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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최고의 한국계 작가, 6.25를 파고들다!

[프레시안 books] 이창래의 <생존자>

책의 줄거리
한국계 미국 교포 준은 경제적인 삶에서는 성공했지만 자식에 대해 사랑을 쏟지 못한다. 죽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8년 전 유럽으로 떠난 아들 니콜라스의 소식을 남몰래 추적하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그녀에게, 과거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전쟁 당시 가족들을 처참하게 잃고 전쟁과 인간의 잔혹함 속에서 하루하루 공포심만 키워 나가던 열한 살의 준은 고아원 생활을 시작하며 미군 병사 헥터를 만난다. 준과 마찬가지로 전쟁과 가족에 대한 깊은 상처를 가진 헥터의 존재는 준에게 위로를 준다. 하지만 고아원을 운영하는 선교사의 아내 실비와의 특별한 관계는 그들을 예상치 못한 비극으로 치닫게 한다.

<생존자(The Surrendered)>(이창래 지음, 나중길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에는 두 가지 중요한 모티프가 있다. 하나는 물론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려고 손을 뻗으며 달려가는 준. 이창래는 대학 시절 아버지에게서 한국전쟁 때 피난 기차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떨어져 죽은 동생 이야기를 듣고 놀랐으며, 이것이 씨앗이 되어 <생존자>가 탄생했다고 술회한다.

이창래는 그 비극적인 이야기―조금 변형되기는 했지만 1장에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에도 놀랐지만, 동시에 "쾌활하고 낙천적인" 아버지가 그런 비극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죽은 자들을 뒤로 하고 이어져온 일상적 삶에 어떤 경이를 느낀 것이다. 이 모티프에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는 고아 소녀 준(<생존자>의 중심 인물)이 탄생하고, 또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살아남는 대칭형 인물 헥터(한국전에 참전했다가 고아원 잡역부로 일하게 되는 미국인)가 탄생한다.

▲ <생존자>(이창래 지음, 나중길 옮김, 알에이치코리아(RHK) 펴냄). ⓒRHK
준은 결국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지만, 소설에서 그 행위는 기차를 향해 달려가는 것으로 끝나는 1장이 아니라 이 긴 소설의 맨 마지막에, 죽음 직전의 마지막 혼미한 의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준은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마치 의식을 거행하듯 수의를 입고 있었으니, 말하자면 수의를 입고 생존―동시에 죽음이기도 한―의 기차에 올라탄 셈이 된다. 이 소설은 이렇게 죽음과 삶을, 기억과 현재를 겹쳐놓은, 신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죽음 뒤의 일상처럼 곤혹스러운 이미지로 마무리된다.

이 마지막 장면의 배경은 1859년 솔페리노 전투에서 죽은 자들의 유골을 가득 채워 넣은 솔페리노 교회인데, 이것이 <생존자>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이기도 하다. 북이탈리아 해방 문제를 둘러싸고 산악지대의 작은 도시 솔페리노에서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 30만 명이 맞붙은 이 전투는 참혹하기 짝이 없었고, 전투 후에 부상자들은 고통을 겪으며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다. 좁은 땅에 이들의 주검을 묻는 것만도 벅찬 일이어서 일단 집단 매장을 하고 보았다. 나중에 이들의 유골을 땅에서 꺼내 교회 벽면에 가득 채워놓은 곳이 솔페리노 교회다.

우리가 <생존자>에서 이 전투의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는 것은 실비(용인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미국인 선교사의 부인)가 부모에게서 받은 책 <솔페리노의 기억>을 통해서다. 이 책은 적십자 운동의 창립자 앙리 뒤낭이 쓴 것으로, 솔페리노 전투의 부상자들을 구호하는 과정에서 적십자 운동이 탄생했다. 이창래는 <생존자>에서 내내 이 솔페리노를 전쟁에 관한 명상의 화두로 쥐고 있다.

사실 <생존자>에서 핵심을 이루는 원형적 전쟁은 솔페리노 전투이며 한국전쟁은 그 변주이고, 만주의 사건도 마찬가지다. 또 <생존자>의 성지는 물론 한국의 고아원도 아니고 만주의 선교 학교도 아닌 하얀 유골이 가득한 솔페리노 교회다. 이곳은 <생존자>의 세 축을 이루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인 실비가 어린 시절 선교사 부모와 함께 순례를 갔던 곳이며, 나머지 두 인물인 고아 준과 잡역부 헥터의 "개인적 오디세이"의 종착점이기도 하다. 나아가 솔페리노 교회는 헥터가 한국에서 지은 고아원 교회의 원형이기도 하다. 실비의 부모가 딸에게 준 책은 성경이 아닌 <솔페리노의 기억>이며, 이 책은 준에게로 넘어가고, 그녀에게서 다시 그녀와 헥터의 아들 니콜러스에게로 넘어간다.

이렇게 이창래는 자신보다 앞서 전쟁을 명상한 사람들 가운데 앙리 뒤낭에게, 그리고 그가 쓴 책 <솔페리노의 기억>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전쟁의 참화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뒤낭이 한 가지 중요한 답을 제시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답이란 "자비의 천사"가 되는 길이며, 이것이 실비의 부모가 갔던 길이기도 하다.

사실 <생존자>는 죽음과 삶이 다르지 않은 실비, 헥터 등의 좀비들―어떤 의미에서는 준도 포함된다―이 지배하는 세계라 "자비의 천사"들이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다. 그래서 실비의 부모나 세속의 천사라 할 수 있는 도라(헥터의 애인)는 곧 퇴장하고 기억으로만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자비야말로 하나뿐인 진정한 구원"(이 글에 인용된 대목들은 번역판과는 표현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이라는 실비 어머니의 말과 아버지의 실천은 이창래가 뒤낭의 후예들에게 바치는 경의의 표현이다. 또 실비, 준, 헥터, 심지어 준의 아들 니콜러스까지 <솔페리노의 기억>을 들추어보는 것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헤매는 사람들에게도 이 천사들의 빛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창래는 <솔페리노의 기억>을 존중하고 펼쳐볼지언정 <솔페리노의 기억>을 쓸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의 기억>을 쓸 생각은 없는 것이다. 이창래는 앙리 뒤낭이 아니고, 문학은 적십자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솔페리노 벽면을 가득 채운 백골을 앞에 두고 작가 이창래는,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이창래의 답이 <생존자>일 것이다. 즉 백골이 된 자들의 삶을 복원해 내는 것이다.

앙리 뒤낭이 전쟁에서 외상을 입은 사람들을 구호하는 일에 앞장섰다면, 이창래는 전쟁으로 내상을 입은 사람들, "한결같지" 못해 "자비의 천사"가 될 수 없었던 사람들, 죽음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은 것처럼 사는 사람들의 환부를 있는 그대로, 때로는 섬뜩할 정도로 잔혹하게 복원하는 일에 나선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삶이었으므로. 이창래는 1930년대에, 1950년대에, 1980년대에 죽은 사람들을 2000년대의 3인칭의 눈으로 살려내는 일이 솔페리노의 무덤을 앞에 두고 작가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이창래가 하려고 하는 일은 전쟁 자체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아니다. 한국전쟁 자체를 소설로 포착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이창래는 <생존자>가 "전쟁소설이라기보다는 집단 갈등이 인간 심리와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1950년 한국"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의 첫 장에서 빼어난 전쟁 소설의 한 조각을 만나게 된다.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오던 준이 혈혈단신의 고아가 되는 과정을 그린 이 장에서는 3인칭 시점, 작가 개입의 절제, 투명한 문장, 치밀하면서도 적절한 묘사, 설득력 있는 사건 전개 등으로 전쟁의 참상이 그려지는데, 여기에서는 전에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이창래의 이야기꾼적 자질이 도드라진다. 현란하고 난해한 현대적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뛰어난 데생 실력을 발견하듯, 전통적 서사 기법에도 능숙한 이창래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외국어로 쓴 우리의 이야기에서 흔히 느껴지는 이물감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은 이 시공간이 우리 작가가 쓴 끈적끈적한 구체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창래가 영리하게도 자신의 현장을 자신이 잘 모르는 맥락들이 고인 걸쭉한 웅덩이에 담그는 모험을 피했기 때문이다. 구체적 역사화나 지역화를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존자>에 등장하는 한국의 장소들은 실제 역사 속의 현장이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정교하게 꾸며진 세트장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럼에도 이창래가 소설 공간의 관련성 부재를 세트장 내 좁은 공간의 치밀한 구성과 묘사로 상쇄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소설 속 현장은 그 나름의 자연스러움을 획득하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정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집단 갈등"이 벌어지는 어디에 적용해도 큰 탈이 나지 않는 추상화된 현장이 확보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의도가 좌절된 결과가 아니라 거꾸로 작가의 의도가 구현된 결과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솔페리노 전투라는 원형이 존재하는 한 이 작품의 무대는 실비의 아버지가 선교사로 활동했던 아프리카의 어느 지역이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전통적 서사 기법에 의지한 서술은 대체로 주요 등장인물에게 지워지지 않는 내상을 입히는 원형적 경험이 되는 사건을 이야기할 때로 한정된다. 따라서 1장을 넘어가게 되면, 여전히 3인칭으로 서술되기는 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알던 이창래의 호흡이 등장한다. 그러다가 7,8장에서 실비의 원형적 경험에 해당하는, 그녀의 가족이 만주에서 겪은 참화를 서술할 때는 다시 전통적 서사 기법으로 돌아가 1장 못지않은 압도적 현장감과 강렬한 충격으로 독자를 휘어잡는다. 주요 인물의 인생을 박살내는 가혹한 경험이니만큼 그 충격의 강도를 실감케 하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 터인데, 독자로서는 그 의도를 뒷받침해주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사건들이 그들 각각의 삶에 내려앉으며 기억으로 자리를 잡을 때부터 문체의 질감과 호흡은 확연히 달라진다. 우리가 <생존자>에서 느끼는 균질하지 않은 독특한 질감은 거기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창래가 1장의 서사 방식을 유지해 나가지 않은 것은 물론 그의 목표가 인물들의 행적, 즉 그들과 관련된 외적 사건들의 복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백골들의 생전의 개인사를 복원하여 연대기를 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 것이다.

서두의 첫 번째 모티프에서 언급한, 이창래의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그의 "쾌활하고 낙천적인" 아버지는 "어떤 기억에도 시달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전쟁의 사건들은 늘 그에게 머물러 있었고, 평생 머물게 될 터였다."

여기에서 이창래가 목표로 삼은 것은 물론 그 "쾌활하고 낙천적인" 외피 내부로 들어가 상처받은 내면을 복원해 내는 것이다. 원형적 사건의 기억이 한 사람의 내면에 상처를 내면서 자리 잡는 방식, 그것을 스스로 해석하는 과정, 그로 인한 심리, 나아가 감각의 변화까지 되살려내는 작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창래 특유의 소설적 주체가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을 추적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나무와숲 펴냄)이나 <제스처 라이프(A Gesture Life)>(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광경이다.

그 시절 이창래가 애용하던 수단은 1인칭 시점, 그리고 기억하고, 되새기고, 관조하고, 명상하던 독특한 질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생존자>에서는 이것이 3인칭 시점과 충돌하고, 때로는 인물들이 저자의 거대한 1인칭적 목소리에 눌리는 일이 빚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인물들이 현장 밑바닥에서 자라나오기보다는 위의 관념에서부터 창조된 정황과 겹치면서 인물들의 평면성을 드러내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작가는 우아하고 아름다운―번역자의 눈으로 보면 상대하기가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문장으로 그들을 구원하러 나서서 많은 경우 인물의 빈 곳을 절묘하게 채워주지만, 가끔은 문체가 인물과 겉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또 그런 느낌은 인물 내면의 단선적 논리가 소설 전체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백골로부터 이런 주체들을 빚어낸다는 기획 자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며, 우리가 그 기획을 존중하며 이 소설을 읽어나갈 수 있다는 방향성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소설 전체에서 사건들에 대한 무게 배분이 연대기에서처럼 외적인 중요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처럼 인물의 내상과 관련된 가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아무리 그래도 작가가 클라인과 도라를 무참하게 학살한 것은 좀 심하다 싶기는 하지만).

또 서로 죽음의 상처를 비벼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곳에서는 앙리 뒤낭이나 실비의 부모가 의지했던 가치 체계와는 다른 음지의 가치 체계가 적용된다는 점도 받아들일 수 있다. 실비의 부모가 말하는 "자비"가 절대적 가치로 부각되는 이유도 이곳에서는 그에 맞설 만한 가치를 만들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준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사랑으로 어떤 사람을 그의 본성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없고, 사랑으로 어떤 사람을 그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없다"고 믿는다. "사랑에는 그런 힘이 없다"는 것이다.

멀리서 어렴풋이 비치는 자비의 빛 외에는 이렇다 할 빛이 없는 이 어두운 동굴 같은 곳에서 이창래는 준과 헥터를 기어코 솔페리노의 백골이 가득한 교회로, 전쟁과 죽음의 장소로 다시 데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침내 헥터로부터 "이곳이 우리의 자리"라는 자백을 받아내고야 만다. 이창래는 이런 암울함을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가혹하게 그려내는 것 외에는 문학으로 전쟁과 맞설 다른 방법이 없고, 문학으로 백골들을 진혼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믿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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