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소개하는 <스페이스 비글 (The Voyage of the Space Beagle)>(조윤경 옮김, 모음사 펴냄)은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평을 들었던 작가 알프레드 엘튼 반 보그트의 작품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스페이스 비글'은 다윈의 비글 호에서 따 온 우주선의 이름이다. 이 우주선에는 180여명의 남자들만(!) 타고 있다. 그들은 군사, 과학, 역사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다. 주인공인 엘리엇 그로스브너 한 명만 제외하고서.
스페이스 비글의 탑승자들은 총 4종의 외계 생명체와 접촉하고 그때마다 위기에 처한다. 넷 중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문자 그대로 '괴물'이다. 흑표범처럼 생긴 생명체 '쿠알'은 어깨에 달린 더듬이로 금속벽을 부수고 돌아다닌다. 이전 세대 우주의 지배 종족이었다는 '익스틀'은 신체의 분자구조를 바꿔서 우주선 안의 격벽을 마음대로 뚫고 다니면서 인간을 숙주 삼아 그 몸 안에 알을 낳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와 간접적인 저작권 문제가 있었다.)
지적인 정예만 모아 놓았다는 스페이스 비글의 탑승자들은 이런 괴물을 맞아 멋지게 활약하기는커녕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학문의 전문가들이라고는 하지만 하나같이 융통성이 부족하고 현실의 문제 앞에서는 탁상공론만 되풀이한다. 이때 주인공인 그로스브너가 활약한다. 그로스브너는 'Nexialism' 이라는 가상의 학문을 수료한 사람이다. 국내에서는 이를 '정보종합학'으로 번역해 놓았다. 정보종합학은 여러 전문 분야에서 상황에 맞는 지식만 추려 제대로 활용하는 학문이다(참 쉽죠?). 스페이스 비글 호의 전문가들은 정보종합학을 학문으로 취급하지도 않지만, 결국 외계 지성체와 만나고 위기가 닥쳐오면 해결하는 것은 그로스브너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그로스브너는 1인 영웅이다. 그것도 외계 행성에서 태어나 머리는 나쁘고 우직하지만 지구를 거꾸로 돌릴 만큼 힘이 좋은 영웅이 아니라 지능형 영웅이다. 바보 같은 동료들이 방해하려들지만 영웅은 아랑곳하지 않고 괴물을 무찌른다. 우주선은 끝내 안전했다.
이 작품은 4개의 중단편을 엮은 장편
▲ <스페이스 비글>(알프레드 엘튼 보그트 지음, 조윤경 옮김, 모음사 펴냄). ⓒ모음사 |
보그트는 '초인'이라는 소재를 선호했다. 그의 대표작인
괴물을 물리치는 SF 모험물 하나를 놓고 뭐 그리 말이 많으냐고 하기 전에, 스페이스 비글 호의 안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그로스브너는 우주선 내의 역사학자와 줄곧 토론을 이어간다. 역사학자는 문명 단계설을 소개한다.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종족은 필수적으로 정해진 단계를 따른다는 이론이다. 물론 이 이론은 개연성을 높이고 독자의 이해를 돕는 장치이다. 작중 인류는 외계 생물의 속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외계 생물의 반응을 예측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고, 이 작품에서는 문명 단계설이 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작품 바깥에서 보면 어떨까. 우리가 사는 이 우주 안의 문명이 대략 같은 길을 걷는다는 발상은 SF만의 것이 아니다. 칼 세이건이나 스티븐 호킹도 그와 같은 가정 하에 토론을 펼친 바 있지만, 이런 관점은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일지도 모른다. 외계 생물이 우리와 같은 신진대사를 가질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구조와 기제가 다르면 사고도 다를지 모른다. 그러므로 문명 단계설은 역사적 지식으로 세계를 쉽게 판단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세계를 완전히 오해할 위험도 함께 제공하는 설정이다(이에 대해서 최근에 유행하는 주장은 조금 다르지만 이 얘기는 다음 기회에).
여기에 문제의 마지막 장이 한 획을 더한다. 최후에 접하는 외계 생물 '애너비스'는 존재한다는 물리적 증거 자체가 없다. 그 존재를 연역해 낸 것은 오직 그로스브너 뿐이다. 근거가 없어 그의 주장은 기각되지만 그로스브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총동원해서 우주선의 지휘권을 손에 넣는다(실은 단순히 지휘권을 장악하는 이상의 일을 저지른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키아벨리즘을 따른다. 그로스브너는 옳다. 정보종합학을 통해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과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면 냉혹한 현실의 우주에서는 다수결이 최고의 결정 방법일까? 그렇지 않다면 옳고 그름은 어떻게, 누가 결정하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상황에서는? 상황의 절박함이 결정 방법의 정당성을 바꾸는 걸까? 그러면 그 경계는 어디인가. 물론 이 케케묵은 문제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보그트는 <스페이스 비글> 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범인과 초인을 대립시킨다. 그 구성과 기법이 조악하다는 이유로 엄청난 악평을 듣기도 했고 영감의 원천이라는 찬사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보그트의 작품들이 조잡하게 세운 가건물이라는 데에 한 표를 던진다. 앞서 보인 요소들이 그 예에 해당한다. 하지만 <스페이스 비글>은 기본적으로 괴물 퇴치 무용담이기 때문에 그런 단점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괴물과의 대결 자체는 발표 연도가 무색할 만큼 세련미가 있다. 괴물을 관람하고 영웅 주인공과 독자 자신을 잠깐이나마 동일시하며 우월감에 젖어 보기에는 이보다 효율적인 작품이 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시 어른과 아이의 이야기. SF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 무엇도 답을 주지 않는다. 하나의 문구, 하나의 용어, 꽉 닫힌 귀와 눈이 답으로 인도한다고 믿는 사람이야말로 '아이'다. 좋은 SF를 가늠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으뜸가는 것은 '생각해 볼 단초를 제공하느냐'가 아닐까 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스페이스 비글>과 보그트의 여타 작품들은, 조립품으로서 마감은 부실하지만 좋은 SF라고 할 수 있겠다.
(사족 ; <스페이스 비글>이 마음에 들었다면 보그트의 단편 <괴물(The Monster 또는 Resurrection)>을 반드시 읽어보기 바란다. 이 정도의 분량으로 문명과 역사와 미래를 관통하는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의 여러 SF 단편집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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