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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MB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가?

[모래가 흐르는 강] 피해자 중시 서사의 힘

지율 스님이 돌아왔다.

지난 수년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며 낙동강 상류 지천 '내성천 지킴이'로 활동해온 지율 스님이 다큐멘터리 <모래가 흐르는 강>을 제작, 개봉했다. 지율 스님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세계에서도 희귀한 자연 경관을 가진 내성천이 4대강 사업의 하나인 영주 댐 건설로 망가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강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편집자>


① 김택근 : "우리는 스님에게 또 빚을 졌다!"
② 김현우 : 너도나도 지율 스님 흉내 내기

▲ 지율 스님. ⓒ신병문

기록이라는 미덕은 종종 따분함으로 연결된다. 기록이 꼼꼼할수록 사유의 폭 역시 그에 비례하여 협소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대개의 사람들이 기록 영화 같은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거대 자본과 유명 배우로 무장한 상업 영화들이 넘치는 상황에서 서사적 상상력이 거세된 (또는 그런 것처럼 보이는) 기록 영화를 선택하는 관객이란 그리 흔치 않다. 게다가 영화가 다루는 기록이 세간에 논란이 되어 널리 알려진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에 약간의 차이를 두어 반복하는 것은 따분함에 지루함을 제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극장에서 보는 첫 4대강 다큐"라는 <모래가 흐르는 강>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정 좌석에 앉아 있던 어떤 관객의 예상은 분명히 이랬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관객은 자신의 섣부른 예측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지만 영화에 공명하여 가끔 눈물을 훔치는 다른 관객들의 표정을 미루어 볼 때 일탈된 감성을 가진 개인의 특수한 체험이 아니라는 것 또한 명백했다.

단순히 내성천의 변화하는 과정을 5년에 걸쳐 기록한 것에 불과한 영화가 언제라도 불평을 내뱉을 준비가 되어 있던 관객을 설득한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도 각계의 전문가들이나 여타 미디어를 통해 이미 그 해악이 충분히 입증된 사업을 다루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까지 행해졌던 4대강 비판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강이라는 존재가 수행했던 역할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객관적이고 명백한 폭력은 각종 수치로 드러나는 피해의 명확성만큼이나 가해자를 확정하기 용이하게 함으로써 담론의 중심을 가해자에 대한 비판에 놓게 한다. 문제는 이러한 가해자 중심의 담론 형성이 종종 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희미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가끔 처참하게 뭉개진 피해자의 모습이 화제의 중심이 될 때도 있긴 하지만 그 경우에도 대개 가해자의 잔혹성을 돋보이기 위한 소도구로 사용되거나 일시적인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그치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이는 애초에 사람들의 속성이 피해자가 겪는 고통과 그 호소에 감응하는 것보다 죄를 저지른 가해자에 대한 단죄를 수행하는 것을 더 손쉽고 통쾌하게 여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양상은 4대강 비판 담론에서도 동일하게 형성된다. 정권이 저지른 명백한 정책적 과오는 정권의 비판자들에게 유용한 도구가 된다. 물론 4대강 사업에 대한 모든 비판이 정치적 의도에서 수행되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비판의 대부분은 무모한 사업을 벌인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정의로운 분노에 기인한 것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이 경우에도 실질적인 피해자라 할 수 있는 강이 수행한 역할은 그 존재 자체로서 인정받는 것이 아닌, 불합리한 정권을 비판하는 물적 증거로 소환되는 경우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한 것뿐이다.

<모래가 흐르는 강>이 주목한 지점은 여기이다. 영화는 기존의 4대강에 관한 담론들이 강을 가해자에 대한 고발을 위한 객체로 취급한 것과 달리, 내성천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후 피해를 입어 신음하는 과정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이전까지 사람들이 듣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들으려 하지 않았던 피해자의 존재와 그 목소리를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때문에 이 영화는 복잡한 경제적 수치를 제시하며 근엄한 어조로 끊임없이 4대강 사업의 주체를 비판하던 이전의 기록 서사들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영화에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래가 흐르는 강>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은 아이들이 뛰놀던 금모래가 흐르던 맑은 하천이 사람들이 손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검은 자갈밭으로 변화하는 내성천의 극적인 변화에 있다.

영화는 전기톱과 굴삭기를 통해 내성천이 변해가는 5년간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집요하고 주의 깊게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자신과 동일한 종에 속하는 존재들이 강에 대해 행하는 섬뜩한 폭력을 반복해서 체험하며 내성천이 내지르는 소리 없는 비명에 전율한다. 동시에 관객은 자신이 자신의 또 다른 동료와 함께 내성천을 폭행하고 있다는 불편한 감정을 보유하게 된다.

<모래가 흐르는 강>은 내성천에 관한 다큐멘터리이긴 하지만 내성천의 등장 분량이 과한 편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관객은 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으며 스크린이 투영하는 내성천의 극적인 변화에 계속하여 집중한다. 만약 영화가 4대강을 다룬 여타의 다른 서사와 같이 그것을 접하는 이로 하여금 고발자의 지위에서 가해자를 단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면 이러한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면 피해자 중심서사로서 <모래가 흐르는 강>을 통해 내성천의 고통에 감응한 관객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어색하지 않다. 아마도 그건 이제까지 강이 전하는 목소리에 한 번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자신의 모습. 다시 말하자면 방관을 통해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성천에 대한 가해자가 된 듯한 불편함을, 당분간 다시 볼 수 없는 내성천의 모습에 집중함으로써 씻어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래가 흐르는 강>은 이렇게 기록 영화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특별한 힘을 보여주며 종료된다.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투박함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리는데 성공한 것은 당연히 연출과 촬영을 맡은 지율 스님의 성실함과 자연과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에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평은 어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촬영과 편집 기술을 배우는 데 고작 한 시간밖에 투자하지 않은 사람의 재능을 추켜세우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투덜대기 전에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지율 스님이 촬영과 편집 기술을 배운 것은 단 한 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스님이 내성천을 꾸준히 지키고 관찰한 시간은 5년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의 이야기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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