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4월 3일
동백꽃 지는 계절
지금은 제주에서 동백꽃 지는 철이다. 50년 전의 4월 초에도 그랬다.
강요배 화백의 4·3 역사화전이 '동백꽃 지다'라는 제목으로 열린다. 전시회의 타이틀 작 '동백은 지다'는 꽃잎이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통째로 '툭' 떨어져버리는 동백꽃의 낙화 속에 50년 전 제주민의 수난을 그린 것이다. 민중의 수난으로 4·3의 본질을 보는 그의 시각은 6년 만의 전시회에 보태는 신작 몇 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한 지역의 특정한 사건으로보다 역사 전반의 비극성으로 눈길이 옮겨진 것이다.
역시 제주 출신의 작가 현길언 씨는 4·3을 '미친 시대의 광기(狂氣)'라 부른다. 광기는 합리적 이해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학술적 접근과 정치적 해법은 4·3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도, 그 상처를 아물리는 데도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문학과 예술의 직관적 접근과 정서적 카타르시스에서 그는 더 긴요한 몫을 기대한다.
그러나 학술에도, 정치에도 그 나름의 몫은 있다. 수십 년간 4·3의 비극성을 떠올리지도 못하도록 봉쇄해 온 '공산 폭동'론은 독재 정권 시절의 유물이 되었지만 아직도 사법적으로는 그 그림자를 치우지 않고 있다. 국회의 진상조사위 구성도 의원 과반수의 발의 서명을 받아놓은 채 해를 넘기며 서랍 속에서 잠만 자고 있었고, 학술적 규명도 아직 본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50년 전의 4월 3일 새벽 500명가량의 무장대가 5·10 선거 반대와 서북청년단 등 우익 단체의 추방을 내걸고 제주 각지의 경찰 지서를 습격한 것은 공산 폭동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간 2만여 인명을 앗아간 내전 내지 학살 사태 전체를 그렇게 규정할 수는 없다. 어떻게 지역 주민의 10분의 1이 폭도로 소탕될 수 있었단 말인가.
1년간의 유혈 사태도 비극이었지만, 그 슬픔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지낸 40여 년의 세월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슬픔과 억울함을 펼쳐내기는커녕 연좌제의 피해까지 겹쳐서 겪어야 했던 세월이었다. 아마 이것이 더 먼저 풀어야 할 비극일지도 모른다.
발발 50주년 기념행사 중 '해원상생 굿'이 특히 눈길을 끈다. 4·3은 폭동이고 항쟁이고를 떠나 하나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시비곡직보다 비극성을 더 질실히 음미할 사건은 4·3 외에도 우리 현대사에 숱하게 많다.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굿판을 바란다.
15년 전 제주도를 떠날 때 쓴 글이다. 1993년부터 5년간 제주도에서 살면서 4·3 사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지냈어도 그 배경에 대해 아직까지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거의 전 주민이 미군정 통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사태가 다른 곳 아닌 제주도에서 벌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외딴 곳이라는 사실이 큰 이유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충분한 이유일 수는 없다.
1947년 3월 1일 31절 행사 군중에 대한 경찰의 무분별한 총격으로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3·1절 발포 사건' 이후 4·3 발발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상황의 악화는 어느 정도 분명하게 설명이 된다. 그런데 3·1 시위 이전의 제주도 상황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많이 보이는데, 명쾌한 설명이 힘든 점이 많다. 제주도 군정청 공보관 케리 대위의 1947년 신년사를 보면 1946년 말까지 제주도가 평온한 상황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0월 소요 사태의 파장이 제주도에는 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을 회고컨대) 육지에서는 난동자에 의하여 각 지방에 소요 사건이 발발해서 여러분의 동포 가운데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 내에 한하여서는 여러분이 시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함으로써 여사한 불행한 소요 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946년을 보내고 1947년을 맞이함에 여러분이 갈망하고 있는 통일적 자주 독립을 획득치 못한 것은 유감되는 바이며 또 미군정청에서도 그의 목적인, 즉 조선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오늘까지 실현시키지 못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로 사료되는 바, 금년에는 최대의 노력을 다하여 여러분의 목적과 그리고 군정청의 가장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로 협심·협력하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입니다. (<제주신보> 1947년 1월 1일, <4·3은 말한다 1>(제민일보 4·3 취재반 지음, 전예원 펴냄), 223쪽에서 재인용)
1946년 말에 나타난 또 하나 특이한 일은 10월 말의 입법의원 선거를 전국적으로 극우파가 휩쓰는 가운데 제주도에서만 두 명의 좌익 당선자를 낸 것이다. 인민위원회 소속을 내건 문도배와 김경탁은 12월 12일 개원식을 앞두고 서울에 왔지만 막상 입법의원 등록을 하지 않고 개원식에도 불참했다. 두 사람은 12월 14일 민전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입법의회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경향신문> 1947년 12월 15일).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재선거가 1947년 1월말에서 2월초에 걸쳐 시행되었는데, 재선거 공보에 "금번 피선되는 자는 사고 여하를 불문하고 사퇴할 수 없으며"라는 웃지 못 할 구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4·3은 말한다>, 191~192쪽)
양정심의 "주도 세력을 통해서 본 제주 4·3 항쟁의 배경"(<제주 4·3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51~96쪽)을 보면 해방 후 제주도의 좌익 세력 조직은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 시대에 제주인의 외부 진출이 많았고 그만큼 해방 후 귀환 인구의 비율이 높았던 상황은 분명히 좌익의 확장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외딴 곳이라는 조건 때문에 육지에서 확장되고 있던 극우 세력이 아직 제주도에는 진출하지 않았고, 현지 출신의 경찰관들은 조병옥과 장택상의 반공주의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1946년 말까지 제주도에는 미군 점령 하의 남조선에서 진행된 극단적 좌우 대립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민위원회는 미군정과 경찰의 심한 탄압을 받지 않은 채로 인민의 신뢰를 지키고 있었고 인민위원회를 주도하는 좌익도 극단적 투쟁 노선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0월 소요 사태에 제주도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좌익 인사들이 인민위원회 이름으로 입법의원에 당선된 것이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제민일보 4·3 취재반의 취재 중에 이런 내용도 있다.
1946년 초에 세화지서 주임으로 발령된 한 경찰관은 현지로 부임하면서 경찰서장이 써 준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소개장을 갖고 가 그 지역 인민위원장에게 전할 정도였으며, 한동안 같은 건물에 인민위원회와 지서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 그 무렵 안덕지서 주임으로 발령된 경찰관은 지서 건물을 동네 청년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운동회 때 거액의 희사금을 내고 지서를 인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3은 말한다>, 179쪽)
1947년 초까지 중앙의 신문에 제주도에 관한 기사가 극히 적었다는 데서도 제주도의 평온한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2월 들어 모리배의 준동에 관한 기사가 나타나고 이어 군정청 간부들의 독직 사실이 밝혀졌다.
"무법천지 제주도, 모리배의 기지로 이용"
전쟁 때에는 일본군의 동아 침략의 제1선 기지로 사용하여 오던 제주도는 해방 이래 일부 비애국적인 모리배들의 대일 밀수출입의 기지로 화하여 가지가지의 죄악의 씨를 뿌리고 있는데 최근에는 이러한 모리배를 취체 방지할 책임을 가진 감독 관청의 책임자까지 모리배와 부동이 되어 범죄를 조장하는 듯한 언행을 취하고 있어 도민의 분개는 절정에 달하고 있다 한다.
제주도에서 발간되는 제주신보의 최근 보도에 의하면 당지 해안경비대에 체포된 밀선 복시환(福市丸)을 제주도로부터 목포로 귀환시키던 도중 제주도 산지항에 기항하였던 것을 기화로 약 1000만 원 정도의 물품을 당지의 원모와 한모의 양인이 이를 매수하였다 하며 제주신보 사설란에 "모리배의 천하인가"라는 논설을 게재하였던바 원 한 양인은 1월 26일 밤 8시경 제주신보에 나타나 기자에게 전기 사설을 시비로 잡아 신문사를 말살 운운의 언어도단의 공갈협박을 하였다고 한다. 당지 취체관의 최고책임자인 신모의 태도도 애매하다는 정보를 접한 경무부에서는 이러한 미묘복잡한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경무부 감찰장 조병설 씨가 6일경 제주도로 향하여 떠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5일)
기사 중 "원모"와 "한모"는 같은 날 <동아일보> "'모리 천하' 제주도, 경찰 간부 통역 등이 주로"에 원만영과 한중옥으로 이름이 밝혀져 있다. "당지 취체관의 최고 책임자인 신모"는 제주도 감찰청장 신우균을 가리킨 것이다. (감찰청이란 1946년 8월 제주도의 도(道) 승격에 따라 각도 경찰청에 준해 만들어진 제주도 경찰 기구였다.) <4·3은 말한다 1> 232~245쪽에서 이 '복시환 사건'을 중시한 뜻에 나는 찬성한다. 감찰청장만이 아니라 군정경찰 책임자로 주둔미군 제2인자 패드릿치 대위까지 끼어든 이 악질 권력 비리로 인해 미군정에 대한 민심이 크게 악화되고 3·1 시위 사건을 일으킬 육지의 '응원 경찰'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설명이 합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제주도의 경찰에는 '도민의 경찰'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1947년 2월 26일자 <자유신문>의 희한한 기사 하나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전(前) 부하를 난타, 제주서 청장이"
지난 2월 19일 제주도 감찰청 신우균 청장 관사에 무단 침입한 혐의로 얼마 전 파면당한 경사 김인규는 경찰청에서 훈계를 받고 있던 중 돌연 신우균 청장이 장작개비를 들고 취조실에 들어와 김을 무수히 난타하여 왼편 팔과 가슴에 중상을 입혀 방금 도립병원에 입원 가료 중이라 한다. 이 사건 때문에 신 감찰관은 2월 21일부로 정직 처분을 당하였다 한다.
딱한 일이다. 대신 때려줄 부하 하나 없어서 청장이 손수 장작개비를 휘둘러야 했다니! 폭행을 당한 전직 경찰관 이름을 4·3 취재반은 '김인옥'으로 확인했는데 그가 청장 관사에 무단 침입한 까닭이 무엇일까. <4·3은 말한다 1>의 복시환 사건 서술 중 이런 대목이 있다.
이쯤 되자 소장파 경찰관들도 들고일어났다. 제주 출신 8~9명의 경찰관들이 이 사건을 면밀히 조사, 신 청장과 감찰청 김여옥 수사과장이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당사자들을 찾아가 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김 과장은 사표를 쓰고 순순히 자리를 떠난 반면, 신 청장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며 역공을 펴는 바람에 경찰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에 미묘한 갈등을 표출하게 되었다. (235쪽)
신우균이 물러난 직후 부르지도 않은 '응원 경찰'이 제주도에 들이닥친 것은 신우균과 패트릿치가 자기네 변명을 위해 제주도 경찰에 대한 험담을 했기 때문이 분명하다. 충남-충북 경찰청 소속 50명씩, 100명으로 편성된 응원 경찰대를 맞아 제주 출신인 강동효 제주서장마저 어리둥절해서 "어떻게 된 영문이냐?" 묻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다. 4·3 취재반은 당시 제주서 사찰계장으로 근무하던 박운봉의 증언을 전해준다.
"제주도 내에서 좌익 계열이 우세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응원 경찰대가 들이닥치자 동료 경찰관마저도 동요하는 빛이 없지 않았습니다. 상관들에게 물어보아도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뒤늦게야 '복시환 사건'으로 쫓겨 나간 신우균 감찰청장의 모략에 의해 제주경찰에 대한 상부의 불신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4·3은 말한다 1>, 248쪽)
신우균은 결국 한 달 후 경무부 사문위원회를 거쳐 파면되었다. 그러나 최경진 경무부 차장의 "현재까지의 죄로서는 사문위원회에 부칠 것이 못 된다"는 말이 1947년 3월 4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면 애초에 경무부 당국자들에게는 신우균을 처벌하지 않으려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조병옥에게는 남조선을 경찰 국가로 만드는 과업에 제주경찰이 하나의 흠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우균의 죄상보다 훨씬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신임 강인수 감찰청장에게 '제대로 된 경찰' 100명을 딸려 보냈을 것이다.
이 응원 경찰이 3·1 발포 사건을 일으켰다. 폭도들의 경찰서 습격 위협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경찰서에서 꽤 먼 거리에 있던, 아기를 안은 아낙네와 초등학생까지 포함한 피해자들이 등에 총을 맞은 정황과 동떨어진 주장이었다. 이 발포 사건은 주민 학살이었다. 발포자가 누구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어도, 제주 출신 경찰관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기 때문에 외부 경찰을 들여온 것 아니겠는가. 강인수 청장이 3월 11일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도립병원 앞에서 발포한 경관은 1구서 소속으로 충남에서 내도한 부대장이 당일 도립병원에 배치시켰던 것인데, 무사려한 발포로써 중상자를 낸 사실은 어제 하지 사령부에서 진상조사차 내도한 카스틔어 대좌가 조사하게 될 때에 비로소 나 자신 확연한 사실을 알게 되어 도립병원 앞 발포사건에 대하여는 대단히 미안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4·3은 말한다 1> 310쪽)
이 사건에 항의하는 좌익 주도 총파업에 거도적 호응이 있었던 것은 분노 때문이었다. 3월 10일 시작된 총파업은 공무원까지 참여하는 역사에 드문 '민관(民官) 총파업'이 되었다. 심지어 제주 출신 경찰관들까지 호응했다가 65명이 파면 처분을 받았다. (당시 제주도의 경찰관 숫자는 330명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이 파업의 탄압이 미군정의 중요 과제가 되었다. 4백 명의 육지 경찰이 즉각 추가로 투입되었고, 1년여가 지난 4·3 항쟁 발발 때까지 2500명이 이 파업 관계로 체포되었다. 3·1 사건 직후 제주에 온 조병옥의 태도에서 탄압 분위기가 이미 나타나 있음을 4·3 취재반이 전하는 한 당시 도청 직원의 증언에서 알아볼 수 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도청 안의 사무실에 도청 직원들을 불러 놓고 파업중지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조선의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놀라운 내용의 연설을 했습니다. 현지 분위기와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4·3은 말한다 1>, 318~319쪽)
서울로 돌아온 조병옥은 "경찰 당국은 인내와 엄중을 아울러 충고와 경고를 하였으나 군중은 그 해산을 불긍하므로 작년 10월 폭동의 쓰라린 경험을 참고로 하여 부득이 발포"한 것이며 "선동자 지도자들은 후열에 서고 순진한 양민 동포들은 전열에 배치된 까닭으로 6명의 순진한 동포들의 귀중한 생명의 희생을 본 것"이라며 경찰의 발포를 정당화했다. 3월 20일 발표한 담화문의 앞부분만 옮겨놓는다.
"금반 제주도 불상사건에 대한 나의 관찰을 피력하여 동포 제위의 참고에 공하려 한다. 이 사건은 남조선에 있는 몇 개의 정치사회단체들의 정치이념을 공통히 하는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휴수(通謀攜手)하여 미군정을 전복하여 사회적 혼란을 유치하여 자기 세력을 부식하려는 전체적 운동의 부분적 현상으로 당도(當道)에 노출한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21일 "제주도 불상사에 대한 조 경무부장 담화 발표")
제주도에 대한 조병옥의 시각을 하지 등 미군정 수뇌부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인 초대 도지사 박경훈이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4월초에 유해진이 부임하면서 제주도의 모든 요직에서 제주사람이 배제되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유해진이 부임 때 경호원으로 서북청년단(서청)원 7명을 데려온 것이 제주에서 서청 발호의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1947년 3월 '민관 총파업' 탄압으로 시작된 공포 분위기는 1년 이상을 끌면서 '좌익 탄압' 아닌 '제주인 탄압'으로 확대되어 가기만 했다. 4·3 취재반이 서술한 1948년 3월 중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을 보면 그 몇 주일 후에 발발한 4·3 항쟁은 좌익의 우익에 대한 항쟁이 아니라 미군정과 육지인에 대한 제주인의 항쟁일 수밖에 없었다.
3월 4일 조천지서에 연행됐던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당시 21세)이 유치 이틀 만인 3월 6일 별안간 숨졌다. 사체의 검시 결과 그는 혹독한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천지서 고문 치사 사건의 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3월 14일, 이번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역시 유치 중이던 대정면 영락리 출신 청년 양은하(당시 27세)가 경찰의 구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거의 같은 무렵 한림면 금릉리를 급습한 서청 중심의 경찰대에 붙잡힌 이 마을 출신 청년 박행구(당시 22세)가 곤봉과 돌로 찍혀 유혈이 낭자한 초주검 상태에서 경찰트럭에 태워져 연행되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총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4·3은 말한다 1>, 556~5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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