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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택한 숙종, 조선의 앞길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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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 택한 숙종, 조선의 앞길을 바꿨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알고도 가는 길, 그 다섯 번째

(☞전 회 바로 가기 : 알고도 가는 길 ④ 장옥정과 숙종의 로맨스, 이래도 아름답니?)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했던 박태보는 장희빈과 자신에 대한 비판에 화가 치민 숙종의 혹독한 형신(刑訊 고문하며 심문함)에도 불구하고 시종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도리어 자백을 강요하는 승지에게 "나는 죽어도 충신이 되겠지만, 너는 나라의 도적이고 더러운 귀신이 될 것이다."라고 되받았다.

너 사주 받았지?

이 과정에서 숙종은 "민진후 형제가 너를 사주하였느냐?"라고 따진다. 민진후 형제, 곧 민진후(閔鎭厚 1659~1700)와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을 가리킨다. 둘은 민유중의 아들이자 인현왕후(1667~~1701)의 오빠이다. 말하자면 동생이 폐위되니까 오빠들이 나서서 복위운동을 벌였고, 박태후가 그 선봉에 선 것이 아니냐는 심문이었다. 박태보는 "신의 형 박태유(朴泰維)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을 탄핵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 원수가 져서 상대하지 않았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반론했다. 숙종 15년(1689) 4월 25일, 한밤중의 일이었다.

이리하여 민진후 형제 역시 의금부에 잡혀와 하옥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들에 대한 심문이 이어졌다. 정황으로 보아 박태보가 민진후 형제의 사주를 받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박태보 말대로 그의 형 박태유가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1630~1687)을 탄핵한 적이 있어서 서로 뭔가 일을 도모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숙종의 심문에, 민진후 형제는 "지금 상중에 있어서 외부와 내왕이 끊어졌습니다. 더욱이 근래부터는 두려워하여 견책을 기다리는 중이라 친지와 족당(族黨)도 모두 사절하였고, 박태보의 경우는 본래 서로 혐의가 있었습니다. 형 박태유는 상소를 올려 망부(亡父, 돌아가신 아버지)를 거짓으로 모욕하였으니, 어찌 그 아우를 부추겨서 상소하게 할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답변했다. 이는 조정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숙종도 더 이상 심문을 진행하지 않고 이들을 풀어주었다.(<국역 숙종실록>, 권21, 15년 5월 9일》

관직 이름이 '바른 말'

박태보의 형 박태유가 민유중을 탄핵한 것은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숙종 9년(1683) 정언(正言)이었던 박태유가 장관과 귀척(貴戚, 국왕과 혼인관계에 있는 인척)을 비판하였다. 정언은 언론활동을 통해 비판을 직무로 하는 사간원의 정6품 관직이고, 그래서 아예 관직 이름 자체가 '바른 말', 곧 정언이었다. 박태보가 당시 비판했던 사람들의 면면과 탄핵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호조판서 윤계(尹堦) : 탁지(度支, 호조)의 장관은 마땅히 신중하고 간소해야 하는데, 지금 이 직책에 있는 사람은 재물을 다스려 백성을 편하게 해준 실적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자질구레한 이익까지 긁어내어 백성의 원망이나 크게 불러일으키고, 재물이 풍부한 관청에 근무하고 있으면서도 청빈하게 자신을 지키지 못해 작년처럼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해에 위아래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데도 자기 집의 잔치에서는 온갖 사치를 다하였고, 그 자제를 위해 잇달아 큰 집을 지으니 사람들의 심정이 다 같이 놀라고 여론이 시끄러웠다.

②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 : 귀척이 앞다투어 사치하여 혼인 비용이 날마다 더욱 늘어간다. 재상의 며느리를 맞이할 때 혼수 비용이 천금(千金)을 넘고 그 품목을 쭉 써놓은 것이 저잣거리에 돌아다니니, 부를 자랑하고 사치를 뽐내는 것을 서로 돌아가며 본받고 있다. 만약 이 풍습을 개혁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먼저 법으로 왕실과 가까운 인척 집안을 억제하여 교화에 폐를 끼치거나 풍속을 해치는 데 이르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③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 청아(淸雅)하다는 이름이 여태까지 드러났으나 자리가 귀해지고 은총을 입고 여러 직임에 차지하게 되자, 평소의 조신한 행동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요사이 하는 바를 보건대 방자한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 송사(訟事)를 결단하는 데 공평함을 잃었다 하여 사사로이 추조(秋曹, 형조)의 아전을 다스리고, 형조의 작은 일 때문에 후사(喉司, 승정원)의 신하를 조사할 것을 청하였다. 이는 전하께서 교만하게 한 과실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어서 주의를 주고 단속하여 다시는 외정(外政)에 간여하지 못하게 해서 조정의 체통을 엄숙하게 만들어야 한다.(<국역 숙종실록>, 권14, 9년 6월 2일)

탄핵, 사실에서 소문까지

사간원과 사헌부를 합쳐 양사(兩司)라고 하는데, 관원들에 대한 감찰과 탄핵을 담당하는 언론 관청이다. 이들은 꼭 증거가 있는 사실이 있어야만 누구를 탄핵하는 것이 아니다. 풍문만으로도 탄핵과 비판이 가능했다. 공직에 있는 관원이라면 좋지 않은 소문이 도는 것까지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박태유는 당시 최고위 공직자인 재상, 왕실과 인척인 부원군을 상대로 비판의 글을 올린 것이다.

박태유의 논계(탄핵하는 보고)를 본 숙종은 먼저 윤계의 사안에 대해, "탁지를 비판한 말이 몹시 준엄하다. 비록 허실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자질구레한 이익까지 긁어모은다'거나 '눌러앉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는 말은 또한 너무 박절한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했다.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그 비판의 적절성을 지적하는 군왕의 풍모가 느껴지는 답변이다.

②의 김수흥의 경우, 원래 박태유의 계사에서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관이 김수흥임을 기록하였다. 영부사였던 김수항의 형 김수흥은 이 때문에 상소를 올려 그런 비판을 받은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변명하지도 않았다. 이후 김수흥은 양주(楊州)로 돌아가 잇달아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사관과 승지를 보내 위로하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부탁했다.

정6품 관원 한 사람의 논계가 해당 재상들의 처신을 들었다 놓았다 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광경은 조선의 조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위의 김수흥에 대한 비판도 사실과는 달리 와전된 것이었고, 박태유의 논계는, 지난 호에 다루었다시피, 당시 노론과 소론의 분리를 초래했던 윤선거(박태유의 외할아버지)의 비문 논란의 여파로 꽤 감정에 치우친 느낌이 없지 않다. 이런 상황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어떻게 해석하든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 적어도 '부끄러움을 아는 척이라도 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장인은 정치를 맡을 수 없다

민유중이 원래 조신한 인물이었던 점은 박태유도 인정했지만, '요즘 들어 방자해졌다'는 것은 곧 숙종의 장인이 되면서 변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박태유의 논계는 조금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선 '방자하다'는 말이 애매하다. 또한 형조의 송사 처리 때문에 아전을 다스리는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승정원 담당 승지를 추고하라는 요청도 다반사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태유의 논계가 올라오자 민유중 역시 자신이 맡고 있는 관직을 사직하였다. 논계 내용도 내용이지만, "옛 제도에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는 조정에 간여할 수 없었으니, 기미를 방지하고 조짐을 막는 계책을 만든 의미가 깊습니다. 광성부원군 김만기(金萬基)는 물러나 스스로를 지켜 아름다운 명성을 손상시키지 않았으니, 거의 고가(古家)의 풍류가 있다 하겠습니다"라고 하여, 박태보가 김만기와 민유중을 대비하면서까지 민유중을 논핵한 점이 더 불편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김만기는 숙종 6년(1680)에 세상을 뜬 인경왕후의 친정아버지이고, 민유중은 그 이듬해 왕비가 된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였기 때문이다.

▲ 숙종의 아들 영조와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의 혼례를 기록한 '가례도감의궤' 일부. 국왕의 장인이 되면 군사나 경제 방면에 경륜이 있어 임시로 겸직을 할 수는 있으나, 조정의 품계가 있는 공식 관직을 맡을 수는 없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의 장인은 조정의 품계가 있는 직임을 맡을 수 없었다. 이 말은 당연히 조정의 관청 일에 간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임시 관직, 예를 들어 사신으로 간다든지, 군사나 경제 방면에 경륜이 있을 경우 해당 관청의 제조(提調)를 겸할 수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딸이 왕후가 되자 민유중도 이 관례를 따라야 했다. 인현왕후의 가례(嘉禮)가 있던 해에 영의정 김수항은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민유중의 지위, 명망, 재주, 국량은 조정의 신하 가운데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대혼(大婚, 숙종과 인현왕후의 혼사)이 이미 정해진 후에도 그대로 관직에 있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니, 신들도 애석한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성(慈聖,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의 하교에 체직시키지 말라는 명이 있으니, 누군들 자성께서 나라를 위해 인재를 아끼는 지극한 뜻과 전하께서 시대를 염려하시는 깊은 마음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역대로 금지했던 조종(祖宗)의 확립된 법을 끝내 어길 수 없는 것이며, 또 모든 일은 마땅히 훗날의 폐단을 염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민유중이 지금 선혜청(宣惠廳)과 비변사 당상의 자리에 있으니, 이러한 직임은 체직시킬 필요가 없겠지만, 병조판서는 결코 그대로 있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인현왕후가 숙종 7년(1681) 3월 26일 간택되었고 민유중이 여양부원군이 되었다. (여양(驪陽)이란, 민유중이 여흥(驪興, 경기 여주) 민씨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그날 명성왕후는 민유중의 체직을 금하는 하교를 같이 내렸다.

그러자 훙문관 교리 임영(林泳)이 먼저 민유중의 유임을 비판했다. 아마 계속 여론이 비등했던지 김수항이 나서서 재주는 아깝지만 이왕의 법을 따라 민유중이 맡고 있는 병조판서를 교체해야 한다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민유중은 김수항의 친한 후배이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은 김수항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않았다기보다, 어머니의 명이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는 당사자가 해결하는 것이 가장 낫다. 4월 1일, 민유중은 곧 병조판서를 사임하였다. 그러자 숙종은 앞서 광성부원군 김만기도 병조판서를 유임시키려 했다가 못했는데, 지금도 그렇다고 애석해하면서도, 민유중이 자리를 비워 청나라 사신 접대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체직을 허락하고 이튿날 이숙(李䎘)을 병조판서로 임명하였다.

▲ 사실에 가까우면서도 재미를 함께 주었던 <장희빈>(김혜수 주연)에서 민유중 역을 맡았던 송재호. 최근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민유중 역을 맡은 이효정. 주변 의견과 인터넷 검색 결과,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사실 왜곡이 정도를 넘었다는 견해가 많은 듯하다.

경세가(經世家), 민유중

숙종 9년, 박태유의 과도한 탄핵이 있은 뒤 비변사 신하들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우의정 김석주(金錫胄)는 "여양부원군 민유중이 대관(臺官)의 상소로 인하여 여러 임무를 풀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선혜청(宣惠廳)과 진휼청(賑恤廳)의 두 임무는 몹시 중요한데다, 요즘과 같이 재성(裁省, 세금을 헤아려 줄임)하는 날에는 더욱 능숙한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금위영(禁衛營)의 임무를 풀어주시고, 선혜청의 제조(提調)는 교체하지 말도록 하십시오"라고 숙종에게 건의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민유중이 맡고 있던 관직이다. 김석주의 말에 따르면 민유중은 금위영, 선혜청, 진휼청, 이렇게 세 관직을 겸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금위영은 숙종 8년(1682) 3월 16일, 당시 병조판서 김석주가 정리하여 올린 군제 변통절목(軍制變通節目)에 따라 만든 금군(禁軍 궁궐방어군)으로, 기병(騎兵) 및 보병(步兵)으로 구성되었으며 병조판서가 책임을 졌다. 민유중은 임금의 장인이 되어 병조판서를 그만두고, 새로 생긴 금위영의 제조로 임명되어 직무를 보고 있었던 셈이다.

선혜청은 우리가 잘 아는 대동법 시행을 위해 설치한 관청인데, 광해군 즉위년에 설치했다가 유명무실해졌고 인조 이후 대동법 시행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임시관청이 아니라 마치 정규관청처럼 되었고, 숙종 이후에도 호조와 별도로 내내 존속하였다. 진휼청은 흉년이 들었을 때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수시로 설치하는 임시 관청이다.

김수항의 말처럼 민유중은 군사와 경제 분야에 경륜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명성왕후가 관례와 법까지 무시하며 병조판서에 유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병조판서에서 체직된 뒤에도 민유중은 금위영 제조를 통해 군사적 자문에 참여했고, 호조에서 취급하는 재정 규모의 3배가 넘는 재정을 처리하고 있고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을 담당하고 있던 선혜청의 제조를 겸하고 있었으며, 진휼청 제조로 시급한 백성들의 기근 문제를 현장에서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현왕후를 쫓아내고 장희빈을 왕비로 세우고, 조정에서 노론과 소론 대신 남인을 대거 끌어들였던 숙종의 기사환국은 단순한 정치변동이 아니었다. 정치가 정책을 포함하게 마련이고, 정책은 민생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정치변동이 단지 정치변동에 그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물론 단순한 정치세력의 변동도 역사에는 있다. 그러나 종종 역사학도가 놓친, 연관되어 있는데 그걸 보지 못하여 놓친 연관성도 마찬가지로 있다. 기사환국은 정치변동과 정책/민생의 변화가 맞물려 있던 사건이었다.

민유중은 기사환국이 시작되기 이태 전인 숙종 13년(1687)에 세상을 떴다. 그러므로 민유중과 기사환국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수밖에 없다. 딸이 왕비에서 폐출되는 험악한 꼴은 안 본 셈이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책과 민생에 관한 한 민유중은 기사환국과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다음엔 이 주제를 다루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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