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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박근혜'와 '이명박'을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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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박근혜'와 '이명박'을 사랑하는가?

[장석준 칼럼] '코리안 드림'에 갇힌 사람들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이 있다. 모든 개인에게 성공의 기회를 보장한다는 미국의 국민적 신화다. 이게 과연 미국 현실과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한 세기 넘게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여전히 이 꿈을 믿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을 따서 제목으로 쓴 현대의 고전이 있다.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논객(미국에도 사회주의자는 있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아메리칸 드림의 수인(囚人)들(Prisoners of the American Dream)>(<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김영희 옮김, 창비 펴냄))이다. 이 책은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 운동이 없는가?"라는 고전적 물음에 대한 답이다. 데이비스는 아메리칸 드림의 포로가 된 미국 노동자들이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데서 답을 찾는다.

느닷없이 '아메리칸 드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그러한 국민적 신화가 존재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를 휘감고 있으며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공동의 꿈. 말하자면, '코리안 드림'이 있다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과 마찬가지로 코리안 드림도 기본적으로는 성공 신화다. 가난한 이는 가난을 벗고 이미 부유한 자들이나 중간층은 더 드높은 출세의 주인공이 되거나 적어도 자신의 지위를 대물림한다는 희망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자신들이 나눌 사회 전체의 부의 크기가 끝없이 확대되리라는 전제가 있다. 이른바 '파이'가 쉼 없이 커지는 가운데 자신들의 몫도 보장되리라는, 저마다의 몫 역시 계속 커지리라는 흐뭇한 바람이다.

▲ 지금 이 순간에도 대기업(거대 조직)에 들어가고자 안간힘을 쓰는 20대가 부지기수다. ⓒ뉴시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 자본주의 역사의 산물이다. 반면 코리안 드림은 한국 자본주의 성장 과정에서 그 모습을 갖췄다. 따라서 미국 자본주의에는 없는 한국 자본주의 고유의 경험들이 코리안 드림의 특성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게 뭘까? 여러 측면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중 하나가 '거대 조직'의 신화라고 생각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어지러울 정도로 빠른 성장은 소수의 거대 조직들을 키우고 이들에게 권한과 자원을 몰아주며 이들이 거침없이 돌진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그 거대 조직들이란 주로 대기업과 거대 은행, 국가 관료 기구 등이다. 그리고 이들 거대 조직 이면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 조직의 운영권을 독점하는 엘리트들의 공식, 비공식 네트워크들이 꿈틀거린다. 박정희 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 한국인들은 이들 거대 조직의 성장을 우리 자신의 꿈의 실현인 것 마냥 생각해왔다.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 19세기 소농, 소상공인 사회의 기억을 담은 '개인'이라면, 코리안 드림의 주역은 다름 아닌 이 '거대 조직'이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은 거대 조직에 권력을 위임하는 것을 당연시해왔다. 재벌을 욕하면서도 그들을 응원했다. 저들의 성공이 곧 우리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거대 조직이 확장하는 과정에서 치부를 드러내도 적당히 눈감아 주곤 했다. 그것은 우리의 승리를 위해 불가피한 작은 허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개인의 꿈은 이러한 거대 조직과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접근시키는 데 있다. 가장 좋은 접선의 방식은 역시 나 역시 거대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극소수 상류층을 제외한 모든 한국인들의 평생에 걸친 경쟁이 시작된다. 조기 교육으로부터 사교육 열풍, 입시 경쟁을 지나 스펙 경쟁, 학벌 사회로 이어지는 전쟁 같은 삶이 펼쳐진다.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별이 한국 사회에서 이토록 효과적인 노동자 이간책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규직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임금 좀 더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 조직이라는 구명선에 올라타는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낙오자는 늘어난다. 그리고 이에 따라 거대 조직들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은 아니라는 것도 숱한 경험들을 통해 분명해진다. 점점 더 분노는 끓어오르고, 사회는 그 긴장 속에 요동친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만큼이나 코리안 드림의 생명력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 분노한 자들의 핏발 선 눈길 사이에 엿보이는 미묘한 그늘에서 감지된다. 그늘은 양지와 대비되기에 그늘이다. 양지란 물론, 잘 나가는, 지금도 '나 없이' 잘 나가고 있는 거대 조직들이다.

분노한 자들의 분노는 그 거대 조직들을 향하지만, 그 거대 조직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절실한 외침들 속에서 왠지 "우리도 속하게 해달라"는 웅얼거림이 들리는 것 같다. 사나운 파도에 휩쓸리며 구명선을 바라보는 이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만 같다.

누구도 이 울부짖음을 탓할 수는 없다. 살겠다는, 살아보겠다는 외마디 함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냉정히 직시할 것은 있다. 이 함성에는 여전히, 권능과 영광이 그대들 거대 조직에게 있다는 충심의 인정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코리안 드림의 수인들이다. 한국의 꿈에 갇힌 자들이다. 이 꿈의 감옥 안에서 지금 대다수 한국인들은 벽에 부딪힌 것 같기는 한데 답은 없다는 예감에 시달린다. 그나마 깃발을 들어 올린 소수의 투사들은 시시포스의 노동마냥 저항의 몸짓을 반복하다가 전사해간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대통령은 이 꿈 혹은 악몽의 총화다.

하지만 남겨진 희망의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꿈은 우리가 그것을 '꿈'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눈을 뜨기만 한다면, 꿈의 그 모든 위력은 기억에서마저 사라져버린다. 눈을 뜨기 위한 이 필사의 노력, 그게 지금 우리 모든 한국인들이 마주한 도전이다.

'프레시안 books'의 서평 연재 '적록 서재'로 주말마다 독자를 만났던 장석준 진보신당 부대표가 매주 목요일 '장석준 칼럼'을 선보입니다. 장석준 부대표는 '생태'(녹색)와 '평등'(적색)이 조화를 이루는 대안 사회를 꿈꾸는 젊은 정치인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한국 사회를 보는 '다른' 시선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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