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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SUV와 아파트 지급!" 그게 대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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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SUV와 아파트 지급!" 그게 대안일까?

[장석준의 '적록 서재']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책 제목은 그 책의 내용으로 인도하는 첫 번째 안내판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제목이 주는 인상이 너무 강해서 그것만으로 내용을 지레 짐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제목이 안내판 역할을 하기보다는 장벽 노릇을 하기도 한다. 제목만으로 그 책을 어떤 전형적인 입장으로 분류하게 하고 독서 자체를 꺼리게 만든다. 이것은 특히 제목만 먼저 알려진 외국 책들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다.

국내에서 이런 대접을 받은 대표적인 책들 중 하나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현웅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이다.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된 것(2011년)은 원전 출판 이후 30년이 지난 뒤이지만, 그 제목만은 좌파 사회과학 서적 독자층에게 전부터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영어 번역본은 "Farewell to the Working Class"라고 되어 있다), 이 제목이 던져주는 인상은 한 마디로 좌파 정치의 근간인 노동 운동에 대한 부정이고 그 청산이었다.

게다가 이 책의 국역 이전에 그 내용을 단편적으로 소개, 인용한 저자들(대표적으로, <계급으로부터의 후퇴>(손호철 옮김, 창비 펴냄, 1993년)의 엘렌 메익신스 우드)가 이 책의 함의를 그런 투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래서 고르의 이 대표작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격하게 진행되던 운동권 논쟁 과정에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인 한 사례쯤으로 낙인 찍혀버렸다. 누군가에게는 읽지 말아야 할 책이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알 만한 책이 되어버린 것이다.

변혁 운동의 청산이 아니라 그 지속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비판

▲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 ⓒ생각의나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에 한때 앙드레 고르의 책들이 국내에 소개될 기회가 있기는 했다. 한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고르의 대표작들을 출간하겠다는 광고를 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책은 나오지 않았다.

정작 앙드레 고르라는 이름이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7년에 그가 아내 도린과 동반 자살하면서였다. "치매에 걸린 아내와 함께 자살한 저명 좌파 사상가"는 협소한 사회과학 서적 독자층을 넘어서 호기심을 끌만한 주제였다. 그래서 (임희근 옮김, 학고재 펴냄, 2007년)라는 제목을 단, 아내 도린에게 바치는 사랑의 편지가 고르의 첫 번째 한국어 번역 저작이 되었다.

다행인 것은 이 관심이 일회적인 에피소드에 그치지 않고 그의 다른 저작들이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망한 지 1년 뒤에 고르의 유작 <에콜로지카>(임희근·정혜용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 2008)가 번역된 데 이어 그의 대표작인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 한국 독자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막상 우리에게까지 와 닿은 이 책들의 메시지는 책 제목이나 비우호적인 인용자들을 통해 어림짐작하던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저 악명 높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보자. 과연 이 책은 마르크스의 노동 계급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제1장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은 어쩌면 이제까지 나온 마르크스주의 비판 중 가장 통렬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 운동에 절교장을 던지고 혁명이라는 목표를 쓰레기통에 던지는 식의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결론은 오히려 정반대다. 이 책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노동 계급 운동'을 아프게 헤집지만 그것은 오직 현실의 '노동 해방 운동'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단지 마르크스주의의 청산이고 탈자본주의 변혁의 포기를 뜻한다면 고르는 결코 그런 의미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런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고르의 책은 도리어 마르크스주의의 화석 같을지 모른다. 여전히 '노동 해방'을 이야기하며, '계획 경제'를, '자주 관리'를 주창하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주제, 즉 노동 해방 그리고 이를 실현할 경로로서 민주적 계획, 노동자 자주 관리 등은 고르의 필생의 연구 주제였다. 고르가 문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20대 후반 젊은 나이에 장 폴 사르트르를 만나 그가 창간한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줄곧 그의 관심사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해방을 실현할 방도였다. 그는 서유럽에 이미 정착된 케인스주의적 개혁을 넘어서면서 또한 소련식 국가 사회주의와도 다른 길을 모색했다.

그래서 그가 잠정적으로 제시한 결론이 '비개혁주의적 개혁' 혹은 '혁명적 개혁' 전략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안토니오 그람시 사상의 급진적 해석을 주창하다가 쫓겨난 로사나 로산다, 루치오 마그리 등의 그룹(이들이 낸 대중 신문의 이름을 따 <선언(Il Manifesto)> 그룹이라 불림), 프랑스에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제3좌파'를 천명한 통합사회당(PSU)과 민주노동총연맹(CFDT), 독일이나 스웨덴 노동 운동 내부의 좌파 흐름과 교류하며 이 노선을 다듬어나갔다. 그 자신은 이를 이렇게 정식화했다.

"비개혁주의적 개혁―반자본주의적 개혁―을 위한 투쟁은 (…) 점진적일 수도 있지만 갑자기 이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이러한 변화들은 권력 관계의 변경을 수반한다.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든가, 아니면 자본주의를 약화시키거나 그 결절점들을 뒤흔드는 데 기여할 경향들을 체제 안에 구축하고 유지하며 확장시킬 만큼 강력한 힘(즉, 비제도화된 힘)을 주장하게 된다. 즉, 이러한 변화들은 구조 개혁의 형태를 띤다. ("Reform and Revolution", Socialist Register 1968, Merlin Press, 1968. p. 115)

"구조 개혁이란 것은 현존 권력관계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은 채 현 체제를 합리화해줄 뿐인 그런 개혁을 말하는 게 아니다. (…) 구조 개혁의 뜻은 개혁을 요구하는 주체들 자신이 직접 수행하고 통제하는 개혁이라는 것이다. (…) 구조 개혁은 항상 새로운 민주적 권력의 중심들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 구조 개혁은 항상 결정권의 분산, 자본이나 국가의 권력에 대한 제한, 민중 권력의 확장, 즉 이윤 독재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요구한다." (Strategy for Labour : A Radical Proposal, Martin Nicolaus and Victoria Ortiz(trans.), Beacon Press, 1967. p. 8)


고르는 1968년 5월의 프랑스 학생-노동자 봉기와 그 이후의 공장 자주 관리 시도들에서 이러한 전략을 실현할 기회를 보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모처럼의 자주 관리 실험은 자본주의적 경쟁에 자발적으로 재흡수되기 일쑤였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의 제1장(72~74쪽)은 이런 실패 사례들을 생생히 전한다.

고르 후기 사상의 출발점은 다름 아닌 이런 쓰디쓴 경험들이었다. 노동자 자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이제 뭔가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했고, 그는 이 요청에 따라 다시 길잡이 역할을 맡고 나섰다. 즉, 고르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전제들에 가차 없는 비판의 칼날을 댄 것은 다른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이론 전개나 전향의 제스처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변혁 운동을 완강히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노동 해방은 곧 자율성의 회복

고르의 비판이 과녁으로 삼은 것은 역사유물론의 어떤 핵심 전제들이었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의 '서론'에서 저자는 이것을 두 개의 명제로 압축, 정리한다. 하나는 "생산력이 발전하면 사회주의의 물적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력 발전이 탄생시킨 노동 계급이 사회주의의 사회적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8쪽). 고르가 작별을 고하려는 '노동 계급'은 현실의 노동자들이 아니라 이렇게 '자본주의가 발전시키는 생산력의 담지자'인 노동 계급, 그래서 '사회주의의 대문자 주체로 예약되어 있는' 노동 계급이다.

고르는 이 명제들을 자본주의의 실제 역사의 뼈저린 경험과 대면시킨다.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본주의가 발전시킨 생산력에는 자본주의의 본성이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그 생산력은 사회주의적 합리성에 따라 경영될 수도, 작동될 수도 없다"는 것이고,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은 이것을 이용하는 노동자 집단이 생산력을 직접 소유하지 못하게끔 이루어져 왔다"(9쪽)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현실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력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 변혁의 주인공으로 성장하는 게 아니라 그 수인(囚人)이 되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대목에서 고르의 눈이 새로운 지평을 향해 트이도록 안내한 이는 이반 일리치였다. 일리치는 19세기~20세기 사회주의가 무비판적으로 계승하려 한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을 정색하고 다시 바라보게 만들어준 사상가다. 그는 마치 달의 어두운 면처럼 두 세기 동안 맹목지점이었던 생산력 발전의 또 다른 얼굴을 폭로했다. 그것은 대중의 자율성에 대한 타율성의 지배이고 그것의 끝없는 확장이었다(일리치는 이를 '근본적 독점 상태'라고도 지칭했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는 생소한 이 '자율성/타율성'이란 무엇인가?

"타율성 영역은 개인들의 생활과 사회의 운영에 필요한 모든 것을 프로그램화하고 계획화해 가장 효율적으로, 곧 가장 적은 노력과 자원을 들여 생산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자율성 영역에서는 개인들이 경제 영역 바깥에서 혼자서든 다른 사람들과 함께든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데, 이 상품과 서비스는 생활에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욕망과 취향과 상상력에 따라 만드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156쪽)

자본주의는 자본의 지배와 확장을 위해 타율성 영역을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확장했고, 이제는 그나마 남아 있는 자율성의 기반들마저 끊임없이 타율성의 지배에 복속시키려 한다. 불행히도,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등장한 사회주의 역시 타율성의 지배라는 점에서는 결코 새롭지 못했다. 대규모 산업이 인간 생활을 지배하는 구조를 자본주의로부터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타율성의 주체가 사기업에서 국가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모든 활동이 사회화되는, 곧 국가기관의 중개로 분절화되고, 전문화되고, 규격화되고, 다른 활동들과 연결되어야만 하는 사회에서는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보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중앙 집권화된 행정과 공무원 집단의 중개를 통하지 않을) 소비, 생산, 통신, 교통수단, 병, 건강, 죽음, 지식의 습득, 교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중앙화로 개인에게서나 단체에게서나 공동체에게서나 자율적 생산, 소비, 교환의 모든 가능성이 파괴되면서, 모든 사회 관계들도 뿌리까지 파괴되었다. 아무도 자신이 소비할 것을 생산하지 않고, 아무도 자신이 생산한 것을 소비하지 않는다.

심지어 '연합한 생산자들'이 생산 조직을 통제한다 가정하더라도, 어떤 생산 조직도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의 필요나 희망에 맞추어 생산하지 않고, 그럴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 어떤 수준에서든 모든 노동자나 노동자 집단이 상호 교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유용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협업하는 과정도 실제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반대로 각 노동자는 모든 수준에서 (…) 자신이 국가에 의지해 있는 사실을 경험한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56~57쪽)


그렇다고 러다이트 운동으로 돌아가는 게 답은 아니다. 일부 근본 생태주의자들은 그렇게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리치의 결론은 그런 게 아니었다. 고르에 따르면, 일리치는 "생산 활동과 산업 노동의 폐기를 주장하는 대신, 자율성을 최대한 확장하기 위해 타율적 생산양식과 자율적 생산양식 사이에서 시너지의 관계를 정립할 것을 주장"(154쪽)했다.

문제는 타율성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자율성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타율성의 파괴가 아니라 자율성의 확대라는 목표에 이를 복속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뜻밖에도 마르크스의 어떤 문제의식과 만난다. <자본> 3권에서 "필연의 왕국"은 계속 존재할 테지만 그것은 "자유의 왕국"을 위해 복무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그 마르크스 말이다(152~154쪽). 다만, 마르크스가 단지 '자유 시간'만을 강조했다면, 일리치는 그 자유 시간을 채워야 할 내용으로서 자율성을 환기시켰다. 고르는 이런 식으로 일종의 '마르크스-일리치 종합'에 도달한다.

이러한 '마르크스-일리치 종합'에서 과거의 목표들은 모조리 새롭게 다시 정식화된다. 가령 '노동자 자주 관리'는 이제 더 이상, 핵발전소를 전력회사 사장 대신 그 노동자들이 직접 운영하거나 거대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속도를 노동자 스스로 결정하는 것 따위일 수 없다. '자주 관리'는 오히려 그런 핵발전소나 대공장의 부속품이 되어 버린 노동자들의 삶에 자율성을 회복하는 과제로 다가오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코뮌주의가 함축하는 바 역시 변화한다.

"자본주의에 대해 '후기 산업 사회의 사회주의'가 갖는 우수성은 다음과 같다. 그 사회에서는 지속적인 성장의 불가능성이 위기가 나타나고 생활수준이 저하되는 것으로서 경험되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 생산의 감소가 생산의 저성장을 선택한 것의 결과로, 곧 다른 활동을 더 많이 하고, 덜 일하면서도 더 잘 살아가는 일을 선택한 것의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후기 산업 사회의 사회주의'라는 표현은 여기서 부적합하다.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공산주의(코뮌주의)'가 될 것이다. 이때 '공산주의'는 '생산력의 완전한 발전'이 완성된 단계고, 이 단계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은 최대한의 생산이나 완전 고용이 아니라, 더 이상 완전한 보수를 받기 위해 풀타임 근무를 할 필요가 없는 다른 경제시스템을 조직하는 것, 혹은 다음의 표현이 더 낫다면, 각자가 생활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사회적 노동으로 제공하는 대가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경제 시스템을 조직하는 것이다." (200쪽)


프롤레타리아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면서 고르가 현실의 노동자들에게 제시한 대안은 생태주의화된 사회주의, 곧 '생태 사회주의(혹은 녹색 사회주의)'였다. 이제야 한국의 독자들은 급진 개혁을 통한 선진 자본주의 사회 변혁을 모색하던 사상가이자 유럽 여러 나라 좌파 정당과 노동운동의 존경받는 멘토였던 실천가의 만년의 메시지가 속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생태 사회주의'임을 알게 되었다. 진실의 확인으로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어떤 점에서는 가장 적절한 시점에 한국 사회에 도착한 절실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더욱 수신되어야 할 고르의 메시지들

적시에 도착한 메시지라는 것은, 가령 고르가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 대신 새로운 변혁 운동의 주체로 주목하는 '새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년 전의 한국 사회라면 이 '새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낯설어 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고르가 말하는 이 '새 프롤레타리아', "불안정한 보조직, 기간직, 구 기술의 노동직, 대체직, 파트타임 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 없는 사람들"(110쪽)이 누구인지 모를 한국인은 거의 없다. 그리고 노동 운동의 미래가 이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부정할 운동가들도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앙드레 고르는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가 우리 모두를, 심지어는 이 체제를 대체하겠다는 세력까지도 몰아넣고 있는 출구 없는 막다른 길에 상상력의 신선한 틈을 열어준다. 모두가 다 고르의 결론에, 그러니까 노동 시간의 획기적 단축으로 모든 시민이 다 일종의 파트타임 노동자가 되고 소득의 상당 부분은 시민 기본소득으로 해결하는 사회에 곧바로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적어도 고르 식의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아빠는 자가용 승용차 타고 회사에 가서 사장을 투표로 뽑고 그 시간에 엄마는 가장이 타온 급여로 집안일을 꾸리면 그게 대안 사회인 것일까? 주주나 재벌 회장이 아니라 이제 노동자들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SUV 차량을 판매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누구에게나 다 아파트 입주권이 돌아가면 그게 사회주의인 것일까?

아니, '사회주의'니 '코뮌주의'니 하는 거창한 말을 굳이 들이밀지 않더라도 좋다. 이제는 민주통합당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까지 주창하는 '복지 국가'만 하더라도, 과연 박정희식 근대화가 만들어놓은 '수도권 공화국', '토건 경제' 그리고 '학벌 사회'를 그대로 두고서 여기에 복지 정책 몇 개 더한다고 실현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물음들을 제대로 던지고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에 신선한 바람구멍을 더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고르가 필요하다. 앙드레 고르의 저작들(가령, <경제적 이성 비판>이나 <자본주의, 사회주의, 생태주의> 등)이 더 많이 소개되어야 하고, 고르의 생태 사회주의 친구들의 고민과 제안들(가령, 크리시스 그룹의 <노동을 거부하라!>(김남시 옮김, 이후 펴냄, 2007년)나 클라이브 해밀턴의 <성장 숭배>(김홍식 옮김, 바오출판사 펴냄, 2011년) 등) 역시 더 많이 읽혀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지구 생태계의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 시대에 우리가 새롭게 시작해야 할 독서와 토론 그리고 실천의 광맥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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