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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끼호떼 정체, 기사 아닌 '이것'으로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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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끼호떼 정체, 기사 아닌 '이것'으로 밝혀져"

[금정연의 '요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 끼호떼>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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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유쾌하고 엄숙한 검열식, 그리고 작가의 탄생


약속된 검열의 날이 밝았다. 우리의 주인공이 잠들어 있는 사이 조카딸에게 서재의 열쇠를 받은 이발사와 신부는 장정이 훌륭한 100권과 몇 권의 소책자를 앞에 두고 재판을 시작한다. 성수를 뿌리며 모든 책을 태울 것을 주장하는 무지몽매한 여인들. 하지만 박식한 두 명의 검열관은 책의 운명이 자신들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직접 책을 살핀 후 내용에 따라 처분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첫 번째 책은 돈 끼호떼의 영웅, <아마디스 데 가울라>의 모험을 그린 4권짜리 전질이다.

"귀한 책이로군"하고 신부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이 책이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기사도 이야기라던데. 다른 책들은 모두 이 책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거야. 말하자면 이 책이 모든 사악한 종파를 세운 셈이니 가차 없이 화형에 처해야겠군." (<돈 끼호떼>(김현창 옮김, 범우사 펴냄), 58쪽)

하지만 이발사의 생각은 다르다. 그 책이야말로 지금까지 발표된 이런 종류의 책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기에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흔쾌히 수락하는 신부. 하지만 자비는 거기까지다. 아마디스 데 가울라의 적자 <에스쁠란디안의 무용담>은 아비의 덕이 아들에게까지 꼭 미치라는 법은 없다는 이유로, 그 밖의 '아마디스' 일족의 이야기들은 여우를 말에 태운 것처럼 부질없다는 이유로 화형을 선고받는다. 그 밖의 다른 책들에게도 각각의 판결이 이어진다. 멋대로고 조잡한 문체 — 유죄, 장황하고 불필요한 대목 — 유죄, 사실성 혹은 창의성의 부족 — 유죄, 엉터리 번역 —유죄….

▲ <돈 끼호떼>(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현창 옮김, 범우사 펴냄). ⓒ범우사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신부와 이발사는 어떻게 사악하고 유해한 책들의 내용을 그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걸까? 답은 뻔하다. 그들 역시 그것을 읽은 것이다. 다만 그들은 미치지 않았기에 박식함을 자랑하며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그들은 나름의 문학적 근거를 가지고 판결을 내린다. 독창성, 문체, 캐릭터와 에피소드, 구성 등등. 마치 정전(canon)을 판별하는 비평가 선생님들처럼, 두 신사는 무지몽매한 대중을 대신해 남겨야 할 기사도 소설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한다. 물론 그것은 세르반테스 자신의 기준이다.

세르반테스의 의도는 분명하다. 기사도 소설에 대한 공격. 하지만 작가이자 기사도 소설의 독자였던 세르반테스는 기사도 소설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우스꽝스러운 검열 장면을 통해 넘쳐나는 엉터리 기사도 소설들을 폐기하고, 남길 가치가 있는 몇 편의 걸작들을 구하려던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의 작품도 포함해서.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라 갈라떼아>(세르반테스의 처녀작. 그는 이 작품에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듯 종종 속편을 쓰겠다고 했었으나 쓰지 못하고 말았다)로군요."
"그 세르반테스도 오래전부터 내 친구지.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 사람은 노래보다 속세의 고생에 더 익숙한 사람이야. 그 책 속에는 약간 기대할 만한 구석도 있지. 무엇을 내놓고 아무런 결말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말야. 마땅히 있어야 할 속편이나 기다릴 수밖에는. 약간 손질만 하면 지금은 못 받고 있는 인기도 얻을 수 있을 거야. 자, 그때까지 당신 집에다 간수해두시지." (64쪽)


모든 작가는 자기만의 문학사를 갖는다고 말한 것은 밀란 쿤데라였다. 세르반테스 또한 그것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발사와 신부의 검열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소설 속에 들어오는 순간 문제는 달라진다. 그것은 더 이상 작가 자신이 젖줄을 댄 사적인 문학사에 대한 장난스러운 언급이 아니다. 이발사와 신부라는(다소 자질이 의심스러운) 두 명의 검열관은 화형식을 통해 가치 있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분한다. 선택과 배제. 그들은 모든 시대의 비평가들이 그렇게 하듯,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공식적인(혹은 공익적인) 문학사를 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짝짝짝
나는 잠시 타이핑을 멈추고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그러니 뛰어난 안목과 냉철한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검열관과 비평가들을 도대체 누가 검열하고 비평할 것인지는 묻지 말기로 하자. 적어도 오늘은 적당한 날이 아니다. 어차피 밤이 오면 무지몽매한 가정부가 게으른 판관들을 대신해 남겨야 할 책과 그렇지 않은 책들을 가리지 않고 몽땅 태워버릴 예정이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태운다 한들 이미 읽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돈 끼호떼는 이미 읽어버린 사람이다. 독자, 그것도 미친 독자다. 뒤늦게 잠에서 깨어나 온 벽에다 칼질을 하며 건재함을 과시하던 돈 끼호떼는 자신의 소장도서가 사악한 마술사에 의해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놀라지 않는다. 다만 그자의 이름이 '현인 무냐똔'이었다고 둘러대는 조카딸을 향해 침착하게 대꾸할 뿐이다. "그자는 아마 프레스똔이라고 말했을 게다." 그는 이미 읽었고, 읽은 것을 받아들였다. 검열은 그가 읽은 것을 오히려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뿐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돈 끼호떼는 두 번째의 출정을 나선다. 기사도 소설에 대한 공격, 혹은 패러디와 이별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돈 끼호떼의 모험은 더 이상 이야기 속 영웅들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답습이 아니다. 이발사와 신부라는 비평가(그리고 조카딸과 가정부라는 대중)에 의해 폐기된 어떤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살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것이다. 마치 세르반테스 자신의 소설이 그런 것처럼.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정신은 현재에만 고정되었다. 이 현재는 너무 넓고 방대한 것이어서 우리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해 버린다. 이 같은 체계에 휩쓸려 있는 소설은 더 이상 '작품'(영속하게 하는 것, 과거를 미래에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는 시사적인 사건이며, 내일 없는 몸짓일 뿐이다. (<소설의 기술>(밀란 쿤데라 지음, 권오룡 옮김, 민음사 펴냄), 34쪽)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돈 끼호떼의 모험은 세르반테스 자신의 창작 과정에 대한 은유라고. 위대한 선배들이 갔던 영웅적인 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때론 우스꽝스러운 형식으로 되풀이 하는 것. 그들이 남긴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채, 그저 새롭게 반복하는 것 — 근대 문학의 시작을 알린 <돈 끼호떼>는 바로 그렇게 탄생했다.

우리는 아마 이 은유를 더욱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돈 끼호떼를 아예 작가라고 하는 건 어떤가. 허름한 주막을 성이라고 생각하고,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며, 익숙한 모든 사물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미친 독자가 작가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작가의 옆에 찰싹 붙어 때론 감탄하고, 대개는 이죽거리며 세상과 작가 사이의 (최소한의) 소통을 책임지고 있는 산초 빤사는 편집자라고 해야겠지. 그렇다면 돈 끼호떼가 한 번 보지도 못한 채 그토록 사모하는 둘씨네아 아가씨는 작품을 쓰는 작가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독자일 것이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10년 후 발표된 속편에서 마침내 마주친 둘씨네아에게 돈 끼호떼가 실망하는 장면, 산초가 돈 끼호떼를 달래기 위해 공주님이 나쁜 마법에 걸렸다고 둘러대는 장면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물론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나는 앞선 5장에서 예고했듯 "비난받을 두려움도,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이 돈 끼호떼의 이야기에 대해서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깡그리" 말하고 있을 뿐이다. 뭔가 그럴 듯한 것을 기대했다면 이 글은 이만 접고(이런, 벌써 이만큼이나 읽어버렸는데!) 훌륭한 선생님들이 남기신 주옥같은 글을 참고하시라.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김우창·유종호 옮김, 민음사 펴냄)나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강유나·이시연 옮김, 문학동네 펴냄) 같은 책들을. 리포트를 쓰거나 숙제를 하기에는 윌리엄 L. 랭어가 엮은 <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박상익 옮김, 푸른역사 펴냄) 중 H. R. 트레버‐로퍼가 쓴 '돈 키호테의 두 에스파냐'라는 꼭지가 적당하다. 비교적 적은 분량에 세르반테스의 약력과 당시 시대상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다.

돈 끼호떼와 산초 빤사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색다른 접근을 원한다면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김치수·송의경 옮김, 한길사 펴냄)을, 때론 포스트 모더니즘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돈 끼호떼>의 서술 기법에 대해서라면 로버트 스탬의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오세필·구종상 옮김, 한나래 펴냄)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그밖에도 <돈 끼호떼>를 다룬 많은, 정말 많은 글들이 있다.

▲ <픽션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나는 어쩌면 이 자리에서 우리의 '우수에 찬 얼굴의 기사'의 모험을 더욱 상세하게 기술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촉박한 마감과 게으름, 연재가 너무 늘어지는 게 아니냐는 '프레시안 books' 측의 압박(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들의 의견을 언제나 신뢰하는 편이며 별다른 불만도 갖고 있지 않으며 비록 매번 마감은 늦지만 언젠가 말했듯 그건 감사의 마음이 너무 큰 탓에 언제나 넙죽 엎드린 자세로 타이핑을 하기 때문이다)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보르헤스의 어느 단편을 읽어버렸기 때문이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짧은 이야기에서 보르헤스는 말 그대로 <돈 끼호떼>를 다시 쓴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쓰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 그 자체였다. 그가 원작을 기계적으로 옮겨 쓰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의 경탄스러운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모든 단어와 모든 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몇 페이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펴냄), 57쪽)

처음에 피에르 메냐르는 "스페인어를 열심히 배우고, 가톨릭 신앙에 귀의하고, 무어인들이나 터키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1602년부터 1918년까지의 유럽 역사를 잊어버리고,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이유로 그 계획을 포기해버린다.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 끼호떼>에 이르기보다는 피에르 메나르로 계속 존재하면서 피에르 메나르의 경험을 통해 <돈 끼호떼>에 이르는 것이 더 흥미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과연 어떻게?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소설 속 피에르 메나르는 <돈 끼호떼> 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일부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는 친구가 남긴 작품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글자상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더 '모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다.)
메나르의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비교해보면 이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가령 세르반테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 <돈키호테> 1부, 9장

'재치 넘치는 평민'인 세르반테스가 17세기에 쓴 이런 열거들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에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이다. 이런 생각은 어마어마하게 놀라운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동시대 사람인 메나르는 역사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현실의 기원으로 정의한다. 메나르에게 역사적 진실이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행위이다. 마지막 문장 —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이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 은 뻔뻔스럽게도 잘난 척하고 있다. (63쪽)

결국 보르헤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의 변화를 통해 무한한 의미를 창출해내는 일의 즐거움, 독서의 즐거움이다("메나르는 (아마 자기도 모르게) 새로운 기법 — 계획적인 시대착오와 잘못된 원저자 설정 — 을 통해 꼼꼼하고 흔적을 남기는 기술인 독서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나는 여기에 다소 고리타분한 서평가의 편견을 덧붙이고 싶다. 어떤 작품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말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작품 전체를 고스란히 다시 쓸 수밖에 없다. 한 권의 책을 타이핑하는 일은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더럽게 힘든 일이다. 당신은 정말 가련한 서평가에게 가욋돈을 주지도 않고 그런 일을 요구할 정도로 뻔뻔한 사람인가?

설마. 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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