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5일
4월 3일 새벽에 일어난 제주도 사태는 나흘 후에야 신문 지면에 나타났다. 4월 5일 시공관에서 열린 총선거촉진 대강연회에서 조병옥 경무부장의 연설 중 좌익분자들의 파괴 행동이 있었고 11개 경찰관서가 습격당했으며 경찰관 사망 4명 등 피해가 있었다는 내용이 4월 7일자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신문에 6일의 경무부 발표가 보도되었다.
"제주도에 또 좌익 폭동-사망 13, 부상 39, 물적 손해도 막대-경무부 발표"
최근 제주도에서 일어난 좌익 계열의 폭동에 대하여 6일 경무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지난 4월 3일 이래 제주도에서는 1947년 3·1 사건 이상의 불상사가 발생되어서 치안이 극도로 괴란되었다. 공산 계열의 파괴적 반민족적 분자들의 지도 아래 총기 수류탄 그 외 흉기를 가진 무뢰배들이 성군작당하여 경찰관서 기타 관공서의 습격 경찰 관리와 그 가족의 살해 선량한 동포 살해 방화 폭행과 약탈 등의 천인공노할 만행들을 마음대로 하여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구에 빠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총선거 등록 실시 사무를 정돈 상태에 빠트리고 있는데 인적 물적 손해는 다음과 같다.
경찰관서 습격 11개소 / 테러 11건 / 경찰관 피습 2건 / 경찰관 사망 4명 부상 7명 행방불명 3명 / 경찰관 가족 사망 1명 / 관공리 사망 1명 부상 2명 / 양민 사망 8명 부상 30명 / 전화선 절단 4개소 / 방화 경찰관서 3개소 양민가옥 6개소 / 도로 교량 파괴 9개소
"응원대를 급파-'양민은 발본 퇴치에 협력하라' 조 경무부장 담"
이상과 같은 사태에 비추어 경무부에서는 제주도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김정호 공안국장을 현지에 특파하는 동시에 전남에서 응원경찰대를 급파하여 진압 중에 있다. 제주도의 동포 여러분은 안심하시는 동시에 경찰과 적극 협력하여 그 망국도배들을 발본색원적으로 퇴치하여 제주 치안의 완벽을 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남조선의 그 외의 지역에 계신 동포들도 국제적 정세의 긴박함과 우리 민족의 역사적 위기에 당면한 사실을 똑바로 보아 자유스럽고 평화로운 사회적 환경에서 역사적 대사업인 총선거가 성공리에 끝마치도록 국립경찰에게 애국적 협력을 아끼지 말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7일)
4·3 봉기에 대한 '좌익 폭동' 규정은 발발 직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봉기가 어떤 모습으로 이뤄졌는지, <제민일보> 4·3 취재반의 보고 중 남원지서 습격 장면을 살펴보겠다. 봉기의 1차 표적은 경찰지서로, 도내 24개 지서 중 11개소가 3일 새벽 일제히 공격을 받았다.
그 무렵 남원지서에는 지서주임 정성순(성산 출신) 경사를 비롯해 고일수(성읍)-양성만(보목) 순경과 이북 출신인 정성용-조덕현 순경 등 5명의 경찰관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 전인 4월 1일부터 대동청년단 단원들이 '지서 협조원'이란 이름 아래 매일 밤 5명씩 번갈아가며 지서 경비를 거들고 있었다.
(…) 이날 남원지서의 피습으로 경찰관 고일수 순경과 민간인 방성화가 숨지고, 민간인 2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무장대는 앙심을 품었던 고일수 순경의 사체를 지서 밖으로 끌어내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화장시켰다. 무장대는 지서 무기고에서 미제 카빈총과 일제 99식 총, 그리고 탄알 등을 탈취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4·3은 말한다 2>(전예원 펴냄), 25~26쪽)
방성화가 무장대의 돌입 때 총에 맞은 것은 우연한 일이었던 반면 고일수의 참혹한 살해는 계획된 일이었다. 그는 앞서 무릉지서에 근무할 때 지난 회에서 이야기한 양은하 청년의 고문치사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무릉리에서 지낼 수 없게 되어 남원지서로 옮겨왔지만 남원리 봉기의 제1호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경관과 청년단원들의 피해 경위를 보면 고일수 같은 특별한 표적 외에는 꼭 죽일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무자 중 절반 가까이가 외지 출신인 것은 도내 어느 지서에서나 마찬가지였고, 제주와 서귀포의 경찰서에는 외지 출신이 더 많았다. 해방 당시 101명이던(일본인 50명, 조선인 51명) 제주도 경찰관 수는 지난해 3·1절 사건 때까지 330명으로 늘어나 있었는데 아직 현지인 비율이 높았다. 3월의 총파업 때 65명이 파면당했고, 그밖에 그만둔 사람까지 제주 출신 경찰관 100명 가까이가 경찰을 떠난 것으로 4·3 취재반은 추정했다. 그 후 제주도 경찰은 500명 선으로 증원되었고, 그 대부분은 육지 경찰에서 충원되었다.
경무부의 특별 조치로 운수관구를 비롯한 각 관구에서 항구적으로 취임할 경관 245명이 본도에 배치되어 수일 내로 내도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본도 현직 경관 260명을 합하여 정원 500명으로 증원된 것이며, 따라서 잔류한 응원대는 귀환하게 될 것이다. (<제주신보> 1947년 4월 28일, <4·3은 말한다 1>, 410쪽)
이때 철도경찰에서 옮겨온 한 사람의 증언을 4·3 취재반이 전해준다.
제주도에 파견 나간 응원 경찰과 교체할 지원 경찰을 모집한다기에 철도경찰들이 대거 지원했습니다. 1947년 4월 말 지원자들이 부산에 집결했는데 아마도 220명에 이르렀다고 기억합니다. 부산-제주 여객선 편으로 도착해 보니 주민들의 경찰에 대한 반감이 드세다는 것을 금방 느꼈습니다. 첫날 식사 대접도 받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요.
5월 6일부로 동료 철도경찰관 출신 9명과 함께 성산지서에 배속됐는데, 결국 지서에서는 철경 출신이 제주 출신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게 됐지요. 그런데 주민들이 셋방도 빌려주지 않고 식사 제공도 꺼려 한동안 애를 먹었습니다. 동료 가운데는 현지 사정에 적응치 못하고 휴가 간다면서 귀향해 버린 경찰관들도 있었습니다. (<4·3은 말한다 1>, 411쪽)
철도경찰, 즉 운수경찰에 관한 이야기는 1948년 1월 2일자 일기에서 한 일이 있다. 운수경찰은 경무부 아닌 운수부에 속해 있다가 1947년 3월 경무부로 이관되면서 조병옥의 경무부에 적응하는 데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특별수당을 붙여주면서 육지 경찰관 중 제주 전근자를 모집할 때 철도경찰 출신이 압도적 다수였다고 한다.
남원지서 외의 여러 지서 습격 상황을 훑어볼 때, 외지인 경찰관이라 해서 특별히 증오의 대상으로 여겨지지는 않은 것 같다. 전 해 3월의 '응원 경찰'에 비해 철도경찰 출신의 외지인 경찰관들은 제주도를 자기 근무지로 받아들이고 적응 노력을 기울인 결과일 것 같다.
경찰 '협조원'으로 활동하던 대동청년단(대청)에 대해서도 강한 적대감이 보이지 않는다. 대청단원 몇 명이 살해당했지만 대청 전체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개인적 문제로 보인다. 3·1절 사건 이전에 대부분 제주 청년들이 좌익이 아니라도 민청과 민애청에 참여했던 것처럼 사건 이후에는 이념과 관계없이 모두 대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경찰에 협조하는 것이 부득이한 일이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외가 서북청년단(서청)이었다. 서청이 테러 단체로서 특출한 성가를 누린 것은 그 '외인부대' 성격에 큰 이유가 있었다.
서청은 월남 청년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반공 성향을 가진데다가 룸펜 상태여서 동원이 쉬웠고, 대다수가 합숙 생활을 했기 때문에 기동력도 좋았다. 월남 청년들의 조직적 동원은 이북의 토지개혁으로 월남민이 늘어난 1946년 3월경부터 시작된 일이었는데, 1946년 11월말 서청 결성으로 그 조직력이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결성 직후부터 서청의 지방 진출이 활발했던 것은 그 외인부대 성격 덕분이었다. 고향 아닌 곳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체면에 구애됨 없이 무슨 짓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은 서울의 활동에서도 큰 강점이었는데, 이 강점이 지방에서는 더 두드러졌다. 현지 폭력배와는 차원이 다른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고, 또 다른 단체가 따라올 수 없는 결속력을 보인 것이 서청이었다. 이 강점이 제주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서청의 세력 확대에 따라 자금원도 확대되었다. 이북 출신 재산가와 극우 정치 세력의 지원으로 출발해서 군정청의 이권이 늘어났다. 정일형 인사행정처장, 오정수 상공부장, 이용설 보건후생부장, 이대위 노동부장 등 군정청의 이북 출신 간부들은 동향인에 대한 동정심에서라도 월남민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기화로 서청은 배급표의 부정 취득에서 적산 불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권을 확보했다.
배급표 과다 할당이란 소박한 단계에서 적산물자 불하라는 좀 더 과감한 대규모의 협잡을 통해 자금을 확보한 것이다. 서청 간부들은 이러한 협잡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미 군정청을 '건너마을 과방(果房)'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협잡에 김성주(사업부장, 섭외부장)가 큰 역할을 했다. 김성주는 "미군 장교와도 개별적인 선을 대어 소위 보급작전에서 많은 수확을 얻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물적 지원에도 비참한 서청원들의 생활은 "종내 갖가지 부작용, 즉 공갈행각을 수반했다."(임대식, '제주 4·3 항쟁과 우익 청년단', <제주 4·3 연구>, 215쪽)
대다수 서청 단원들은 서청의 조직화 후에도 룸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조직 활동만으로 생계를 안정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조직에 대한 봉사를 통해 조직원의 자격을 지킴으로써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생계를 위한 각종 불법 행위를 각자 모색했다. 서청의 지방 확산은 생계를 위한 불법행위의 공간을 넓히려는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이런 서청 단원들에게 제주도가 '기회의 땅'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왜 제주도가 다른 지역과 달리 큰 기회를 그들에게 주었는가? '원주민'의 권리를 무시해도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 사령관 이하 미군정의 당로자 대부분과 육지의 극우 세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여기고 있었다. 미국 개척기에 아메리카 원주민이 권리가 없는 존재였던 것처럼 제주도 주민들은 공권력의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입장에 있었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든 정착을 위해서든 1947년 이후의 제주도는 서청 단원들이 가장 쉽게 활동하는 지역이 되었다.
물론 제주도민의 불리한 입장과 서청의 발호는 4·3 발발 이후 크게 악화된 문제였다. 그러나 1947년 11월에 서청 제주지부가 설립된 사실과 4·3 봉기에서 서청 숙소가 지서 다음으로 뚜렷한 표적이 된 사실로 보아 문제가 이미 상당히 자라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3 취재반은 4·3 봉기 이전 서청의 활동 양상을 이렇게 서술했다.
서청 제주도지부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47년 11월 2일의 일이었다. (…) 그러나 그 이전에 적지 않은 서청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민심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이북에서 급히 도망쳐 나와 빈털터리가 된 경우가 많았다. 생활에 쫓기다 보니 처음에는 서청단원 가운데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들을 들고 다니며 반강압적으로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4·3 봉기가 일어난 후 성산포 등지에서 이때 물건구매에 냉담했던 주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례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1947년 초기의 상황이었다. 서청의 위세가 드세어지고 법에도 없는 경찰보조기능이 부여되던 194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공산당을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그들의 백색테러가 제주에서 노골화되었다. 이때는 전국에 '서청! 하면 울던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는 유행어가 나돌 때였다. (<4·3은 말한다 1>, 434-435쪽)
1947년 4월초 유해진 지사 부임 때 서청 단원들을 호위병으로 데려온 것이 서청 제주도 진출의 출발점이라고 하는데, 당시의 서청단장 문봉제는 이 시점에서 단원을 제주도에 보내달라는 조병옥의 요청이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청년단을 파견했어요.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라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지요.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어요? 그 한 예가 제주도인데, 조병옥 박사가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4·3 사건이 나자마자 저를 불러 제주도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경찰전투대를 편성한다고 500명을 보내 달라기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4·3은 말한다 1>, 437쪽에서 재인용)
근 20년 전 제주도에서 살 때 한 서청 출신 노인을 만난 일이 있다. 아라동의 친구 과수원에 놀러간 길에 옆 과수원 노인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다가 서청 단원으로 제주에 왔다는 말을 들었다. 과수원에서 숙식을 하는 분인데, 여러 해 동안 혼자 살아온 것 같았다.
스무 살 나이로 제주에 올 때 그가 어떤 모습이었을까? 큰 욕심 없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온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서청 단원으로서는 못할 짓을 꽤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주도 여자랑 결혼을 했다는데, 어쩌다 혼자 살게 되었는지도 듣지 못했다. 서청은 제주 사태에서 가해자로 지목되는 존재이지만, 그 단원 중에도 피해자는 많았다.
그 무렵에는 4·3 취재반의 양조훈, 김종민, 김애자 기자들과 자주 만나 4·3 항쟁의 의미를 배우고 있었다. 어려운 조건 아래 힘든 일을 해낸 취재반 여러분에게 새삼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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