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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패거리의 노예! '진짜 협력'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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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패거리의 노예! '진짜 협력' 가능할까?

[참 공동체를 위하여] 리차드 세넷의 <투게더>

바야흐로 공동체의 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별다른 성과나 업적을 찾아보기 힘들 듯한 지난 18대 국회의 가장 두드러진 기여로 협동조합 기본법의 개정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협동조합 빅뱅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협동조합이 이른바 "착한 경제"의 핵심이고, 협동조합이야말로 시장과 화폐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좋은 무기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협동조합에 대한 정교하고 치밀한 분석이나 냉철한 판단을 논외로 하지만, 협동조합의 시대를 바라보는 나의 개인적인 소회는 이렇다.

"이것은 오웬, 생시몽, 그리고 소렐 등의 사후 복수인가?" 과거 마르크스의 거대하고 강력한 자기장 속에서 대학 시절을 겪었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이분법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꽤나 유치한 추론이지만, 마르크스가 좋다고 했던 것은 바른 것이요,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사람들은 나쁘다는 식의 구분 말이다. (한마디로 "빨간 것은 좋은 것이요, 파란 것 아니 분홍색조차 나쁘다"는 식의 발상이다.) 사실 나 자신이 이후 오웬이나 생시몽 그리고 마르크스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프루동의 글들을 보고 꽤나 큰 감명을 받았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분법의 과거 때문에 재삼 얼굴이 달아오를 지경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 혹은 "소비에트 민주주의"와 같이 참여적이며 자발적인 아래로부터의 전통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로 존재했던 국가 사회주의의 지울 수 없는 슬프고 긴 역사와의 저울질에서 전자가 "진정한 전통"이라는 주장은 (죄송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워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 <투게더>(리처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 ⓒ현암사
<투게더>(리처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현암사 펴냄)의 서두에도 등장하지만. 위로부터 구축되는 연대 혹은 정치적 협력과 협력의 정치는 명백히 다른 것이고 이는 현실의 운동과 정치 속에서 계속 충돌한 지점이기도 하다. 좌파 내에서 본다면, 저자 리처드 세넷은 이를 정치적인 좌파와 사회적인 좌파로 구분해 설명한다. 용어를 쓰는 방식에 다소의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겠지만 그 의도는 짐작 가능하다.

이를테면 연대 혹은 정치적 협력이란 이쪽의 수장과 저쪽의 수장이 만나서 서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논의하고 이에 대한 합의에 기반을 두고 이를 각자의 조직에서 관철시켜 나가는 과정이다. 양당 간의 담판을, 아니면 노조측과 사측의 양보 없는 협상을 떠올려도 좋겠다. 세넷은 이러한 위로부터의 과정 대신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것들을 칭해 (진정한) 협력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듯싶다. 그리고 이러한 협력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건과 실행의 계획을 "협력의 정치"라고 부른다.

이렇게 협력을 정의하고 나면, 당연히 이상적인 작업장을 세세하게 구상했던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이 자연스레 시야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지금 봐도 공상적인 대목이 없지는 않지만, 그는 중앙의 권위 없이 아래에서 조직되고 노동 현장인 작업장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상호적 감정이 이상적인 사회의 궁극적인 미시적인 기초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아울러 이러한 시야에서 보면 지역 사회의 다양한 활동과 다기의 운동 역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빈민 출신이라고 밝히는 세넷은 자신이 경험했던 시카고의 헐 하우스 복지관을 회고하며, 이러한 생기 있는 지역의 중심은 빈민과 약자가 홀로 떨어져 나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물에 빠진 사람이 계속 떠 있을 수 있게 해주는 구명조끼 같은 셈이다. 이렇듯 아래에서 자생적,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공동체와 그 활동 거점은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이렇게 출발한 그의 책은 현대 자본주의 풍파가 어떻게 협력의 조건과 문화를 약화시켰는지를 길게 다룬 후 마지막 장을 참 공동체성에 길게 할애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넷이 <투게더>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제시한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는 로버트 퍼트넘의 유명한 "홀로 하는 볼링" 명제와 닿아 있다. 현대 사회가 고도화됨에 따라서 사람들 사이에는 (좌파와 우파를 떠나서) 뭉침에 근거한 협력의 기반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의 소속-지역사회이건 다른 무엇이건 간에-에 덜 의존하게 되고 모든 것을 혼자 하려는 성향을 지니게 된다.

그의 두 번째 문제의식은 책의 서두에 나온 에피소드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그의 손자가 학교에서 겪은 일인데, 몇몇 아이들이 자신들의 반항심을 표출하는 계기로 학교 방송으로 외설적인 노래를 튼 사건이다. 이 대목에서는 폐쇄적인 공동체성, 즉 부족주의에 대한 그의 근심이 작동하고 있다.

사실 이 두 개의 문제의식은 다소 상충하고 모순되는 면이 있다. 전자가 공동체 혹은 소속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공동체 혹은 어떤 종류의 소속이 휘두를 수 있는 심대한 악영향에 대한 세넷의 염려를 보여준다.

사실 세넷은 책에서 이 둘을 계속 구분하고자 한다. 즉 인간의 충만함을 완성시키는 참 공동체성과 그 안에서의 협력은 편협함에 갇혀 자신의 이익에 매몰되는 이기적인 부족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3부 '협력의 강화'에서 협력에 대해 길게 서술한 바에 따르면, 인간은 공동체와 그 내부에서 수행하는 어떤 종류의 올바른 작업-물론 이 작업은 심신의 합일을 추구하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다-을 통해 어딘가에 속해 누군가와 함께 비로소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조금 세속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일을 하면서 좋은 깨달음을 얻는 그런 충일의 삶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의 조건이 갖춰질 때 가장 넓고 궁극적인 의미의 "협력"이 가능하다.

협력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 것이라면, 비록 복잡하긴 해도 "지역 공동체는 질 높은 삶을 추구하는 무대"인 셈이다. 세넷은 한나 아렌트의 공동체가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정치적인 결사이자 소명이었을 뿐 빈민들이 직접 경험하는 그런 종류의 공동체는 아니었다고 지적하며, 자신의 공동체란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이 대목을 읽다가 나는 어쩔 수 없이 존 레논의 걸작 '이매진(imagine)'을 떠올렸다. 존 레논은 국가/소유/종교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자고 낮게 읊조린다. 그러면 서로가 증오하고 죽일 이유도 없지 않겠냐고. 사실 이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다고. 그렇게 넌지시 감정의 옷소매를 잡아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노래가 끝난 후 이 초월적인 동포주의의 감동을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그래, 국경이란 없는 거야' 라는 깨달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국가 대표 축구 경기에 열광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실상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크고 작은 파당과 모임들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는 퇴임한 그 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내가 나온 그 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그럴 리 없고, 우리 고향 사람은 대부분 선한 사람이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이미 공동체의 노예나 다름없다. 우리 모두는 여전히 부족민에 불과하고 어쩔 수 없이 생래적 민족주의자다. 그렇다면 세넷이 이야기하는, 인간을 충만하게 하는 그 연결과 상호작용이 넘치는 공동체란 무엇이고 어디에 있다는 말일까?

비록 세넷과 같은 풍부한 현실 감각이나 통찰에 기댄 것은 아니지만 내가 연구해 온 "협력의 진화"라는 분야에서 이러한 집단성, 공동체성 혹은 부족주의의 문제는 각별한 중요성과 치열한 논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요컨대, 집단의 문제는 협력의 진화라는 연구 주제에서 사회생물학자들 특히 해밀턴을 계승한 수많은 학자들과 집단 선택을 옹호하는 진영 사이에 가장 치열한 전장이기도 하다.

논쟁의 막후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생물학적인 전통에서 집단 선택, 즉 개체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일은, 우리의 일상적 추측과 달리 힘들다.(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선택을 관장하는 것은 오직 개체,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동물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유전자일 뿐이다.

그런데 이에 반기를 든 입장이 이른바 다수준 선별(multi-level selection)이다. 개체의 이동성이 어떤 이유에서건 제한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닌 개체들이 함께 일정한 지역에 모이게 될 것이고, 상대적인 안정성을 지닌 일종의 서식지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서식지에 기반을 둔 군집이 여러 개 생겨나면, 이들 사이의 가용 자원들을 둘러싼 경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는 군집 혹은 부족 사이의 경쟁으로 나아간다.

A라는 부족에는 주로 이기적인 개체들이 모여 있다고 하자. A 부족 내에서만 보면 이러한 이기적인 성향은 경쟁에서는 꽤나 유리한 덕목이 된다. 따라서 A 내부에서 이기적인 성향은 빠르게 퍼져 나갈 것이고, 별다른 외부적 충격이 없는 이상 A 부족은 곧 이기적인 성향이 지배하는 부족이 될 것이다. 반면 B라는 부족에서는 A보다는 이타적인 성향이 많이 생존하게 되었다고 간주하자. (예컨대, 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뛰어난 이데올로기를 발명한 누군가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가용 자원을 둘러싸고 A와 B가 경쟁하게 될 때, 당연히 이타적인 인자를 많이 보유한 B 부족이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선별이 (어떤 이유에서건) 다양한 층위에서 발생하게 될 때 한 층위에서-개체라는 수준-유리함을 낳는 이기적 성향의 장점은 집단 간의 선별을 통해 누그러질 수 있게 된다.

만일 집단 간의 선별이 집단 내의 선별보다 조금 더 센 강도로 자주 진행된다고 해보자. 공동체 혹은 부족의 생존은, 이들이 자신이 속한 개체들을 얼마나 강한 호소력으로 묶을 수 있는지, 그리하여 그들의 이기성이 어떻게 극복되는지에 달린다. 비록 "협력의 진화"라는 평화로운 이름으로 다양한 이론적 탐구들을 통해 제기되었지만, 이는 사실 우리 주변에 널린 부족주의 혹은 패거리 문화의 핵심을 보여준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국가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했고,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민족국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전파된 전통은 그 주장과는 달리 대부분 누군가에 의해 비교적 근자에 발명된 허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국가의 호소력은 이 지구적 시대에조차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인맥, 학맥, 지역맥이 비난의 대상이 된지도 20~30년 이상 지났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러한 패거리의 구습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는 듯싶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후진적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중요한 교훈이 새롭게 재생된 집단선택론에 있을지 모른다. 집단선택론에 따른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패거리에 기반을 둔 부족민이고, 사실 그 점이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크게 기여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집단선택의 눈으로 보면, 다양한 공동체들이란 개체가 고유하게 지닌 이기심을 눌러주는 효과적인 틀이자 종교와 더불어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느 것보다도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를 제공한다. 그 이데올로기는 너무 당연하고 강력하여, 오히려 의식되지 않거나 그 정체를 의심하는 게 불편할 지경이다. 물론 우리는 이미 19세기 말 이래 민족주의라는 공동체 문화가 낳은 파괴적인 힘을 여러 번 겪어 왔기에 이를 중화시킬 필요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파괴적인 공동체성의 (조금이라도 효과를 지닌) 해독제는 무엇일까? 집단선택론이 주장하듯, 그리고 세넷이 책에서 힘주어 강조하는 바, 공동체란 현실에 뿌리내리고 사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무엇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넷이 은근히 암시하듯이 좋은 공동체성과 나쁜 패거리 부족주의를 구분하여, 좋은 공동체를 나쁜 공동체로부터 구해낼 수 있을까? 공동체가 주는 지행합일의 경험, 그리고 세넷이 체험하고 조사한 빈민 공동체의 사례는 정말 보편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것일까?

아쉽게도 세넷의 <투게더>는 이러한 난문들을 정면에서 상대하지는 않고 있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 그가 묘사하는 공동체의 덕목과 장점은 많은 대목에서는 퇴행적이라는 느낌마저 준다. 과연 현대의 거대한 조직사회, 노동사회에서 이러한 공동체성을 경험할 기회는 얼마나 고르게 제대로 주어질 수 있을까? 물론 그의 전작 <장인>(김홍식 옮김, 21세기북스 펴냄)을 생각하면 이러한 웅변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숨어있는 오래된 진리나 미처 보지 못한 낙원이, 이미 패거리 부족주의로 깊게 오염된, 그래서 오늘도 피 튀기는 분쟁과 싸움을 일으키는 현실에 대한 적절한 해독제인지는 솔직히 의심스럽다. 물론 이 답은 창백한 이론이 아니라 푸르른 "현실"에서 찾아지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문제점을 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세넷은 협력이 쇠퇴한 이유로 불평등의 심화와 금융의 발흥 이후로 급속하게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노동의 경험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국면적인' 원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스스로 직접 경험했던 바처럼 높은 수준의 공동체성과 이를 통한 협력의 경험이 불과 50년 전의 자본주의에서 가능했다면, 현재 자본주의로 올수록 왜 이러한 성향이 그토록 급속하게 약화되었는지에 대한 해명은 지금보다는 세심하고 정교한 형태로 진행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둘째, 자연의 협력을 논하고 있는 책의 두 번째 장은 몹시 피상적이다. 번역의 문제일지 모르겠지만, "맞대응(Tit-For-Tat)" 전략으로 유명한 정치학자이자 사회과학자인 로버트 액셀로드(Robert Axelrod)를 동물행동학자로 무심하게 서술한 부분이나, 문화·지역·시장 등 다양한 경험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는 협력의 문화에 오랫동안 천착해온 심리학자 조지프 헨리히(Joseph Henrich)에 대해 비용-편익을 따진다는 이유로 노골적인 거부감을 나타내는 태도는 그리 석학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최근에 작게 개봉하고 간판을 내린 영화 <헌트(Hunt)>는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공동체조차도 작은 소통의 잡음에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이상적으로 운용되던 공동체라도 아주 작은 잡음으로 붕괴에 가까운 커다란 시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공동체를 규정하는 규칙 자체를 공동체가 정하게 된다는 재귀적 속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러한 시련은 대부분의 경우 문제적 구성원을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는 것을 통해 극복되는 경향을 띤다. 세넷이라면 아마도 건강하고 투명한 소통-"대화적인 대화"라고 그는 적고 있다-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다시 소통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리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에 가깝다. 인간의 협력이 아직 닿지 못한 그곳, 진화에서 인간을 가장 성공적인 존재로 이끌었지만 어쩌면 인간이 지닌 가장 파괴적인 힘일지도 모를 그 부족주의에 사로 잡혀 있는 현실의 우리들에게 존 레논의 '이매진'은 너무 버거울지도 모른다.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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