 소련의 조선 점령 정책을 지지하고 북조선의 민주인민공화국을 칭양(稱揚)하였으며 국제 공산당 노선에 추종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최고 당국자가 조선인 선동자를 탄핵한 결과로 필연적으로 남조선 공산주의자 및 극좌분자의 술중(術中)에 빠지게 될 것이 염려된다. 조선인의 학교 문제에 관한 의논은 일본재류 전 외국인은 점령군에 속하지 않는 한 일본 법률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미국 점령 정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효고 현 지사 기시다(岸田) 씨는 24일의 조선인 사건 결과로 사직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 그는 여차한 사건을 발생케 하고 또한 폭도와 타협한 까닭으로 체면을 손상하였다 한다. 그는 억류되어 있는 동안에 조선인의 압박 하에 구금되어 있었던 73명의 조선인 석방을 지령하였던 것이며 현회 의장에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스즈키(鈴木) 사법상 후쿠이(福井) 검사총장 및 후쿠지마(福島) 내각서기한장보 일행은 현재 조사를 위하여 당지에 내착할 예정이다. 그들은 27일 맥아더 사령부 정치국장대리 C. 케이디스 씨와 협의하였다.
한편, 16명의 조선인 및 9명의 일본인이 24일 현청 포위 중 공공건물 틈입(闖入)한 이유로 27일에 검거되었다. 그들은 일본법정에서 기소될 것이다. 33명의 조선인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오사카 현청에서는 학교 문제로 새로운 조선인 폭동에 경계하여 비상 대책본부를 설치하였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9일)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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