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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감상용? 홍대, 문래동, 대한문 앞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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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감상용? 홍대, 문래동, 대한문 앞의 현실!

[최원호의 美美하우스] 우베 레비츠키의 <모두를 위한 예술?>

"핵심은 사람들이 경탄할 만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로운 관점과 명확한 시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 즉 상황을 창출해내는 것이다."(<모두를 위한 예술?>, 174쪽)

몇 년 전, 한 인문사회과학 강연회의 뒷풀이가 떠오른다. 같은 테이블에 인문 쪽 분야에서 꽤 유명한 블로거가 앉아 있었다. 서로 소개하면서 나는 예술 분야 담당이라고 말했는데 그분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예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아니, 우리 서점을 즐겨 이용하는 인문학 애호가가 내 분야에 전혀 흥미가 없대서 삐진 게 아니라, 그간 쌓여 온 응어리가 툭 튀어나왔다. 왜죠. 예술은 당대 인문사회과학 이론의 실험실 아닌가요. 네, 물론 폭발도 자주 일어나고 사람들이 미치거나 홀려서 실려 나가기도 하지만요. 어쨌건 부르디외 같은 분들은 미디어의 자본화 시대에 맞서 지식인들이 게릴라처럼 뛰어들라고 마인드맵 비슷한 거까지 그려주지 않았습니까? 왜 다들,

▲ <모두를 위한 예술?>(우베 레비츠키 지음, 최현주 옮김, 두성북스 펴냄). ⓒ두성북스
왜 다들, 이라고 좀 과장해서 묻고 싶었다. 술자리였으니까(물론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질문이다. 왜 수많은 인문사회과학 애호가들은 그 많은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예술에 이토록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이것은 5년째 예술 책을 팔고 있는 내게 가장 커다란 미스터리다. 혹시 어느새 예술이 하나의 '감상 장르'로 인식되어 일종의 소비재로 사용되는 데 그치는 건 아닐까. 물론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지 않은가. 예술이 취향 소비가 아닌 행동의 정치학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아니, 애당초 많은 이론 애호가들에게 행동의 정치학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제대로 물들어 본 적도 없는 총체화하는 사유와 유토피아적 열망에 사이비 피곤함을 느끼는 그 박약한 정신들은 오직 자본주의적 문화 속에 편히 누워 그 문화를 비판적으로 즐기는 데만 골몰하며 자신들의 래디컬하지 못함을 최신 유행의 래디컬한 사상들을 소비하는 것으로 은폐한다. 이 와중에서 '최종적인' 교양활동으로 문명비판과 동격에 있어야 할 문화비평은 그 반대로 하나의 대중적인 취미활동, 분리된 영역에 대한 분리된 비판의 확대된 장으로 완성됨으로써 상품세계의 보호막에 마지막 덧무늬를 입힌다."

실제로 보면 각진 폰트의 위력이 더해져 마치 삐라와도 같은 결기가 느껴지는 위 문구는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이경숙 옮김, 현실문화연구 펴냄) 서문의 일부다. 국내 판본이 출간된 1996년에 기획자 정성철이 썼다.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문화 활동과 문화 비평은 '최종적인' 교양 활동으로 자본주의라는 문명 형식에 좀 더 맞서고 있는가. 아니면 인문사회과학을 향유한다는 것이 마치 사주팔자처럼 실제 실현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자기충족적인 예언의 역할에 그치고 있지는 않은가.

행동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텍스트는 스펙터클의 형태로 소비되며, 그 과정은 '하나의 대중적인 취미활동, 분리된 영역에 대한 분리된 비판의 확대된 장'의 형성에 그친다. 종교가 아편과 같은 것이라면 독서로 종료되는 혁명은 알코올이다. 여기에 취할수록 육신의 힘은 풀리고 암울한 현실을 마주할 엄두를 내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좀 더 세련되고 강렬한 텍스트-이론을 찾아서만 헤매는 여정은 보다 완벽한 꿈을 꾸기 위해 보다 많은 생을 잠에게 내어주는 꼴이다.

작년에 출간돼 작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은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광활한 경험인지를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애서가와 독서광들을 위한 책이 아니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텍스트를 읽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텍스트를 통해 '영혼이 붕괴하는' 경험을 말함으로써 그 책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활자라는 꿈을 돌파해 현실의 면면에 다다르기를 권했다.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책을 사랑하는 자의 꿈은 책이다. 물론 꿈은 중요하다.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텍스트라는 꿈이 계시의 형태로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떤 책이 책을 사랑하는 자의 꿈을 무너뜨리면 그때 질문이 발생할 것이다. 어떻게 해낼 것인가.

어떻게 해낼 것인가. 관건은 어떻게 움직일 것이냐다. 이것이 우베 레비츠키의 <모두를 위한 예술?>(최현주 옮김, 두성북스 펴냄)을 소개하려는 이유다. 이 책은 어떻게 '상황을 창출'할 것인가에 대해 공공미술이 행해 온 시도를 브리핑한다. 브리핑은 우선 도시 공공 공간이라는 특정 시공간을 탐색한 뒤에 그 공간을 시장자본과 그에 유착한 행정 권력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공공미술의 전략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왜 하필 공공 공간이며 공공미술인가?

우선, 왜 공간인가. 공간이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진 쌍용차 사망 노동자 분향소 강제 철거 사건을 떠올려 보자. 중구청이 강제로 분향소를 철거한 뒤에 그 자리에 도시 환경 미화를 구실 삼아 화단을 갖다 놓았다. 그 자리를 누가 점유하느냐는 단순한 땅따먹기가 아니다. 쌍용차 분향소 또는 중구청의 화단은 각종 반-한나라당 취향의 추모가 이루어졌던 '대한문 앞'이라는 광장의 상징성을 탈취 가능한가를 두고 벌어지는 헤게모니 투쟁의 깃발이다. 물론 쌍용차 투쟁을 여론화하기에 좋은 지정학적인 요건도 빼놓을 수 없다(송전탑 위에 올라간 그들의 동료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다. 행정 주체인 서울시가 광장이라는 공공 공간의 개념 자체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가라는 문제다. 즉 분향소 또는 화단이라는 문제는 광장이 서로 다른 정치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평등하게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준 정치적 장소로 기능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성실하며 무해하므로 반체제적 시위를 불편해 하는' 시민들에게 선별적으로 편안함을 제공하는 유사 휴양지로 기능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다.

후자의 경우 공공의 의미는 축소되며 반체제적 지향성을 가진 사람은 공공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즉 그들은 시민이 아니라 광장에 출입할 수 없는 등급의 이방인으로 자동적으로 계급이 하락한다. 중구청이 분향소를 철거하면서 언급한 '일반 시민의 불편'이라는 말에서 이미 '일반'이란 곧 이미 선별된 시민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공공 공간을 누가 점유하느냐는 곧 그 공간을 담당한 통치 체계가 지향하는 공공이라는 개념을 보여준다. 이 '공식적'인 공공 영역은 중구청이 언급한 '일반 시민'처럼 해당 도시가 함께 하기를 원하는 시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바깥의 사람들은 이방인 또는 열외자가 되어 '시민을 위한 공공 행정'에서 소외되며, 그들이 형성-점거하는 지역은 게토로 지정되어 '척결 대상'으로까지 밀려날 것이다. 결국 도시의 주요 공간을 점유 또는 공유하는 형식의 투쟁은 공공이라는 개념의 협소화를 막음으로써 보다 작고 좀 더 다른 목소리들이 '시민'의 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정서적 공간을 확보한다는 중요한 임무를 가진다.

그러나 이 중요한 싸움은 그만큼 짜임새 있는 전략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고서 그저 버텨서는 성공할 수 없다.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월스트리트를 점거했던 오큐파이 운동(Occupy Movement)이다. 결집하고 외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방식, 즉 피를 뿜어서 목소리를 전달하는 수밖에 없을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모두를 위한 예술?>은 공공미술이 대안일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공공미술인가. 공공미술은 태생적으로 두 가지의 전략적 장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공공이라는 이름을 가짐으로써 정치-자본의 정책에 틈입하여 그들과의 전면전을 피할 수 있으며, 공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공공 공간 점유를 둘러싼 투쟁에서 태생적 우위를 점한다. 쌍용차 분향소가 '환경 미화'에 밀려난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자. 공공미술의 이 두 가지 장점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울 대한문 앞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 강제 철거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이들 뒤에서 중구청 직원이 화단에 물을 뿌리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래서 공공미술은 성공했고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모두를 위한 예술?>에서 간략히 소개하는 공공미술의 역사는 어쩌면 당연한, 지난한 좌절의 역사다. 좌절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대중 참여라는 껍데기만 가진 채 대기업과 정부 또는 예술가 자신을 위한 '프로모션'으로 이용되는 작업들은 서울만 해도 지천에 널려 있다.

그런가 하면 시민들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정치-자본이 공공장소를 상징적으로 점유한 상황을 고발한 설치 미술이 시민들의 통행 불편(이 불편함이 메시지였음에도 불구하고)을 이유로 철거된 모습은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게다가 자본의 유연함, 즉 상대를 공격하는 대신 자신 안으로 흡수하는 능력은 공공미술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어떤 공공미술 작업이 성공을 거두었을 때, 자본은 그와 싸우는 대신에 그 지역 자체를 랜드마크로 만들어 땅값을 올리고 '더욱 상급의 시민'들의 취향에 맞춘 고급 구역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예술들끼리 치고받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성공적인 공공미술로 평가하는 파크 픽션 프로젝트를 공격한 위협적인 사례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지자체가 야심차게 유치하려던 '유명 예술가' 제프 쿤스의 설치미술이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공공미술의 목표 설정 자체에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다. 미술평론가 휠러는 공공미술을 장애서비스와 장애예방서비스라는 두 가지 방향성으로 구분한다.

"휠러에게 장애서비스란 저항적 공공 공간을 만들기 위한 개입적 행위이고 이는 소외된 입장들과 논의들을 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반면, 장애를 예방하는 후견주의적 프로젝트들은 국가를 위해 실용적 사회복지사업을 펼치는 것으로 사회적 폐해들을 은폐할 뿐이다."(178쪽)

공공미술의 전략이 이렇게 나뉠 때, 정부나 후견 '기업'의 지원은 당연히 친체제적인 쪽으로 집중되기 마련이다. 한 사회비판적인 프로젝트를 거절한 은행의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프로젝트는 흥미 있는 측면들이 있다. (…) 다만 근본적으로 위험한 프로젝트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그들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갈등을 일으킨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자각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프로젝트가 위험하다고 보고(…)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179쪽)

공공이라는 개념 자체의 방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여기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갈등은 이 은행이 생각하는 공공성 바깥의 것, 시민이 아닌 이방인의 것이다.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호혜 대상을 지정한 장애예방서비스 작업은 공공이라는 개념에 '선별'의 가능성을 집어넣음으로써 지배계급이 선호하는 '일반적인 모범 시민상'을 산출해내는 데 기여하는 동시에, 장애서비스에게 배분될 수 있는 지원을 빼앗는 반동적인 입장에 (본의 아니게) 선다. 때문에 공공의 원래 의미, 즉 '모두'를 수호하고자 하는 장애서비스 공공미술은 더욱 더 힘겨운 입장에 처한다. 이는 공공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투쟁과 마찬가지로 공공미술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투쟁이다. 말하자면 공공미술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서 일종의 내전 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공공미술은 역사 속의 다른 투쟁들처럼 지속적인 패배와 영원히 갱신될 반성문으로 채워지고 있는가. 아니, 희망적인 사례가 있다. 책 말미를 장식할 파크 픽션 프로젝트다. 파크 픽션은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예술가들과 기획자들이 가세한 '모두가 함께 만드는 공원 광장'이다. 시 당국이 공원 기획 주체가 너무 많다는 점(무려 1천 명이 넘었다)을 들어 승인을 보류했을 정도로 이 공원은 해당 지역 시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구축되었다.

파크 픽션은 앞서 공공미술의 전략적 장점으로 지적한 두 가지 장점을 모두 사용한다. 비타협적인 게릴라 형식을 취하는 대신에 파크 픽션은 자신의 콘셉트를 미술전에 출품하는 등, 주류 현대미술계에 직접 진입하여 경쟁력 있는 예술 프로젝트로 자리매김하도록 애썼다. 덕분에 외부 자본이 위력을 앞세워 밀어붙일 수 없을 정도의 상징 자본과 그에 따른 발언권을 지속적으로 획득한 것이다. 공익 공간의 유지를 보다 수월하게 이루어 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렇게 유지한 공공장소, 즉 서로 다른 모두가 만나는 공간이라는 개념은 다시 파크 픽션이라는 '예술'의 콘셉트에 기여함으로써 지속적인 선순환을 구축한다.

물론 파크 픽션은 현재진행형이다. 한때의 성공이 프로젝트의 지속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자본은 파크 픽션을 이용하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때 제프 쿤스의 침공마저 막아낸 공공 예술이 어떻게 변모하고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래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기껏 뭔가 있을 것처럼 떠들고 나서 결말은 모르겠다고 말하게 돼 송구스럽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무슨 비법 같은 게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공공 미술의 태생적 장점이 대단히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거나 오용한 사례가 훨씬 많다는 점이 그 증거다. 다만 우선은 좌절과 성공을 떠나 공공 미술이 걸어온 길 자체에 주목하고 싶다.

파크 픽션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언젠가 소망들이 집을 떠나 거리로 나갈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삶에 대해 사고한 텍스트들이 책으로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말로 사람들 곁에 실재하는 벗의 형태로 서려는 광경이다. 어떤 텍스트가 그 텍스트를 해독할 수 있는 지적 계급을 위한 장벽으로 작용하는 대신에 실재하는 모든 장벽을 가능한 무너뜨리려고 길 위로 나서려는 시도다. 이 시도는 언제쯤 몇몇의 성공 사례가 아니라 하나의 패턴으로, 궁극적으로는 시스템으로 정착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해 파크 픽션은 그들의 모토에 기한을 명기하지 않고 '언젠가'로 대신함으로써, 그리고 거리로 나간 소망이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모토를 지시적인 예언이 아닌 지속 가능한 희망의 형태로 구축했다. 확신하고 예언하기(미래로 투신하기)에 대항해 지금 여기에서 희망을 지속하기를 선택한 것은 그저 순진한 결정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당신 역시 '미래를 확신할 수 없으므로, 또는 가시적인 방법론을 찾을 수 없으므로' 내재된 텍스트로 레고 놀이를 할 생각이라면 다시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그렇게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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