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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생존 게임! 美를 버리고 中을 따르라!

[동아시아를 묻다] 태평양 : 리오리엔트(ReOrient)

환태평양학(Trans-Pacific Studies)

아시아학회(Association of Asian Studies) 두 번째 편이다. 아시아학의 박람회 장에서 '아시아학'을 부정하는 회의가 열렸다. 동아시아학과 미국학의 분리에 이의를 제기하며 '환태평양학'을 제창한 것이다. 참여자들의 면면은 제법 익숙하다. 사카이 나오키, 다카시 후지타니의 저작은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임지현이 합류했다.

환태평양학은 새로운 공간 감각을 추구한다. 북아메리카의 서부 연안부터 유라시아의 동부 해안까지를 연속적 공간으로 삼는다. 태평양은 더 이상 동아시아 전통 사회와 자유주의 미국을 가르는 공간이 아니다. 유교와 불교의 유산과 기독교에 기반을 둔 문명 간 격절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를 강조한다. 태평양은 양자가 교통하고 수렴하는 장소인 것이다.

수긍할 만한 주장이다. 참여자들은 진작부터 민족적, 문명적 동질성을 강화하는 담론에 뾰족했다. 그래서 아시아-태평양-미국이라는 세 공간 개념을 허물고 '환태평양'에 의기투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편향이 눈에 밟힌다. 대저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냉전 체제에 방점을 찍고 있다. 미일 동맹 체제가 이 지역을 지배하는 핵심 논리라거나, 더글러스 맥아더의 "앵글로 색슨의 호수"라는 비유가 강조되기도 한다. 그래서 환태평양학은 냉전의 지리학을 해체하기보다는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아시아학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에는 십분 동의하면서도, 어떤 임계를 돌파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다.

실로 환태평양학은 그 야심찬 선언에도 불구하고 실은 매우 진부하다. 당장 한국만 돌아보아도 '환태평양'이라는 기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 '5공' 때이다. <환태평양연구>라는 학술 잡지도 있었다. 1980년대 말에 등장하여 1990년대 초에 폐간했다. '동아시아'에 밀린 것이다. 한소, 한중, 한베트남 수교를 적극 품어낸 동아시아에 비켜선 것이다. 한데 왜 이제서 다시 '환태평양'일까?

그 내막을 짚자면 미국 내 일본학의 몸부림이 아닐까도 싶다. 일본학의 봄날은 냉전기였다. 근대화론의 모범이자 첨병 노릇을 하면서 워싱턴의 요구에 충성했다. 그러다 새 천년 그 위상이 현저히 약해졌다. 돈줄이 마르고, 학생 수도 줄었다. 혹 '환태평양학'이란 일본학의 후생 도모는 아닐까. 21세기를 살아가는 방편으로 태평양을 호명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 미국에서의 존재 의의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욱 병통이다. 결국 일본의 '탈아'를 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까닭이다. 정녕 일본(학)은 아시아로 귀환하지 못하는가.

'태평양'의 계보

비단 일본만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태평양은 복병이다. 분단과 직결되어 있다. 38선이 그어지면서 항일 운동의 거점이었던 대륙을 상실했다. 북조선과 북방을 유실함으로써 바다로 경사된 것이다. 식민 모국 일본의 자금이 유입되고 미국에 수출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 냉전형 국제 분업 체제가 태평양 상상의 물적 토대를 이루었다. 즉 태평양이란 해방 공간의 활력이 닫히고 분단이 확정되면서 부여된 '강요된 출로'였다. 분단 체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 착종은 '대동아' 전쟁이 '태평양' 전쟁으로 바뀌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대동아는 태평양 국가들의 독립과 원주민 자치를 앗아간 미국에 비수를 겨누었다. 즉 미국과 태평양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표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분단과 함께 돌연 '자유'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붉은 대륙'이 배치되었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등장한다. 그는 청년기 하와이에 체류하면서 <태평양잡지>, <태평양주보> 등을 펴냈다. 세계 정세를 면밀히 주시하면서 외교론에 입각한 조선 독립을 탐색한 것이다. 하지만 청년 이승만의 시야에 하와이 왕국의 몰락과 식민화는 눈에 들지 않았다. 원주민에 대한 공감과 배려는커녕 미국 편향이 돌출했다. 1925년 결성한 '태평양문제연구회'도 이승만, 윤치호, 조병옥 등 친미 기독교 인사들이 주류였다. 대통령이 되자 이승만은 '태평양동맹'을 제창했다.

태평양은 박정희에게도 계승되었다. 그는 한일 협정과 베트남 파병으로 입지를 다진 뒤 '아시아 태평양 각료 회의'를 개최한다. 미국의 유일한 파병 동맹국의 위상을 과시하며, 동남아 국가들에게 폼을 잡은 것이다. 나아가 '위대한 아시아 태평양 공동 사회' 구상도 밝혔다. 분단과 냉전 구조에 편승하여 동아시아 반공주의의 초석을 다짐한 것이다. 이렇게 일본, 한국, 대만, 필리핀이 도열했던 태평양이란 '반공의 바다'에 다름 아니었다.

판세가 바뀐 것은 1979년이다. 중국이 개혁 개방을 선포했다. 대륙이 태평양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자 '환태평양'이 등장했다.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을 토대로 태평양을 더욱 굳건히 다진 것이다. 아시아·태평양(APEC)이 발족한 것은 1989년이다. 빌 클린턴이 '신태평양 공동체'를 선언한 것은 1993년이다. 1993년은 한국에서 '동아시아론'이 발진한 해이기도 하다. 탈냉전 이후의 담론 경쟁이 치열했던 것이다.

새 천년, 동아시아는 태평양을 누르는 듯했다. 아세안+3, 동아시아정상회담 등이 잇따라 열렸다. 6·15 정상 회담은 기폭제였다.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 시대'를 선언했고, 하토야마 민주당 정부는 '동아시아 공동체'로 화답했다. 그러나 태평양도 좌시하지 않았다. 동아시아 지역 협력을 각개격파로 대응해 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이어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TPP)까지 내쳐 달렸다. TPP가 처음 거론된 것은 2010년 요코하마의 APEC이었다. 이듬해 하와이 APEC에서 일본은 정식으로 참여 의사를 밝혔다. 하와이-요코하마는 샌디에이고에서 발진하는 미항공 모함의 경유지이기도 하다. 태평양의 파죽지세에 동아시아는 주춤하고 있다.

ⓒaspistrategist.org.au

'태평양 세계'

태평양은 넓고 크다. 지구(地球)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광활한 해구(海球)이다. 그만큼 역사도 깊다. 일찌감치 바다와 문화와 사람이 겹치는 혼종적 공간을 형성했다. '태평양(Pacific)'이라는 이름에는 '대항해 시대'가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유럽인으로 처음 태평양을 건넌 마젤란이 붙인 명칭이다. 인종적 어감이 물씬한 '멜라네시아', 폄하의 느낌을 지우기 힘든 '미크로네시아'도 이 무렵에 생겨난 이름이다. 태평양에 드넓게 펼쳐졌던 'World Wide Web'이 유럽의 지정학으로 분할되어간 것이다.

본디 태평양의 바닷길은 복합계였다. 중국과 말레이와 인도네시아와 인도와 아랍 세계가 혼종적 세계를 이루었다. 즉 수천 년의 진화를 거쳐 형성된 '아시아화 된' 태평양이 있었다. 인도양, 남중국해, 남태평양의 중간에 위치한 말라카는 그 상징적 장소였다. 거리와 장터에서 말레이어, 광동어, 아라비아어, 힌두어 등 80개의 언어를 접할 수 있었다. 모스크와 절과 교회도 공존했다.

아라비아 상인들이 개척한 이 교역 세계는 몬순 사이클을 따라 운동했다. 겨울에는 동풍을 타고, 여름에는 서풍에 이끌려 사람과 물자와 문화가 순환했다. 즉 바람과 파도는 그 자체로 인류사의 요소(factor)이자 행위자(actor)였다. 14세기 모로코에서 태어난 이븐 바투타가 수마트라를 거쳐 중국에 가닿은 세계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 바닷길은 태평양을 지나 파푸아 뉴기니까지 도달했다. 지금도 600년 전에 건축된 모스크가 건재하다. <신밧드의 모험>의 대서사가 괜히 탄생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말라카도 네트워크의 중계지(node)에 그쳤다. 허브(hub)는 따로 있었다. 말라카의 술탄도 명나라에 조공을 했던 것이다. 그래야 중국 시장을 통해 더 큰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정화(鄭和)이다. 그는 중국에 사는 무슬림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메카에 순례까지 갔던 극진한 이슬람 신도였다. 그래서 정화의 무덤에도 아라비아어로 '위대한 알라'가 새겨져 있다. 그만큼 당시의 바닷길이란 유연하고 탄력적이었다. 정치적 지배와 문화적 식민주의, 경제적 수탈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프리카, 아라비아, 인도, 자바, 중화 세계까지 그 다극적 교역망을 순회했을 뿐이다.

그 바닷길의 항해사 가운데 아마드 이븐 마지드(Ahmad Ibn Majid)가 있었다. 그도 자신이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리라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향하는 길을 안내했던 것이다. 아프리카-아라비아-인도-중국-일본-태평양으로 가닿는 바닷길에 마침내 유럽이 참여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유라시아 교역망은 극적으로 재편되었다. 당장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포르투갈이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에 가닿았다면, 스페인은 대서양을 지나 태평양을 건넜다. 그 사이 신대륙에는 식민지 제국이 건설되었다. 잉카와 아즈텍 문명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구대륙의 총과 균 앞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의 금과 은을 독점하면서 유라시아 교역망에 참가할 수 있었다. 필리핀의 마닐라와 멕시코의 아카풀코를 잇는 갈레온(galleon) 무역망도 구축했다. 태평양은 어느덧 '스페인의 호수'가 되었다.

갈레온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문화, 교역, 이주의 모바일 세계였다. 수만 명의 필리핀 사람들이 멕시코로 건너가 메스티조가 되었다. 반면 망고와 코코넛이 멕시코에서 필리핀으로 전해졌다. 아보카도, 초콜릿 등의 타갈로 어휘가 스페인어와 영어로 정착되기도 했다. 당시 아카풀코는 히스패닉 세계를 태평양과 아시아에 잇는 글로벌 도시였다. 마닐라 또한 인도와 실론의 보석, 수마트라의 향신료, 중앙아시아의 카펫, 중국의 실크와 도자기가 넘쳐나는 글로벌 도시였다. 아시아의 상품과 아메리카의 은이 태평양을 단위로 순환하는 전 지구적 경제가 형성된 것이다. 즉 갈레온 교역이야말로 16세기부터 시작되는 '지구 경제'의 심장 역할을 했다. 지중해를 강조했던 기존의 세계 체제론은 수정이 요청된다.

이 지구적 경제망의 허브는 광둥이었다. 계절풍을 따라 아시아, 아라비아, 유럽, 아메리카, 호주에서 교역 선들이 밀려드는 10월부터 3월까지 광둥은 일대 성시를 이루었다. 전 세계 인류와 언어와 상품이 뒤섞이는 혼종의 난장터였다. 기실 갈레온 선 또한 멕시코에서는 "naos de China(중국선)"로 불렸다. 진귀한 물품의 태반이 중국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으로 페루와 멕시코의 광산에서 나는 은화는 광동으로 흘러들어갔다.

유럽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의 차(tea)가 영국에 전해진 것은 1644년이다. 1830년에는 매년 3000만 톤을 수입했다. 무역 적자는 심대했다. 흡사 오늘날의 '글로벌 불균형'에 방불했다. 중국은 수출하고, 외국은 수입한다. 국제 결제 통화 은은 중국에 쌓인다. 이 만연한 무역 불균형을 타개하려던 방편이 아편이었다. 식민지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중국에 팔면서 손실을 만회하려 든 것이다. 이에 임칙서(林則徐)는 아편을 몽땅 폐기하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편지를 보냈다. 유학적 세계관에 철저한 관료로써 '오랑캐의 수장'에게 도덕적 훈시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반론하고 반격했다. '재산권 침해'와 '자유 무역'을 옹호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1840년, 아편 전쟁이다.

1840년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뉴질랜드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해이며, 타히티가 프랑스령이 된 해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와 전 세계를 잇던 '조공 무역 질서'가 해체되고 '자유 무역 질서'로 재편되던 초입이라 하겠다. '자유 무역'으로의 전환은 자연스럽지도 자유롭지도 않았다. 총과 대포가 앞섰고, '불평등 조약'이 뒤를 따랐다. 그 후 태평양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태들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 300년의 장기 평화는 온데간데없이 '전국 시대'가 열렸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떨어졌던 태평양의 섬들은, 20세기에는 미국의 군사기지(괌, 하와이 등)가 되거나 핵무기 실험 장소(비키니)가 되었다.

리오리엔트

TPP는 사실상의 미일 FTA이다. 양국의 비중이 90퍼센트에 달한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처방전은 단순하다. 수출 증대, 수입 억제, 적자 감소, 고용 증대, 경기 부양, 재정 확보이다. 특히 수출 증대 정책에 부합하는 대규모 소비 시장이 필요했다. 일본을 참가시키려는 의도이다. 이는 1980년대 '플라자 합의'를 통해 미국의 경제 위기를 일본에 전가했던 방식과 유사하다.

1970년대는 사실상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종언을 고한 때이다.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의 종언을 의미했다. 석유 파동 또한 지하 자원에 의존한 경제성장의 종언을 상징했다. 지상(地上)의 영토 팽창과 지하(地下)의 자원 수탈이 임계에 달한 것이 1970년대였다. 이를 금융 규제 완화 등으로 지연시킨 것이 신자유주의였다. 이 또한 2008년을 기점으로 허물어졌다. TPP는 그 낡은 체제의 반복이고 답습이다.

또 다른 태평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아메리카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다. 브라질은 이미 세계 6위의 대국이다. 룰라라는 탁월한 지도자의 공이 클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도 아니다. 아시아 경제권과의 전략적 교류의 산물이다. 브라질의 최대 교역국이 중국이 된 지 이미 오래이다.

브라질만도 아니다. 2000년대 이래 남미의 좌파 정권 등장에는 중국과의 연대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 기존의 초국적기업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 것도, 정치 개입을 삼가는 위안화의 유입으로 대체 선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투자와 식량, 원자재, 에너지 구매로 촉발된 세수 증대와 재정 확대를 사회 복지 확대로 전환할 수 있었다. 이는 정권 재창출로 이어졌다.

21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경제적 변화는 '중국의 충격'과 '내재적 요구'의 결합이다. 태평양 건너 아시아와의 연결을 통하여 새로운 아메리카가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미국의 호수'였던 태평양에 대중화의 바다(chinese circulations)가 역류하고 있다. 정치적 지배도, 문화적 획일화도, 군사적 점령도 수반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야말로 '비즈니스 프랜들리'하다.

'민주주의' 또한 풍성해지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원주민 출신 대통령이 탄생한 것은 극적인 변화이다. 게다가 민중 권력, 원주민 권리, 지방 자치, 생태적 가치의 복원을 담은 신헌법도 제정되었다. '토착적 민주주의'의 발현이다. 정당제, 의회제만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민주주의' 또한 '민주화'되고 있다. 기실 '신 태평양'이 선언된 1993년에도 특기할 만한 일이 있었다. 미국이 하와이 합병을 공식 사죄했던 것이다. 같은 해 뉴질랜드에서도 원주민의 문화적 권리를 보호하는 국제 회의가 열렸다. 홋카이도의 아이누, 호주의 어버리진, 태평양 섬 국가들의 주민들이 참가하여 '원주민 권리 선언'을 발표했다. 포스트모던 운운과는 질적으로 다른 진정한 '탈근대화'의 시초라 하겠다.

그 연장선에 1997년 홍콩 반환도 있다. 7월 1일 자정을 기점으로 유니언 잭을 대신하여 오성홍기가 올라갔다. 장쩌민 주석은 기념 연설을 통해 '일국양제'를 선포했다. 중화 세계의 논리를 재차 관철해 갈 것임을 만 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1999년 마카오도 '일국양제' 아래 반환되었다. 21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태평양 원주민의 권리 회복과 중화 세계의 부활과 함께 말이다.

따라서 1990년대 이래 세계화/지구화가 과연 '미국화'였던가 진지하게 재고할 필요가 있다. '중국화'가 실상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국민 국가의 쇠퇴, 지역 공동체의 부상, 전 지구적 교류망의 증진 등 '유동화 된 근대(liquid modernity)'란 갈수록 중화 세계의 원리와 유사해지고 있는 것 아닐까? 딱딱하고 단단하게 벽을 쳤던 독립(in-dependent)국가들의 세계로부터, 1840년 이전의 상호 의존적인(inter-dependent)세계(World Wide Web)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하여 중국의 부상 또한 강대국의 흥망성쇠의 하나가 아니다. 복구이고 복고이다. 실크로드와 누들로드, 차 무역, 광동 네트워크까지 전 지구적 교류망의 복원이다. 목하 아편 전쟁 이래 사라졌던 갈레온 선이 돌아오고 있다. 상하이항과 광둥항과 부산항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거대한 컨테이너선을 보라.

세계 시장의 판도는 이미 Made in China가 석권하는 19세기 이전과 흡사하다. 기축 통화 달러 또한 일본, 한국, 대만, 중국으로 흘러들고 있다. 상품은 아시아에서 나가고, 화폐는 아시아로 흘러드는 리오리엔트(reorient)화가 진행 중인 것이다. 즉 태평양은 지난 150년을 뒤로하고 지난 1500년의 역사로 반전하고 있다. 아주 오래된 풍경이 새 천년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환태평양학'은 이 태평양의 시세(時勢)를 좀체 감당치 못하고 있다. 도통 시중(時中)을 꿰뚫지 못한 아카데미 특유의 뒷북이다. 대안적 지식 체계로서 자격이 미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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