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19일
3월 25일 평양방송은 북조선 당국이 "남조선 각 정당 단체에 대하여 4월 14일 평양에서 회담할 것을 초청"하였다고 보도되었다. 그리고 그 날짜를 붙인 편지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 단체에게 고함"이 여러 정당과 단체에 전달되었다. 발송자는 김두봉과 김일성을 위시한 북조선 주요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었고, "남조선 단독 선거는 흉악한 기만에 불과"한 것이라며 이를 분쇄하기 위해 "남조선 단독 선거를 반대 투쟁하는 남-북조선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열 것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이 회의가 4월 19일 '남북 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연석회의)란 이름으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렸다. 2월 중순 김구와 김규식이 김두봉과 김일성에게 부친 편지는 4인 지도자 회의를 제안한 것인데 평양 측은 더 큰 범위의 회담을 역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연석회의를 보완하는 의미의 "소규모의 지도자 회의"를 붙여 제안했는데, 소규모라도 25인으로 구성하는, 남측 제안보다 훨씬 대규모의 회의였다.
남측 협상파가 작은 범위의 회담을 제안한 것은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고 작은 돌파구나마 만들어 통일 건국 과업의 출발점으로 삼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북측에서 큰 규모의 회담을 역제안한 것은 자기네가 추진해 온 건국 방략에 자신감을 갖고 여기에 이남의 지지자들까지 끌어들이겠다는, 출발점이 아니라 결실을 거두겠다는 자세였다. 남측 협상파에게 남북 협상이 유일한 활로였던 것과 달리 북측에게는 배부른 흥정이었다. 북조선에 안정된 체제를 구축해 놓았으니 남북 협상이 어떤 성과를 거두건 자기네 갈 길을 가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북측의 오만한 태도는 양자택일의 강요에서 나타난다. 김두봉과 김일성 공동 명의로 보낸 편지에는 김구와 김규식의 그 동안 행적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는데 그 마지막 부분이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쏘미 양군이 철거하고 조선 문제 해결을 조선인 자체의 힘에 맡기자는 소련 대표의 제의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무관심한 태도로 묵과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조선에 대한 유엔 총회의 결정과 소위 유엔 조선 위원단의 입국을 당신들은 환영하였습니다.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 협상>(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159쪽에서 재인용)
유엔 조선 위원단을 거부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대안은? 북측에서 해온 것처럼 소련 방침을 따르자는 것밖에 없다. 며칠 전(4월 15일) 일기에서 인용한 4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지난 13일 하오 1시부터 경교장에서 개최된 회합에서 김규식 박사는 금번의 평양 회담은 예비 회담으로 하고 본회의는 서울서 개최할 것과 유엔 조위의 북조선 입경을 허용하여 남북 총선거로 통일 정부를 수립토록 북조선 측과 교섭할 것 등 4개 조건을 제시하였던바 김구 씨는 이에 반대하고 유엔 조위와의 관계는 일체 포기할 것을 주장하여 양김 씨 간에 약간의 의견 대립이 있었다 하며 김 박사는 동 회합에서 불참할 것을 표명한 바 있었다 한다.
김규식은 유엔 위원단을 거부하라는 북측 제안에 응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김규식을 '현실주의자'로 규정한 일이 있는데(1946년 11월 7일), 이 대목에서도 현실주의자의 면모가 여실히 나타난다. 미국과 소련이 조선의 진로를 좌우하는 힘을 가진 나라라는 사실, 둘 중 어느 한 쪽이라도 반대하는 길로는 조선의 통일 건국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는 현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소련을 무시하는 유엔 방침에 따르는 것도, 유엔을 거부하며 소련 방침에 따르는 것도 분단 건국의 길이라고 그는 인식했다. 남북 지도자들이 민족주의 정신으로 뭉쳐 소련과 유엔, 양쪽을 모두 설득하는 것만이 통일 건국의 길이라고 믿은 것이다.
이것은 김규식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일부 요인 북향 단념-남북협상 난항"
남북 협상의 참석을 앞두고 김구, 김규식 양씨를 비롯한 중간파 요인들은 북조선 측의 초청을 받은 이래 연일 회합하여 양김 씨의 참석 여부와 남북 요인 회담에 제시할 조건 등을 토의하여 오던 바 양김 씨의 참석과 4개 제안 등을 결정하고 다만 출발 일정이 미정이었는데 과반래 금번 회담에 기어코 참가하겠다는 결의를 표시하여 오던 요인들이 북행을 목전에 둔 금일에 이르러서는 참가를 주저하는 요인들도 있으며 또 확정적으로 북행을 단념한 인사도 있다 한다. 그리고 배성룡, 권태양 양씨는 지난 18일 양김 씨의 선발대로 북행하였다 한다. 그런데 김구 일행과 김규식 일행의 태도를 구별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고 한다.
"김구 씨 일행의 동향"
한독당을 위시한 김구의 측근자들은 금번 회담에는 김구를 대변할 만한 대표를 보내고 제2차 회담에 참석하도록 권고하여 왔으나 김구 씨는 종시일관 자신이 참석해서 회담을 성공시키겠다는 주장을 하여왔다 한다.
이리하여 출발 준비를 마치고 19일 아침 숙소 경교장을 떠나려고 할 때 약 50~60여 명의 모 학생 단체가 모여들어 김구 씨의 이번 북행을 체념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동시에 출발을 방해하여 결국 동일은 출발치 못하였는데 앞으로 그 출발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한편 과반래 북행을 선창하던 엄항섭은 돌연 태도를 변경하여 북행을 단념하였으므로 김구 씨 영식 김신 씨와의 대립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남북 요인 회담을 선창하던 한독당 조소앙 씨 외 수 명은 북행 여부에 대한 확정적 태도가 없어 일반은 북행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 박사 일행의 동향"
금번의 남북 협상의 기안자의 일인인 김규식 박사의 북행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일반의 특별한 주목거리가 되어 오던 바 14일에 이르러 북행을 확정하였던 것이다. 최근 신병이 심하여져서 병원 치료를 요하게 되었으므로 북행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 한다. 그리고 김붕준 씨는 북행을 단념하였다 하며 기외 수인도 북행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다.
대략 이상과 같은 현상에 있다는데 만약 양김 씨 이하 요인들이 보조를 같이 못하게 된다면 이미 북행한 요인들은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이며 남아있는 인사들의 금후 태도가 크게 주목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0일)
연락원 두 사람이 4월 7~10일간 평양에 다녀왔지만 3월 하순의 북측 제안이 가진 문제점이 불식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총선거 추진 세력에서는 양김 씨의 평양행이 협상이 아니라 '투항'이라고 비방하고 있었는데, 만약 평양행이 '유엔 위원단 거부'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투항'이란 말이 틀린 것이 아니다. 김구 주변에서 이번 평양 회담에는 대리인을 보내 예비 회담 수준으로 임하고 그 후에 서울에서 제대로 된 회담을 열자는 의견이 나온 것도 북측이 준비한 회담에 대해 문제점을 많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4월 19일 아침 경교장에 몰려들어 김구의 북행을 저지하려 한 학생 대표 안기석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남북 협상을 절대 지지하지만 김구 선생의 직접 출마를 반대하고 대리 파견을 종용할 목적으로 모인 것이다. 이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우리는 앞으로 조직을 확대할 것이며 평양회담이 끝날 때까지 이대로 못 가시도록 하겠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20일)
그 날 아침 학생들의 분위기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구가 남북 협상을 주장하고 나오자 그때까지 그를 영수로 떠받들던 극우 단체들이 표변해서 그에게 극한적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 사례들이 있다. 그래서 경교장에 몰려든 이북학련과 전국학련 학생들도 김구에게 적대적 태도를 보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학생들은 김구를 존경하고 아끼는 모습을 지켰고, 위에 인용한 발언에서는 남북 협상을 지지하면서도 경솔한 평양행에 반대한다는 뜻이 진심으로 보인다.
김규식은 남북 협상을 간절히 염원하면서도 막상 평양에 갈 것을 주저했다. 북측의 오만한 태도로 보아 진정한 협상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구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김규식의 성실한 자세와 비교하여 김구의 모험주의 성향을 비판하는 생각도 든다. 귀국 한 달 후부터 극한적 반탁 투쟁에 달려들어 미소공위를 실패로 몰고 간 것은 통일 건국을 어렵게 만든 죄악이었다. 해방 공간을 테러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데는 그의 책임도 컸다. 그의 진심이 무엇이었든 그의 행위에는 민족의 비극을 불러온 책임이 적지 않다.
그러나 1948년 4월 시점으로 다시 눈을 돌려보면, 그의 북행을 탓할 이유는 없다. 김규식과도 달리, 그는 반탁 운동의 이력 때문에 이북 지도자들에게 불신의 대상이었다. 지금 그들이 그를 대화상대로 인정해 주는 것은 오직 민족주의 하나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성패를 저울질하며 행동의 완급을 조절할 여유가 없었다. 상대방이 들어주든 들어주지 않든 만나서 최선을 다해 호소하는 길밖에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 그의 목소리는 비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일 아침 경교장 마당에서 만류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여러분이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나의 북행을 만류하는 것을 감격하여 마지않는다. 그러나 조선의 현 정세는 최후 단계에 다다랐다. 분열이냐 통일이냐 자주냐 예속이냐 이러한 중대시기에 있어서 내가 남조선에 주저앉아서 일신의 안일을 원하여 주저할 것인가! 우리 민족의 정의와 통일을 위하여서는 전 남조선 2000만 동포가 억제하여도 나의 결의대로 가겠다. 나는 21세 때부터 나라를 위하여 싸운 한 사람이니 오늘이나 내일이나 당신들 젊은이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20일)
그는 오후 3시경 아들 김신, 비서 선우진과 함께 경교장을 빠져나와 뒷담 밖에 대기시킨 차를 타고 북으로 달렸다. 저녁 무렵 개성을 지나 여현에서 38선을 넘었다. 미리 준비했던 성명서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었다.
"나를 애호해주는 수많은 동지 동포 중에는 나의 실패를 위하여 과도히 염려하는 분도 있고 나의 성공을 위하여 또한 과도히 기대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이번 길에 실패가 있다면 그것은 전 민족의 실패일 것이요, 성공이 있다 하여도 그것은 전 민족의 성공일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 1948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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