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성격과 지속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러한 독서법으로 인해,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다. 내 손에 들려있는 책이 다루고 있는 시공간이 나의 것과 같지 않음을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나는 덧없는 열광에 휩쓸려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너무 빠져있다보면 내게 유의미한 텍스트는 내 일기장밖에 남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적절히 양보와 타협을 거쳐, 특정한 나라에서 발생한 일이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참고할만한 사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벤저민 긴스버그·매튜 A. 크렌슨 지음, 서복경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줄어들고 있다. 책 제목에 적혀있는 바 그대로, '다운사이징(downsizing)'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도 위기를 겪고 있다. 책을 쭉 읽어나가다 보면, 아무리 비판적으로 날을 세우고 '그것은 미국의 사례일 뿐이다'라고 되뇌어 봐도 소용이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대중민주주의'에서 '개인민주주의'로 변해가는, 혹은 전락해가는 과정은 우리가 지난 10여 년간 봐왔던 국내의 정치적 변화를 고스란히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미국의 보수파와 자유주의자들은 서로 목표하는 바와 원하는 것이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이들은 시민들이 개인으로 정치, 정책 결정, 행정에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집단행동의 빈도와 필요성을 감소시키려 했다."(43쪽) 시민들의 목소리는 자발적인 조직이나 단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여론조사를 통해 반영된다. 그런데 "여론조사는 시민의 입장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들어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트들이 시민의 의견 가운데 듣고 싶은 것을 말해"(195쪽)주는 것이므로, "여론조사는 여론을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설득하는 과정의 한 단계로 자리 잡는다."(196쪽)
지난 대선 과정을 생각해보자. 한 매체에서 안철수를 대선후보로 놓고 박근혜와 1:1 대결한다는 가정 하에 여론조사를 벌이기 전까지, 안철수는 유력한 대선후보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시골의사' 박경철과 함께 대학생들을 상대로 토크 콘서트를 하다가, 실제로 출마하지도 않은 서울시장 후보를 박원순에게 양보했을 뿐이다. 서울시장 후보로서 지지율이 높았지만 일체의 정치 경험이 없던 안철수를 졸지에 대선후보로 만든 것도 결국 여론조사였다. 여론조사가 대선후보에 대한 국민들의 선호도를 보여준 것인지, 아니면 여론조사를 '통해' 누군가가 대선후보로 떠오르게 된 것인지, 닭이 먼저일까 아니면 달걀이 먼저일까?
물론 여론조사가 정치의 주된 도구로 등장하게 된 것을 무조건 비판적으로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정치과정에서 시민의 존재는, 여론조사 과정을 통해 대표되는 통계상의 문제로 점차 환원되고 있"(198쪽)다는 저자들의 지적은 매우 타당해 보인다. 정당은 더 이상 한 지역에 오래도록 헌신해온 풀뿌리 정치가가 아니라, 여론조사 결과 승산이 있어 보이는 후보를 내려 보낸 후 단일화 등을 통해 변수를 차단하는 일에만 골몰한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의 저자들은 그런 현상을 보며 "마침내 시민은 고객의 지위에 걸맞게, 의뢰자의 설득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수 있도록 설계된 여론조사의 대상"이 되며, "정치적 변방에 갇힌 이들 가상의 시민은 참여하도록 초대받지도 못한 채 정치 투쟁을 그저 구경만 할 수 있을 뿐"(같은 곳)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특정 후보의 지지자들이 여론조사에 자신들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반영되도록 '전화기 앞에 붙어있기 운동' 따위를 전개하는 모습마저도 등장했던 것이다.
시민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소비자'가 채워나간다. 그러면서 집단행동의 모습 역시 정치 운동이 아닌 소비자 운동에 더욱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교육받고 자원을 가진 시민들만이 정치에 접근할 개인적 기회를 활용할 수 있고, 정책 결정자와 소통하고 그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 있다."(152쪽)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으며 화이트칼라 업무에 종사하기 때문에,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SNS로 직접 민원을 넣을 수 있는 '시민'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다.
반면 그 외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저 여론조사에 포착될 뿐인 군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이들에게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모습이나, 거기서 거기인 물건을 구입해야 하는 대형마트에서의 쇼핑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제 시민들은 정치 지도자들이 고안한 프로그램과 서비스의 단순한 고객이 되어 버린 것이다."(153쪽)
그 구체적인 진행 과정은 참담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시민들은 기업의 전횡을 통제하기 위해 집단소송에 의존한다. 랄프 네이더가 자동차의 안전 등을 문제 삼아 소비자 운동을 시작할 때, 그것은 대중 조직을 형성하고 운동하면서 그 방법론 중 하나로 소송을 끌어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여론조사로 확인되는 '민심'처럼, 그 실체조차 불확실한 '소비자'를 위한 집단소송이 만연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역시 엘리트, 그 중에서도 특히 '시민'을 대표하는 변호사들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사례들을 살펴보자. "제너럴모터스 사의 소형 트럭 불량품에 대한 소송에서, 원고들은 비슷한 트럭을 구매할 때 쓸 수 있는 1천 달러짜리 할인 쿠폰을 받은 반면, 원고 측 변호인단은 1천만 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받"(312쪽)는 것이다. 집단소송 및 정부 로비 등에 초점을 맞추게 된 환경운동 역시, "자연 자원, 야생 생물 보존, 멸종 위기종 보호"등에 자원을 투여하면서, 정작 "독성 폐기물 처리, 공공 보건, 환경 위험의 분배"(343쪽)등 '소비자'의 위치에 오르지 못하는 중하층 계급의 관심사는 외면하고 있다.
자유와 선택의 나라 미국답게, 공공의 문제를 개인의 선택 차원으로 치환해버리는 방법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른바 '바우처'(voucher)가 그것이다. 정부에서 제공해야 할 시민적 권리를, 가령 주거나 의료 혜택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일종의 쿠폰인 바우처의 발급으로 대신함으로써, '시민'을 '소비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공공 주택 프로젝트를 주거 바우처로 대체"함으로써 "임차인 위원회가 공공 주택 당국에 집단적 요구"를 하는 대신 "당국으로 향했던 공동의 요구가 집주인에 대한 임차인의 개인적인 불만으로 해체되는"(376쪽) 현상이 벌어진다. 현재 다양한 바우처 제도가 국내에도 도입되고 있는 중이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철저하게 미국의 민주주의를 다루고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현실을 곱씹어보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너무도 극명한 구조적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번역된 본문과 친절한 옮긴이 주를 통해 미국의 맥락을 따라잡다보면, 역자가 힘주어 꾹꾹 눌러쓴 옮긴이 후기에 도달하게 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어쩌다가 이렇게 축소되어 버렸는가'를 탐구하는 책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문제의식과 맞닿는 지점이 잘 드러나 있다.
미국에서 돌아오던 안철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최장집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을 읽었다고 한다. 좋은 책이다. 하지만 여론조사로 대통령 후보까지 된 후, 정치 그 자체의 내적 과정을 통해 (아마도 원치 않았을) '양보'를 하고, 노원병 재보선에 출마하면서 두 발로 뛰며 시민들을 만나고 있는 지금의 안철수 후보에게는,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를 더욱 권하고 싶다. 한 정치인이 급격하게 성장한 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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