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제주도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명이 학살을 당한 사건이었다.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을 거치는 기간 동안 진상조사를 위한 노력이 있기도 했다. 그 결과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4.3항쟁에서 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했고 이에 대해 공식 사과까지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논란 끝에 지난 3월 22일 임명된 남재준 국정원장은 제주 4.3항쟁을 '북의 지령에 의해 일어난 무장 폭동'이라며 매도했고, 박근혜 대통령은 4월 3일 있었던 제주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 <정치는 역사를 이길 수 없다>(김욱 지음, 개마고원 펴냄). ⓒ개마고원 |
김욱 교수는 5공 세력에 대한 김근태와 김대중의 태도,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문재인과 이정희의 사과, 복거일과 서정주, 박노자와 문부식을 호출하며 우리나라 역사를 종횡무진 한다. 그리고 사과와 이것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 힘에 대해 힘 있게 논증한다. 박근혜 대통령 시대를 살게 되어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이번 선거에서 박근혜는 "독재자를 찬양하면서 당선된 것이 아니다. 박근혜는 과거사에 대한 사과라는 나름의 대가를 치렀고, 유권자는 나름의 전리품을 얻었다"고 말한다. 역사의 전장에서 유권자가 얻은 이 칼자루를 과소평가 하지 말라는 주문을 하는 것이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 시대를 살게 된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또 아직은 힘이 미약한 진보신당 소속 지방의원으로서 김욱 교수의 이 결론적 논지에 대부분 동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증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그가 지난 대선 전 김대중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광주·전남 핵심당원 간담회에 참석한 문재인 후보가 노무현 정부 시절의 분당 사태에 대해 사과한 것을 두고 한 평가에 대해서는 박근혜의 사과와 같이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김욱 교수는 박근혜가 박정희를 부정함으로써 정체성을 부정한 것에 놀랐고, 문재인이 분당 사과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규정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한 것에 또한 놀랐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사과는 모두 우리가 긍정해야 하는 어떤 역사적 힘에 의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박근혜의 사과는 '유권자의 전리품'이라고 평가했고, 문재인의 사과는 '호남' 유권자의 힘이었으며 따라서 '호남은 스스로를 지켜야'한다고 강변한다.
나는 문재인의 '분당에 대한 사과'를 보며 저물어가는 우리나라 제1야당에 대한 연민이 생길 정도였다. '호남 민주당=영남의 한나라당'이라는 말이 있다. 지역 토호에 의해 장악되어 있고, 재개발과 재건축을 비롯한 토건 사업에 적극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내부 민주주의의 정도는 일천하다. 총선과 지방선거 후보를 대의원들이 선출하지만 그 대의원은 다시 총선 후보인 당협위원장이 사실상 임명하는 구조이다. 부패의 정도라는 측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런 당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당시에 매우 신선하게 평가되었던 진보정당(당시에는 민주노동당)의 진성당원 제도를 벤치마킹 하여 기간당원제도를 하자는 것이 열린우리당의 입장이었다.
이것이 실패하여 다시 두 당이 통합을 하였고 통합된 당의 대통령 후보가 한때 버려졌던 지역의 당심을 얻기 위해 정치적 사과를 한 것을 두고 '역사의 전리품'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나로서는 아전인수라고 볼 수밖에 없다. 유신 독재에 목숨으로 항거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고작 독재자의 딸이 당선되기 위해 내뱉은 유신 사과 발언을 역사적 '전리품'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초라한 성적표야 우리가 발 딛은 현실이라고 인정할 수 있지만, 호남 민주당 당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문재인이 한 사과는 호남 민주당 열성 당원들의 전리품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현재적 역사의 전장인 정치에서 역사가 취해야 할 전리품에도 품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욱 교수의 책이 정치인의 행위에 대해 비판적이듯 이 책 또한 비판적으로 읽혀지기 바란다. 얼마 전 김근태의 평전을 읽었다며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대학 1학년 사촌 동생에게 김욱 교수의 이 책도 읽어 보라고 권했다. 이제 좀 더 자유롭게 사회를 사유하게 될 그가 이 책을 통해 우리 역사와 정치에 대해서 보다 긍정적이면서도 비판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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