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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에 눈먼 자유주의자, "연대? 그런 거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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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에 눈먼 자유주의자, "연대? 그런 거 몰라!"

[프레시안 books] <포스너가 본 신자유주의의 위기>

첫사랑은 영원하다. 이탈리아 영화 <시네마 천국>(쥬세페 토르나토레, 1988년)의 먹먹한 노스탤지어를 나는 잊지 못한다. 주인공 토토가 시칠리아를 떠난 뒤, '고향은 타향이 되고 타향이 고향이 될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다. 하루하루의 분망함에 치이며 새 삶에 정신없이 휩쓸리지만, 첫사랑은 마술적으로 토토의 내면을 규정한다. 토토의 서사는 보편적이다. 영화의 막이 내린 후 이십년 동안 내가 했던 것 또한 첫사랑을 반복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토토에게 '엘레나'는 하나의 상징이다. 실재하는 인물의 비릿한 잇속과 어쩔 수 없는 비루함은 상징화의 과정에서 사라지고, 순결한 미감과 후회, 죄의식이 뒤섞여 이상화된 이미지의 화석만이 마음속에 남게 된다. 스스로의 삶에서 이중성과 속물스러움에 넌더리가 난 우리가, 이런 이상향의 상징이라도 없다면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준 나의 '엘레나'는 누구였을까. 또는 무엇이었을까.

▲ <포스너가 본 신자유주의의 위기>(리처드 포스너 지음, 김규진·김지욱·박동철 옮김, 한울 펴냄). ⓒ한울
이번에 쓰게 된 서평의 대상은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 교수이자 미 연방 제7 항소법원 판사인 리처드 포스너의 책 <포스너가 본 신자유주의의 위기>(김규진·김지욱·박동철 옮김, 한울 펴냄)이다.

포스너는 법경제학의 개척자로 잘 알려졌다. 그는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시장에 대한 자유방임이 최선의 성과를 보장한다는 신념을 견지한다. 낙태나 동성애, 플리바기닝과 배심제도까지, 법적 문제에서 타당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도 경제적 효율성이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저자의 '자유시장 신앙'이 폐기된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그럴 만큼 저자는 미국 금융 시장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포스너 같은 사람도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해 큰 혼란을 겪고, 결국 전향을 하고 만 건가?' 하는 오해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 법. 끝까지 책을 읽고 나서야 저자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혼란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 아니었더라면 해결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 저자의 첫사랑은 '시민의 자유'라는 역사적 관념이다.

엘리트 시민민주주의자의 혼란

착실한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도통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게다가 빼어난 능력과 인품을 갖춘 일관성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비판을 작정하고 책을 펼쳤으나 행간에서 내가 읽어 낸 것은 그의 일관된 신중함과 치밀한 탐구와 치열한 자기 성찰이었다.

게다가 저자는, 누구보다 성실히 시장의 실패를 논증한다. 시장과 기업에 친화적인 법경제학을 주창하던 그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에 닥친 세계 경제의 흐름을 '공황'으로 규정하고, 그 주된 책임이 정부가 아닌 민간 부문에 있다고 단언한다. 그뿐 아니라, 문제의 기원이 금융 산업에 대한 규제 축소였음을 정면으로 인정한다.

"실패의 씨앗은 1970년대에 은행과 신용에 대한 규제 축소를 추진하면서 뿌려졌다. 실패의 씨앗이 싹튼 것은 클린턴 대통령 행정부 때였는데, 그 사이에 주택 거품이 시작되고, '글래스 스티걸법(Glass Steagall Act, 상업은행을 투자은행으로부터 분리한 법)' 폐지로 은행 규제 완화가 절정에 이르렀으며, 신종 금융 상품, 특히 신용부도스와프를 선물거래소의 규제 하에 두지 않기로 결정했다." (211쪽)

그러나 저자는, 시장에 대항하는 연대(solidarity)의 정당화를 끝끝내 거부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엘리트주의적 자유주의자이다. '자유시장의 완전성' 신앙을 의심하게 되었어도 여전히 그렇다. 왜냐하면 연대를 거부한다는 것은 시장의 교정을 정치와 무관한 과학적 과업으로 남겨 두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약자와 민중의 역량에 대한 불신이 그를 자유주의자로 머물게 한다. 이점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공황의) 한 가지 밝은 측면은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이 여론재판에서 두들겨 맞았다는 사실이다. 전미자동차노동조합은 '숙주를 죽이는 기생 동물' 또는 달리 비유해서 '공멸을 향해 공룡 회사와 싸우는 공룡 노조'로 불렸다. 이러한 비난은 너무 거친 표현이다. 대립적인 노동조합이 장기적으로 몰락함으로써, 노동조합들이 작업안전 제고, 상급자의 횡포 방지 등 노사의 공동 이익에 집중하고, 기업의 생산성이 증가했다." (178쪽)

이쯤 되면 "지구의 멸망을 상상하긴 쉬워도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데에는 형편없이 무능한 동시대인들의 닫힌 현실 인식"(<폐허에서 꿈꾸다>(남진우 지음, 문학동네 펴냄) 10쪽)이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이 책 곳곳에서 엿볼 수 있는 저자의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그가 마음속에 순진한 믿음으로 가꾸어 왔던 첫사랑의 유토피아적 열망-자유롭고 뛰어난 시민이 만드는 공정한 경쟁 시장-이 그려낸 네거티브 이미지(음화)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포스너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엘리트 시민만을 위한 것이다. 뭉치지 않아도 충분히 강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 말이다. 그렇게 저자는 '민주주의를 믿지 못하는 민주주의자'로 남게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믿지 못하는 민주주의자, 즉 '약자의 연대를 반칙으로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자'란 형용 모순이다.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오직 지배자만 자유로운 것을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본질과 소유권

포스너는 이 책의 곳곳에서, 냉철한 자기 성찰의 전범을 보여준다. 그런 그가 왜 보편적 민주주의-약자의 연대를 통한 민주주의 내실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이유라면 이미 언급했다. '시민의 자유'라는 역사적 관념이, 저자의 마음속에 첫사랑처럼 상징적 도그마로 박혀 있기 때문이다. 무산자의 연대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말에 저자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곤혹스러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근대적 자유'라는 관념 자체가 연대한 시민의 힘에 의해 쟁취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근대 시민들은 그리고 현대의 자유주의자는, '시민의 연대는 정의롭지만 무산자의 연대는 부정하다'라는 명제를 정당화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했다. 그리고 그 답은 '절대적 소유권'에서 나왔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는, '국가의 억압에 대한 공포'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누적된 모순이 처음으로 시민혁명으로 폭발한 곳은 인신의 자유와 절대적 소유권이라는 두 이상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우연으로 인해, 소유권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지켜주는 근원이 되었다.

한편, 근대철학 역시 시민혁명의 스펙터클에 압도당했다. 그러므로 근대철학이 소유권으로부터 자유의 관념을 구성하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자유라는 새로운 관념을 규정하는 과제가 근대철학 앞에 던져졌을 때, 프랑스 혁명의 철학적 해석자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핵심을 선명하게 요약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김상봉 지음, 꾸리에 펴냄) 103쪽 참고) : 자기가 소유한 재산은 자유의 으뜸가는 현실존재로서 본질적인 목적 그 자체이다.

이렇게 소유권이 신격화되고, 시민혁명에 참여했던 무산계급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장하자 '근대적 자유권'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국가로부터의 침해뿐 아니라-타인의 부당한 침해로부터도 소유권을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했다. 따라서 소유의 현재 상태에 대한 무산자들의 항의마저 '부당한' 침해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자유주의는 노동계급의 연대를 죄악시하게 되었다.

약자의 연대와 민주주의의 민주화

저자 외에도, '자유시장의 완전성'을 의심하게 되었지만 진보적 민주주의의 과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다. 대표적으로 거시경제학의 창시자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년)를 들 수 있다. 그는 1925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자기를 자유주의자로 볼 수 있을지를 물었다.

"① 최대한 평화를 추구한다. ② 민주주의의 원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자율적인 기업과 행정기관들에게 권력을 분산한다. ③ 피임, 혼인법 완화,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 여성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추구한다. ④ 마약, 알코올, 도박 등은 금지만이 능사가 아니다. ⑤ 경제적 세력들을 사회정의와 사회 안정이라는 관점에서 통제한다." (박동천,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폴리테이아 펴냄) 171쪽 참조)

케인즈나 포스너 등의 자유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를 가르는 경계선은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작용하는 영역에 대한 이해다. 이들은 정치적 민주주의 원리와 경제적 시장 원리를 명확히 구분되는 것으로 생각하므로,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 정치적 민주주의가 다치지 않도록 지키면 족한 것이다. 이들에게 시장의 교정이란 민주주의와 무관하고, 과학적 전문성이 존중받아야 할 중립적 영역이다. 시장에 대한 정부 개입은, 공명정대하고 사명감에 불타는 전문가·공무원·엘리트의 소관일 뿐이다. (고세훈,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128쪽 참조) 그래서 이들에게는 노동자의 연대에 대한 우호적 시각을 기대할 수 없다. 그 결과, 경제적 불평등 앞에서도 공동체는 약화되고 개인은 파편화된다.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에만 작용하는 원리로 남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내실화를 위해서는 무산자의 연대가 필요하다. 특히 연대가 가장 절실한 영역은 '기업'이다. 그 이유를 이제는 모두가 안다. 왜냐하면 지난 수십 년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사무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 시장은 민주적인 곳이 아니다. 특히 기업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곳이다.

저자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지금 우리가 겪는 공황의 책임은 민간 부문에서 비롯된 것이다(210쪽). 그러나 자유주의적 사고에 갇혀 있는 한, 민주적 통제는 생산과 기업에 미치지 않는다. 우리를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하고 가정을 희생해서라도 일에 매달리도록 강요하는 주체는 엄연히 기업인데 말이다.

따라서 경제 영역 전체, 그러니까 생산과 소비 모두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바라는 최소한-소비와 구매력을 유지시키려는 복지 국가적 재분배 체제-마저도 지켜내지 못한다. 생산 영역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기업이므로 생산의 민주화는 기업 자체의 민주화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기업의 민주화가 지향하는 바는, 노동자까지도 민주적 기업의 떳떳한 구성원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는 약자의 연대를 통해서 말이다.

이것을 민주주의의 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보수정치에 의해 정치의 영역에 포박당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정치와 경제 모두를 아우르는 공화국의 지도이념으로 높이 세우는 작업이 될 것이니 말이다. (고세훈,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134쪽 참조)

이상향에 깃든 저마다의 첫사랑

저자인 리처드 포스너는 선의가 넘치는 탁월한 자유주의자다. 그러나 그처럼 눈이 밝은 사람까지 '노동조합에 의한 시장 왜곡'을 말한다. 여기서 '근대적 의미의 시민의 자유'가 마치 첫사랑처럼, 마술적으로 저자의 내면을 규정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근로자 자유선택법(Employee Free Choice Act)' 등 노조를 강화하는 조치를 막음으로써 공정성을 기하면, 시장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저자는 믿는다. (178쪽)

그러나 저자는 틀렸다. 국가든 시장이든 기업이든,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무너지는 곳에서는 민주주의만이 희망이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치이고 우리시대에 유일하게 정당한 정치원리는 민주주의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시장 및 기업과 격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업에서도 민주주의 원리가 관철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노동자의 연대, 즉 노동조합의 강화일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적 표현을 빌리자면, 기업 역시 노동자를 시민으로 복권시키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일들이 가능하게 된 후에야, 우리 공동체는 스스로의 민주주의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첫사랑의 상징을 떠나지 못하는 유한한 인간과 그의 사고를 미워할 수 없다. 젊었던 시절, 저자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이상향의 모습이 나의 것과 다를 뿐이니까. 첫사랑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 모두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지 않아도 첫사랑은 그저 존재하며 나를 규정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자유주의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대립과 경쟁을 겪을 수는 있지만, 섬멸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경쟁의 황금률은 결국 '공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18세기 위대한 혁명가들은 그들의 피를 바쳐 후세 인류에게 자유를 선물했다. 자유주의의 희생과 투쟁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주권재민의 정치적 자유는 없었을 것이다. 내 몸과 내 재산에 대한 기본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진보에 한계가 있다는 말은 자유주의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말과 다르다. 18세기 자유주의 혁명과 그 후예인 엘리트 시민민주주의로부터 빚지지 않은 진보는 상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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