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3월 29일
1948년 3월 25일 이북 지도부가 제안한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와 "소범위의 지도자연석회의"는 서로 다른 층위의 제안이었다. 대표자연석회의(연석회의)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북민전) 초청으로 남북 협상의 중심 무대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지도자연석회의(지도자회담)는 김일성과 김두봉 개인 초청으로 연석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돕는 보조적 역할을 맡게 하자는 것이었다.
지도자 회담은 김구와 김규식이 2월 중순에 편지로 보낸 제안에 대한 화답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북측의 반응이 남측의 제안에 대한 '동문서답'이라 하여 남북 협상에 대한 북측의 성실성을 의심하는 근거로 보는 견해도 연구자들 중에 더러 보이는데,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남북 협상의 의미에 대해 북측도 나름대로 보는 시각이 있었을 것이니, 협상 방법에 대해 자기네 제안을 내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측이 제안한 연석회의와 지도자 회담에 남측 참가자 중에도 좌익의 비중이 많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남측의 추진 주체로 민련과 한독당이 부각되어 있었는데 한독당은 물론이고 민련에서도 좌익을 배제하거나 전면에서 후퇴시켜 놓고 있었다. 균형 잡힌 남북 협상을 위해서는 남측 대표로 민련과 한독당 외에 좌익의 역할도 필요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느 정도의 역할과 비중이 적절한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절충이 필요한데, 절충을 위한 접촉이 충분치 못한 상황이었다는 것이 아쉬운 일이다.
여운형이 있었다면 바로 이런 절충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서중석도 남북 협상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이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여운형은 독립 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남북 좌우가 연합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여, 그 때문에 남한의 좌익은 물론 우익과 미군정과도 가까이 지내고자 하였으며, 북한과도 계속 연락을 취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방적이고 유연성 있는 태도는 분명히 한쪽 편을 들기를 요구하는 경직된 상황에서는 미군정과 좌우익 모두로부터 불신을 받을 수 있었다. 여운형은 미국과 미군정, 우익에 대해 '평화적 투쟁'의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이 근민당과 공산당의 차이점이라고 강조하였다. 하지 장군이 보기에 여운형의 죽음의 시점에서 좌우합작의 유용성은 이미 끝나고 있었고, 따라서 여운형의 존재도 이제 미군정에게 부담만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당시의 상황을 검토해볼 때 설득력이 있다.
여운형의 죽음은 민족 내부로는 통일 전선 운동이 한층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보다 더 큰 의미는 강대국과 한반도의 분단과의 관계에 있었다. 미국의 대소 봉쇄 정책에 의한 냉전논리가 1947년 7월 이후 한반도에도 적용됨으로써,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은 필연적인 상황에 접어들었다. 이와 같이 강대국이 노골적으로 힘의 논리를 적용하여 분할하려고 할 때, 거기에 저항하는 세력은 발붙일 땅이 없게 된다. 여운형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강대국의 강요에 한민족이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유연하고 폭넓은 통일전선의 형성으로 민족 민주 세력이 민족적 지반을 넓혀 민족 내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완화시키고 민족 문제, 변혁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 요구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족적 지반이 강고하면 그만큼 강대국의 세계 체제와 그것에 호응하는 추종 세력의 영향력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588~589쪽)
이념에 의한 분단 추세를 민족의식의 힘으로 억제하기 위해서는 스킨십이 필요했다. 친족 사이라도 접촉을 많이 갖지 않으면 관계가 소원해진다. 여운형의 훌륭한 점을 받드는 시각이 여러 갈래 있지만, 이념과 권력의 장벽을 뛰어넘어 스킨십을 늘리려 한 그의 노력에 무엇보다 높이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고 테러 위협을 많이 겪어야 했던 것도 바로 이 노력 때문이었다.
노동당 간부 출신으로 남한에서 말년을 보낸 박병엽의 회고가 몇 권의 책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 여운형의 이북 왕래에 관한 내용이 따로 책 한 권 꾸밀 수 있을 만큼 많이 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펴냄), 90~184쪽). 그가 죽은 반년 후 남북 협상이 현실화를 바라볼 때 그가 있었더라면 남측과 북측, 좌측과 우측 사이의 입장을 절충하는 데 그가 맡았을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그 역할을 어느 정도 대신한 사람이 홍명희와 백남운으로 보인다. 박병엽의 회고 중에는 두 사람이 대북 접촉을 증언한 내용도 많이 들어 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펴냄), 186-207, 212-223쪽)
홍명희는 1946년 3월 하순, 8월 초순, 1947년 11월 중순, 그리고 1948년 2월 하순에 평양을 방문했다고 한다. 김구와 김규식의 편지가 평양에 도착한 시점에서 이뤄진 홍명희의 네 번째 방문에 대해 박병엽은 이렇게 증언했다.
"단독 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정국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48년 2월말 홍명희는 네 번째 평양 방문길에 오릅니다. 이때는 북에서 이미 통일(임시) 헌법이 인민들의 토의에 부쳐진 데 이어 2월 10일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이 임시 헌법을 확정, 발표한 뒤였습니다. 때문에 곧바로 남북협상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 자리에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의 정당-단체 지도자들이 협의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습니다. 이에 앞서 김구-김규식은 48년 2월 16일 남북 협상을 제의하는 서한을 보낸 바 있었죠.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남한에서 단독 선거 자체가 어떻게 실시될지 추이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 데다 3월말에 북로당 2차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죠. 따라서 남북 협상의 일정을 그 뒤로 잡자는 점을 확인하는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홍명희와 북로당 지도부는 남북 협상을 성사시킬 수 있는 연합전선 성격의 조직체를 남한에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인식을 같이했습니다."
백남운은 1946년 1월말부터 시작해 1948년 2월말까지 열한 번이나 평양을 방문했다니 여운형 못지않게 부지런히 38선을 넘어 다닌 셈이다. 1948년 2월말의 마지막 방문에 관한 박병엽의 구체적 증언은 없는데, 홍명희와 비슷한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김구-김규식의 서한 제안을 벗어나지만 남측에서 받아들일 만한 회담 방법을 기획하는 데 북측에서는 그들의 의견을 참고로 했을 것이다.
여운형이 살아있었다면 맡았을 역할과 실제로 홍명희-백남운이 맡은 역할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홍-백 두 사람이 4월의 남북 협상 이후 이북에 주저앉았다는 사실이 이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남북 합작을 위해 없는 길이라도 만들어서 가려는 여운형의 적극적 의지가 두 사람에게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양심적 지식인이었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소극적 선택을 하는 입장에 머무른 것이다.
1948년 2월말에 여운형이 평양에 있었다면 북측의 제안이 남측이 받아들이기에 더 좋은 것이 되도록 더 강하게 요구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4월의 남북 협상이 더 큰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을 밝히는 '연구' 과정에 적용되는 얘기일 뿐, 사실의 '해석'에는 가정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남북 협상의 양측 입장을 절충하고 조율한 구체적 사실은 밝혀져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협상의 성사를 위한 노력이 없었을 수 없다. 김구 김규식 등 7인 지도자가 3월 12일 발표한 '총선거 불참 성명서'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 독립 달성을 확집(確執), 김구 씨 등 선거 불참을 공동 성명"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홍명희 조완구 등 7씨는 12일 별항과 같은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통일과 독립은 우리 전 민족의 갈망하는 바이나 현 세계의 양대 세력의 분할 점령으로 인한 대립으로 남북이 분열 각립할 계획은 목하 실현 1보전까지 이르렀다. 남북 양 정부가 수립되는 시에는 그 대항 정책으로 외군 주둔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고 인민의 부담 역시 증가될 수 있고 남에서 미불(美弗) 원조를 기대한다 하더라도 농단은 모리배가 하고 채무는 일반 인민이 지게 될 것이니 백해(百害)만 있고 일리(一利) 없다.
반쪽이 먼저 독립하고 나머지를 통일한다는 것은 다 가능성 없는 것이다. 과거의 귀결로 보아 우리 문제는 국제적 해결이 불가능함은 명백한 바이니 이제는 우리 민족으로 자결케 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소 양국과 UN은 이 민족자결의 기회를 주도록 힘써주기 바란다.
우리들은 현 정세에 추수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임을 알고 있으나 민족 참화의 촉진은 양심의 허락하는바 아니므로 가능한 지역 선거에는 불참하고 통일 독립 달성에 여생을 바칠 것을 동포 앞에 맹서한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13일)
7인 중 5인이 임정 출신이고, 김창숙과 홍명희도 민족주의자로서 그 못지않은 명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나는 이 성명서가 민족주의 진영의 남북 협상에 대한 진심과 성의를 확인해 달라는 북측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2월말 평양에 갔던 홍명희와 백남운 등이 그 요구를 전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백남운은 민족주의자보다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주의자 입장에서는 가능 지역 선거를 반대한다 해서 꼭 불참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거가 끝내 강행될 경우 거기 참가해서 다음 단계 진행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노선을 세울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독당과 민련 내에도 선거 보이콧 여부를 놓고 논쟁이 이어져 왔다. 3월 2일 민련 회의의 분위기는 이렇게 보도되었다.
"민련 상위(常委)-정위(政委) 연석회의 총선거 참-불참으로 격론"
민련 상위와 정무위원 연석회의는 2일 하오2시부터 삼청장에서 열고 남조선 총선거 문제를 토의하였는데 참가파와 불참파 사이에 격론이 야기되었다 하며 결말을 보지 못한 채 5시경 폐회하고 3일 동 장소에서 속회하였다. 그런데 총선거에 민련 자체로는 참가 않을지라도 개인 자격으로 출마함은 방지할 도리가 없는 것이 동 연맹의 태도인 듯하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4일)
그런데 3월 8일 민련 상무위원회에서는 선거 불참을 결의했다고 한다.
"총선거에 불참, 민련서 결의"
민련에서는 8일 오후1시부터 삼청동 김 박사 숙소에 상무위원을 소집하고 총선거 참가 여부에 관하여 장시간 논의하였다 하는데 동 회합에서 이극로 씨를 중심으로 하는 일파에서는 적극적으로 참가를 주장하였다 하며 윤기섭 김붕준 씨를 중심으로 하는 파에서는 참가하지 말고 반대도 하지 말고 중립적 태도를 주장하였다 하며 권태석 장권 씨 등은 참가를 반대하였다는바 결국 표결에 부치게 되어 참가하지 않기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동 연맹에서는 9일 남조선 총선거 실시는 국토를 양단하고 민족을 분열할 우려가 있으므로 동 연맹은 선거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요지 담화를 발표하였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10일)
윤기섭 김붕준 등의 "중립적 태도"라 함은 당분간 참-불참의 태도 표명을 하지 말자는 것이니 결국은 참가파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참가를 주장하고 좌익은 불참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련에서 좌익을 뒷전으로 돌리고 있었던 사정으로 본다면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우세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정당도 아닌 민련이 불참 방침을 표방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참 결정이 내려진 것은 그런 결정의 필요가 강력하게 존재한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남북 협상파는 김구-김규식 연명의 편지를 평양으로 보내놓고 북측의 반응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3월 8일 민련의 선거 불참 결정과 3월 12일 민족주의자 7인의 선거 불참 성명은 북측의 반응을 촉구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선거가 끝내 강행될 경우 거기 참가해서 최선의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갖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 좌익이나 북측에서는 이남 선거가 모든 의미에서 실패로 돌아가기 바라는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3월 10일을 전후한 민족주의자들의 선거 불참 방침 결정은 남북 협상 성사를 위한 좌익에의 양보라고 해석된다.
이극로의 이름이 나온 김에 막 나온 책 하나를 소개한다. 정재환의 <한글의 시대를 열다>(경인문화사 펴냄). 최근 성균관대학교에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을 책으로 꾸민 것인데, 이극로를 비롯한 민족주의 학자들의 활동상을 많이 보여주기 때문에 정치 분야에만 서술이 쏠려 있는 해방 공간에 대한 관점을 잘 보완해주는 책이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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