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2013년의 한국은 전쟁 뉴스의 취재 대상이 되기 위해 대기 중이고, 두 번째로 전쟁으로 인한 대량 살상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는 당사자들은 평온하게 일상생활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전 세계 뉴스의 시청자들이 종군기자의 눈을 통해 기대하는 장면은 분명 서울의 벚꽃이나 꽃샘추위 따위가 아닌 전쟁과 살상의 스펙터클일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웃음으로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전쟁 그 자체만큼이나 공포스럽고 모욕적이기 때문이다.
▲ <세슘137>(파스칼 크로시 글・그림, 이세진 옮김, 현실문화 펴냄). ⓒ현실문화 |
어떤 곳에서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 불행을 탐하는 선정적인 시선들은 희생자들에게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거두어간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비극이 바로 주변에서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빠른 속도로 희생자들을 우리의 의식 속에서 분리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가령 한국전쟁에서 일어난 비극들을 흑백사진 속의 '근대화 전 한국'의 이미지로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광주라는 지역에 대한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발화로서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전히 그 당사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파스칼 크로시(Pascal Croci)의 그래픽 노블 <세슘 137>(이세진 옮김, 현실문화 펴냄)을 2013년 한국에서 감상한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권장할 만한 경험이다. 작품에 의하면,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히틀러도 사랑하고 괴로워할 줄도 아는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많은 희생자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내일도 오늘과 같이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며 아무 일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한 일반인 학살 사건이 자행된 오라두르 쉬르 글란 마을에서 시작하여 히틀러와 아우슈비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 9.11테러에 이르는 현대사의 비극들을 그리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노블이라기 보다는 르포르타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슘 137>을 읽는 것은 마치 그림으로 그려진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느낌을 수반한다.
<세슘 137>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작품이 다루고 있는 사건들의 나열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현대사의 비극' 이며 '비인간적인 살상' 이자 '전쟁 혹은 인간의 이기심이 불러온 참상'의 목록이다. 그리고 더 자조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의 야만성은 문명의 발달과 전혀 반비례하지 않는다'는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목록이기도 하다.
이러한 목록은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충분히 비극적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다소 진부하기까지 하다. 물론 그 비극성의 진부함이 아니라 그러한 목록이 전달하는 주제에 대해, 예술 작품의 주제로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은 영화나 소설,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미디어에 의해 반복하여 이야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진부함, 혹은 의심은 이러한 목록들이 가지는 또 하나의 공통점인 '비극을 향한 선정적이고 관음적인 시선', 그리고 이와 관련된 불편한 감정들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슘 137>은 그렇게 '바라볼 수'만은 없는 작품이다. 독자는 이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온 감각으로 체험해야 한다. 전체를 관통하는 촉각적 체험은, 이 작품이 연필선이 그대로 살아있는 데생으로 구성되었으며,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매끄러운 선형적 내러티브가 아니라 인터뷰들과 취재 이미지들이 콜라주되어 구성된 작품이라는 형식적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목소리들은 저마다 생생한 목소리로 사건을 증언하고, 그러한 코멘트에 대한 작가의 슬픔과 분노는 작품을 구성하는 선 속에 살아있다. 펜으로 매끄럽게 정리되지 않은 연필 선은 기계화되지 않은 본연의 것이다. 이것은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에 대한 감정으로서, '의식이 전이된 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세슘137> 중 한 장면. ⓒ현실문화 |
가령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증언하면서, 작가는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이나 히틀러의 여비서 크리스타 슈뢰더의 인터뷰를 병치한다. 이 인터뷰들은 화면 안의 목소리가 아니다, 화면의 비극성과는 때로 어울리지 않지만 화면과 어울려 의미를 자아내는 내용이 화면 밖의 목소리로 증언된다. 가령 히틀러가 에바 브라운을 왜 좋아했는지를 언급하는 인터뷰 중 "그 사람도 정리 감각이 유난히 발달한 꼼꼼한 사람이었으니까요"라는 대사에는 시신 더미의 스펙터클이 곁들여진다. 체르노빌의 방사능에 희생된 아이들을 구하려 했던 의사들에 대한 인터뷰는 망가진 어린아이 모양 인형 더미의 이미지와 함께 제시된다.
이는 사진, 혹은 꼼꼼히 펜으로 정리된 그림이라면 전달하기 어려웠을 비극적 감정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미학적 특징은 영화나 사진 등이 모방하기 어려운, 그래픽 노블 고유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필 데생의 진정성, 그리고 단조로운 연필의 회색조는 작품에 묘사된 주제를 다루는 작가의 태도이다. 그것은 비극적 사건을 있는 그대로 다루겠다는 르포르타주 작가로서의 데생이며, 볼거리로서 치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하나의 의지이고, 비극적 사건에 대한 추모의 염의 색조이기도 하다. 사진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려진 이미지들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해석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따라서 이 작품이 그래픽 '노블'일지언정, 전통적인 그래픽 노블 형식이 흔히 취하는 이야기적 성격보다는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심지어 비극적 사건이 하나의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을지라도 이미지와 내레이션의 스토리텔링을 별개로 진행함으로서 관객이 이들 비극을 하나의 이야기로 소비하는 것을 거부한다.
가령 작가가 오라두르 쉬르 글란 마을의 비극을 다룸에 있어서 이미지의 진행이 길에서 독일군에서 사살되는 소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면, 목소리들은 그녀 가족들의 대화들로 진행된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비극을 위한 피사체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 독자와 마찬가지로 싸우고, 장래에 대한 고민을 하고, 부모와 언쟁하던 평범한 소녀와도 같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희생자의 일상에 대한 조명은 비극성을 증폭시킨다.
체르노빌의 비극을 대변하는 프리피야티 마을. 그곳의 대관람차와 놀이 공원의 폐허 이미지. 클로즈업하여 작가의 손으로 다시 그려진 이미지들에는 관계자들의 인터뷰가 곁들여진다. 인터뷰에 의하면 체르노빌의 사고는 은폐되었고, 주민들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피해를 입고 이주를 당했다. 그곳은 심지어 관광지가 되었다. 사실 이 이미지들은 프리피야티를 대표하는 기존의 사진 작품을 다시 그린 것이다. 작가는 관음적 시선의 대상이 된 프리피야티 유원지의 사진들을 손으로 다시 그리고 인터뷰와 함께 재구성함으로써, 그것은 무수한 죽음과 고통을 전제로 한 이미지임을 호소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참상을 고발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분노는 과거와 현재의 살상을 자행하는 자들뿐 아니라 이 사회의 무감각한 시선들에게로 향한다. 아우슈비츠를 구경거리로 대하는 관광객의 시선들,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을 보여 달라는 청소년들에게 저자는 실망하고 끝없이 이어질 참상의 싹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것을 혹시 권력이 의도적으로 방조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그 중심에는 폭력을 구경거리화 시키는 미디어에 대한 고발이 있다.
"뉴스를 보면 스포츠 뉴스에서 전쟁 이야기로 휙휙 넘어가죠. 사생활을 까발리는 추악한 방송은 또 어떻고요?" "죽음의 포르노그래피에 왜 그리 환장하는지" "폭력적이지 않는 포르노그래피가 전 세계에 넘쳐나는 폭력적인 할리우드 영화보다는 덜 유해한 것 같은데요?" 등의 질문을 통해 작가는 끊임없이 '비극을 불러온 야만성'뿐 아니라 비극을 소비하고 폭력을 권장하는 미디어의 야만성'에 대한 의혹을 표현하며 비난한다. 미디어에서의 섹스의 통제와 전쟁 이미지의 소비에 대한 무감각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인간은 호전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호전적으로 길러진 것이 아닐까?
▲ <세슘137> 중 한 장면. ⓒ현실문화 |
따라서 <세슘 137>이 의도하는 것은 흔하디흔한 과거의 비극에 대한 신파적인 조명과 애도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들의 각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전체적인 구성과 조화롭지 못하게 겉도는 한 여성의 존재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한 여성기자가 인류의 야만성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바라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실상 작품 속에 제시된 다양한 인터뷰와 이미지들은 그녀의 취재 자료의 형태인 것이다.
외모나 라이프 스타일에서 패셔너블한 그녀는 오로지 TV 모니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녀는 화면을 통해 인류의 참사들을 지켜보고 때로 공감하고 슬퍼하며 역겹다고 거부감을 표시한다. 그녀는 때로 멋지게 고통 받는 인류를 그림으로 그리거나 영화를 감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치 마네킹 같은 자세나 표정, 늘어진 몸 등은 그녀가 같은 TV를 통해 포르노 그래피를 소비할 때에나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소비할 때에나 동일하다. 정말로 섬뜩한 것은 히틀러와 게리 라우발의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진행될 때 화면을 가득히 채우고 슬퍼하는 이미지가 여기자 본인인지, 게리 라우발인지는 모호하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감정으로 이들 역사적이고 현재진행적인 참상들을 소비하는가. 폭력의 주체에 분노하는가, 혹은 연애담이나 폭력물, 재난 영화, 스타 이미지라는 하나의 장르로서 소비하는가.
따라서 이 작품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이미지는 마이클 잭슨과 히틀러의 병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인들은 히틀러에게 열광했다. 그것은 마이클 잭슨에 대한 열광과 다르지 않았다. 두 스타 이미지가 취하고 있는 미적 형식은 심지어 유사했다. 이는 히틀러의 카리스마적 이미지를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에 담아낸 레니 리펜슈탈이, 과연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그저 미학적인 작업을 했을 뿐인가? 그녀는 무죄인가? 라는 질문과도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의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전쟁의 참상과 관련된 우리의 무감각은 미디어를 통한 전쟁의 소비와 관련되어 있지는 않을까? 독일 언론에서 다루어진 김정은이 미사일을 탄 이미지는, 김정은과 싸이가 닮았다고 느낀다는 외국인들의 감상과 연결지어 생각해보게 된다. 전쟁이 어떤 국가와 국가의 힘겨루기이기 이전에 우리 자신을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쟁의 미디어 소비자로 살아온 오랜 관성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작품을 마치고, 권말에 작가는 후기를 덧붙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사를 마감한 여기자의 운명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작품 속 기자가 기사를 다 쓰고 제일 먼저 반사적으로 한 행등은 창가에 서는 것이다. 그녀의 시선은 새로운 지평을 바라본다. 그녀는 창이 열리지 않는 사무실을 벗어나 바람을 쐬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여러 가지 야만에 대한 기사를 작성한 후, 그녀 또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 붕괴를 통해서 무시무시한 현실과 대면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마치 여기자가 대면할 비극을 이야기하는 이 구절이 텍스트를 빠져나와, 이 서평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의 무시무시한 현실로 전환되고, 그리고 나 자신의 현실이 또 다른 누군가가 지켜볼 미디어 속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와 대면한다. 이 작품이 9.11 테러까지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재난이나 현재 한국이 겪고 있는 전쟁의 위협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작가가 경고하는 무감각한 미디어 소비자들이자 동시에 대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