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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명의 아이들, 감옥에 가다!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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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명의 아이들, 감옥에 가다! 진실은?

[프레시안 books] 신시아 레빈슨의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사문화되고 있다. 지난 연말 취임한 문용린 서울시 교육감이 "교단의 붕괴를 막기 위해 학생인권조례를 가장 먼저 손보겠다"고 밝힌 이래, 두발·복장 규제, 체벌 등을 금지하는 학생인권조례가 무력화되면서 새 학기를 맞이한 각 학교에서 일제 단속이 되살아나고 있다. 학생들은 교문 앞에서 자신이 유순하고 잘 복종할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해야하고, 개인적 성장과 경쟁으로 얼룩진 교실에선 입시 관련 이외의 질문은 침묵을 요구받는다. 삶이 무너진 사회에서 교실의 붕괴는 필연적이건만, 문 교육감은 관계적 삶을 고민하고 존엄성에 기초해 서로를 세우기보단 학생과 교사의 존엄을 경쟁적으로 만들고 권위로써 교실을 복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교육 정책은 학생은 보호가 필요하고 미성숙한 가르침의 대상이고, 교사는 이들을 지도함으로써 존중받아야할 존재란 관점에 기초한 듯 보인다. 하지만 "교육의 본질은 아이들의 성공과 출세를 돕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게 돕는 것"이란 교육 철학을 견지한 교육감이시기에, '감히' 꼭 한번 읽어보시라 권하고픈 책이 있다. 바로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신시아 레빈슨 지음, 박영록 옮김, 낮은산 펴냄)이다.

'버밍햄 십대들의 인권 선언 행진'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정확히 50년 전 오늘 미국에서 벌어졌던 어린이·청소년들의 인종 차별 철폐 직접행동에 대한 기록이다. 지은이 신시아 레빈슨은 당시 십대였고, 이후 중·고등학교에서 미국 역사를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직접행동을 알지 못했노라 고백한다. 생소한 역사적 사실을 대면한 당혹감에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게 됐다는 그는, 4년간에 걸친 작업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매우 세밀하고 생동감 있게 재현해냈다.

불행을 넘어선 부정의로

▲ <오늘, 우리는 감옥으로 간다>(신시아 레빈슨 지음, 박영록 옮김, 낮은산 펴냄). ⓒ낮은산
책을 읽으며 나는 모욕적인 삶을 살아야했던 흑인들을 만났다. 책의 무대가 되는 1963년 미국 앨라배마 주 버밍햄 시는 "바밍햄(Bombingham)"이라 불릴 만큼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과 테러가 일상화 된 남부의 전형적인 도시 중 하나였다. 1862년 노예제가 폐지되고, 1955년 몽고메리에서의 승차 거부 운동으로 버스에서의 인종 차별이 불법화되었지만 버밍햄의 시계는 한 세기 전에서 멈춘 듯 보였다. 인종분리조례와 관습, 협박 등을 통해 흑인과 백인은 거의 완벽하게 분리된 세상에서 살았다. 식수대, 화장실, 학교, 버스 좌석 등이 흑인용과 백인용으로 구별된 것은 물론 식당과 영화관, 교회 심지어 병원에서도 인종분리가 자행됐다. 백인의 폭력과 경찰의 살해가 끊이지 않다보니 흑인 부모들은 백인과 경찰이 널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협박을 통해 아이들을 통제하곤 했다. 흑인과 백인은 아무런 교류 없이 각자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성장했으며, 흑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경계 안에서의 삶과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바로 모욕과 차별에 내던져진 일생, 그것이었다.

누군가는 불행이라 읊조리고 체념했을 그 상황을 일부의 흑인들은 '부정의'라 선언하며 맞섰다. 승차 거부, 연좌농성, 철야 기도회, 불매 운동 등 흑인들은 자신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 싸웠고, 그 싸움의 끝자락에서 그들은 감옥을 가득 채우는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해 인종분리 정책의 무력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생명과 직장을 잃는데 대한 두려움으로 운동이 주춤했을 때, 4000여 명의 어린이·청소년들이 감옥을 향해 행진했다. 물대포를 맞았고, 경찰견에 물렸지만 그들은 비폭력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발 한 짝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감옥에서 며칠이고 두려움에 떨며 쪽잠을 잤지만, 그들은 "우리도 사람"이라며 자유를 요구했다. 몇 번을 다시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멨다.

길이 열리다

하지만 불편했다. 어린이·청소년들이 저항 운동에 동원된 듯한 인상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함은 직접행동을 통한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이를 통한 흑인 지도부 및 성인들의 변화를 대면한 뒤에야 사그라졌다.

결석을 밥 먹듯 하고 친구들과 노는 데만 골몰하던 14살 워시는 비폭력 행진에 나선 아이들을 보고 미쳤다고 생각했다. 며칠이고 행진을 관망하다 경찰의 폭력 진압에 분노해 벽돌과 병을 던졌지만 감옥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자발적으로 비폭력 행진에 참여했고 감옥에 갔다. 백인 학교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렸던 16살 아네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고민했고, 이후 누구보다 열심히 대중 집회와 비폭력 교육에 참석했다. "우리 모두가 울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를 새로 쓸 수 있을 거다"라고 말하던 부모가 "넌 너의 역할을 다했어. 이번 일에 끼어들지 마라"라고 반복적으로 충고했지만 그는 매일 행진에 나섰다. 직접행동에 나선 4000여 명의 어린이·청소년들은 자유는 말이나 누군가의 선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열망과 행동을 통해 쟁취되는 것임을 위험과 직면했던 거리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배웠다.

성인들 또한 변화했다. '감옥으로 가자'는 직접행동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을 때 흑인 지도자 베벨이 성인 남성들을 대신해 보병으로 세우고자 했던 이들은 남자 고등학생들이었다. 하지만 많은 여학생들이, 어린이들이 행진에 자원했다. 성인들은 깨달았다. 이 문제가 이미 성인들의 손을 떠났다는 걸. 어린이·청소년의 감옥 행진에 반대해 버밍햄에서 철수하려 했던 흑인 지도자 A.G 개스턴은 물대포를 맞는 소녀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내 친구들이 자신의 목숨과 나의 자유를 위해 밖에서 싸우고 있었어요. 가서 그들을 도와야만 했지요." 수많은 어린이·청소년들이 감옥에 갇힌 뒤, 약 1000명에 이르는 성인들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행진에 참여했으며, 분열됐던 흑인 저항 운동의 지도부가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변화는 흑인 사회에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행진 저지의 임무를 부여받은 경찰관과 소방관들은 물대포와 진압을 거부했고, 이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공권력으로 인종분리를 유지하려던 경찰간부는 "우리가 이런 짓까지 하면서 바라는 게 도대체 뭐지?"라고 자문하게 됐다. 파장은 버밍햄 시를 넘어 미국 사회로 퍼져나갔다. 하기에 이 책은 흑인 어린이·청소년들의 인권 선언에 대한 기록이면서, 그들이 변화시킨 성인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교육의 길을 묻다

또한 이 책은 교육이 무엇을 지향해야하는가에 대한 묵직한 물음을 던진다.

당시 버밍행 시 교육감은 행진 참여자를 징계할 거라 으름장을 놓았고 이후 학생들을 퇴학시켰다. 많은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안전을 걱정해서였겠지만 행진 참여가 불법이며,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며 이들을 막아섰다. 학기 중에 학생들을 행진에 참여시키는 건 교육을 무너뜨리는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흑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다칠 수밖에 없는 현실에 학교와 교육은 침묵했다.

"당시 미국 정부, 헌법이 무엇을 보장하는지,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었어요. (…) 그런 걸 배운 아이들이 인종 분리된 교육 체계에서 수업을 받고, 식당에 드나들 땐 뒷문을 이용해야했던 거예요. 학생들이 저항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110쪽)

울포크 선생의 말이다.

삶에 기반을 두지 않는 교육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까?

문 교육감의 교육 철학인 '인생의 행복'은 긍정적 사고나 습관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다. 부정의한 상황을 불행으로 인지하고,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며 안도하는 행복은 '노예의 평온함'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행복은 욕심을 조금씩 비우는 성찰을 통해 얻어지기도 하지만 나를 불행하게 하는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질문이 없는 배움은, 존엄에 대한 열망이 없는 교육은, 삶이 사라진 학교는 공허하다. 그러하기에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키워야하는 것 아닙니까? 최선의 교육은 아이들이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체제를 스스로 무너뜨려야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101쪽)라는 말은 지금-여기서도 유효하다. 울림을 가진다.

단지 꿈꾸기만 해야 하는가?

어린이·청소년들의 직접행동은 지금-이곳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3.1만세 운동의 유관순, 4.19혁명에 참여한 수송초등학교 학생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함께 한 중·고등학생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2008년 맨 처음 촛불을 든 것이 바로 그들이었고, 2011년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를 주민 발의로 제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청소년 기본권제정운동을 벌이며, 청소년 알바의 부당한 노동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도 이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기상은 높이 사면서도 현재의 주체에겐 불온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위험한 이탈자, 관리되지 않는 반항아, 미성숙하거나 선동에 휩싸인 꼭두각시란 호명으로 위장해 이들을 통제하고, 가르치고, 보호하려고만 한다.

우리 교육이 일구려는 것이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부모 세대의 영향력에 철저히 기생하는 '어른 아이'들"이라면 괜찮다.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사회이기에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비극이라 수용한다면 괜찮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쯤에서 다시 교육의 길을 물어야하지 않을까? 이 땅, 어느 청소년 활동가의 말처럼 "단지 꿈꾸기만 해야 하는 지금의 현실은 너무 비참하고 비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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