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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협상을 둘러싼 동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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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협상을 둘러싼 동상이몽

[해방일기] 1948년 3월 27일

1948년 3월 27일

3월 25일 평양방송에 이어 3월 27일에 김구-김규식 앞으로 김두봉-김일성의 편지가 전달되었다.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은 전달 장면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성시백이 편지를 가져왔다는 얘기를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에게 들었다고 회고했다.

성시백(1905~1950년)은 황해도 평산 사람으로 1928년 중국으로 건너간 후 오랫동안 중국 공산당 정보기관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1946년 귀국 후 김일성의 직계 연락원으로 이남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2월 체포되어 전쟁 발발 직후 처형당했다. 밝혀져 있는 활동 내용만도 대단한 인물인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활동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업을 끝내기 전에 그 활동 범위를 한 차례 정리해 보고 싶은 인물이다.

송남헌의 회고에 따르면 성시백이 가져온 원본 편지는 하얀 인조견에 타자한 것으로 "김구 김규식 양위 선생 공감"으로 시작해서 김일성 김두봉 두 사람의 이름과 도장으로 끝맺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튿날 타이프 용지에 찍은 사본이 또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편지 내용은 당시 공개되지 않았다. 편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송남헌의 회고가 큰 도움이 된다.

원본은 이처럼 김 박사에게 전달되었는데, 북으로 보낸 편지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편지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내용 중에 당신들이 3상 회의 결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 국토가 분단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식의 무례하고 오만불손한 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백범과 우사를 훈계하고 책망하는 식으로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창피해서 도저히 원문 그대로를 공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원문을 공개하지 않자, 이를 두고 항간에는 또다시 별의별 억측이 난무했다. 하는 수 없이 4월 말 편지의 전문이 아닌 요지만을 공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원래 없던 "2월 16일 보내신 혜함은 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어 나는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원문을 직접 읽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김구 김규식 두 사람이 편지를 보낸 사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조차 없었다. 북의 입장에서 언급할 리도 없었다.

왜냐하면 "편지를 잘 받았다"고 하는 것은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 김두봉보다 먼저 남북 협상을 제의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데, 북한이 이 점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누군가가 뒤에 써넣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데, 삼청동 김 박사 측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원본을 갖고 있는 마당에 없는 문구를 일부러 만들면서까지 삽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아마 백범 주변의 사람들이 적어 넣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백범 측에서 공개한 내용에 그런 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편지를 직접 주고받을 수 있는 통로가 없던 백범 진영에서 아무래도 편지를 직접 받지 못한 것을 그런 식으로 얼버무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 없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101~102쪽)

위 내용 중 편지 요지를 "4월 말" 공개했다는 것은 '3월 말'의 착오인 것 같다. 4월 1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된 요지가 보도되어 있다.

"선거 반대책 강구-남북 회담 서한 내용 요지"

김구 씨와 김규식 박사는 지난 2월 16일 공동 명의로 김일성 김두봉 코로트코프 소 사령관 등 3 요로에 각각 서한을 보냈는데 이에 대하여 김일성 김두봉 양 씨는 연서로써 지난 3월 15일부로 회한을 보내왔는데 동 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경교장에서 31일 발표하였다.

1. 2월 16일자의 우리 서한을 받았다는 것.
2. 미국의 주장으로써 쏘의 제의가 부결되고 유엔 위원단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려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는 것.
3.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해결하려는 본지에서 남북 조선 소범위의 지도자 연석 회의를 1948년 4월 초에 평양에서 소집할 것을 동의한다는 것.
4. 이 회의에 참가할 성원 범위는 남조선에서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백남운, 김붕준, 김일청, 이극로, 박헌영, 허헌, 김원봉, 허성택, 유영준, 송을수, 김창준, 북조선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김달현, 박정애 이외 5명.
5. 토의할 내용은 (1) 조선의 정치 현세에 대한 의견 교환, (2)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반동 선거 실시에 관한 유엔 총회 결정을 반대하며 투쟁할 대책 수립, (3) 조선 통일과 민주주의 정부 수립에 관한 대책 연구 등등.
6. 만일 우리 양인이 동의할 때는 1948년 3월 말일 내로 통지하기를 희망한다는 것.


이남 단독 선거에 반대하는 뜻을 함께 하면서도 남측과 북측의 생각에 차이가 있었고 신뢰도 확고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송남헌의 회고에서 알아볼 수 있다. 평양에서 온 편지의 요지 발표에 왜곡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볼 수 있다. 송남헌은 "2월 16일자의 우리 서한을 받았다는 것"만을 지적했지만, 평양 측 제안 내용을 25인 지도자 연석 회의만으로 소개한 데도 의문이 있다. 실제로 평양에서 준비한 중심 행사는 더 범위가 넓은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 회의였고, "소범위의 지도자 연석 회의"는 그 준비 행사 정도의 의미였다.

서중석은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 협상>(한울 펴냄) 160~161쪽의 주78에서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회 소장의 이 편지가 진본인지 의문이 있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송남헌의 회고도 이 의문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다. 이 의문은 당시 남북 간의 불신이 남긴 하나의 흔적이라 할 것이다. 송남헌은 이 편지에 "백범과 우사를 훈계하고 책망하는 식"의 대목이 있어 원본 그대로 공개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서중석이 같은 책 159쪽에 인용한 내용이 그런 대목의 하나였을 것이다.

"양위 선생이 중국으로부터 조국 땅에 들어설 때에 우리는 당신들의 활동을 심심(深深)히 주목하였습니다. 당신들은 평범한 조선 사람이 아닌 일정한 정치 단체의 지도자들로서 조선인민의 기대와 배치되는 표현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조국 땅에 들어온 후에 금일까지 민족 입장에 튼튼히 서서 조선이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여나갈 수 있는 정확한 강령과 진실한 투쟁을 문헌으로나 실천으로나 뚜렷하게 내놓은 것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 결정과 쏘미 공동위원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거듭 파열(破裂)시키었습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쏘미 양군이 철거하고 조선 문제 해결을 조선인 자체의 힘에 맡기자는 소련 대표의 제의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무관심한 태도로 묵과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조선에 대한 유엔 총회의 결정과 소위 유엔 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당신들은 환영하였습니다."

미소공위를 반대했다는 것은 김구에게만 적용되는 비판인데, 유엔 조선 위원단을 환영했다는 것은 김규식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이다. 김규식 등 중간파는 유엔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남북 협상 진행을 통해 유엔을 설득한다는 입장인 반면 이북 지도자들은 소련이 부정한 유엔 개입을 원천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겉으로 나타나는 남북 간의 입장 차이였다.

이 차이의 배경은 궁극적인 건국 방안의 차이에 있었다. 이남 단독 건국 추진 세력을 저지한다는 당면 과제는 양측이 공유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의 방향에 대한 양측의 생각이 달랐다. 중간파는 좌우익의 타협을 바라보고 있었던 반면 이북 지도자들은 이북에서 추진해 온 건국 방안에 이남이 따라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북에서는 '자주 건국'을 추진해 왔고 그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 왔다. 이북에서 추진해 온 자주 건국 사업을 놓고 분단 건국에 이북이 앞장선 것처럼 해석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북 지도자들은 이 사업이 '북조선'의 단독 건국이 아니라 전 조선의 통일 건국을 위한 준비라고 주장해 왔다. 명분이 없지 않은 주장이다. 이남에서 미군정의 지나친 개입으로 민의 수렴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이북에서 대다수 인민이 만족할 만한 안정된 정치 체제를 구축해 온 것은 통일건국이 이뤄질 경우 유용한 인프라로 쓰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분이 타당해도 실제로는 '민주 혁명'을 앞세우느냐 '민족 통일'을 앞세우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민주 혁명을 앞세워 분단 건국도 불사한다는 '반민족적' 입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입장을 대표한 것이 '민주 기지' 노선이다. 궁극적으로는 민족 통일 국가를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민주 혁명이 가능한 지역에 먼저 민주 기지를 만들고 나서 다른 지역까지 혁명을 확대한다는 것이니,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분단 국가를 세워놓고 나서 이북까지 무슨 수단으로든 통합하겠다는 이승만 노선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다.

1946년 11월 16일자 일기에서 북조선의 인민위원회 선거를 설명하다가 민주 기지 노선을 언급한 일이 있다. 1948년 봄 시점에서는 이 노선이 분단 건국의 큰 추동력이 될 만큼 자라나 있었다. 민주 기지 노선이 이북의 정치 체제 구축 단계에 따라 겪은 변화를 이신철은 <북한 민족주의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57~58쪽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1.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 점령에 따른 남북 정세에 근거한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 창설기.
2. 모스크바 3상 회의 이후부터 미소공위 결렬 때까지 민주 개혁과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 운동 시기.
3. 미소공위 결렬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시기.
4. 정부 수립 이후 전쟁 발발 직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도 아래 진행되는 통일 정부 수립 운동 시기.

이들 시기의 특징을 민주 기지론의 주체와 연대의 대상 측면에서 본다면, 첫 번째 시기는 공산주의자들 간의 연대와 분리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좌익과 중도 좌파 간의 연대 시기, 즉 남북민전의 연대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다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반기는 1948년 2월 남북 협상론이 대두되기 직전까지 중도 우파와의 연대를 적극 모색하는 시기이다. 후반기는 남북 협상부터 정부 수립까지로, 우파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 시기이다. 이때까지 연대의 범위는 점차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네 번째 시기에 이르면 민족주의 우파와의 연대가 엷어지면서 다시 좌파와 중도파의 연합으로 연대 범위가 축소되고 만다.

이북 정치 체제는 1947년 초 선거를 통한 인민위원회 수립으로 민족자결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는 단계까지 발전해 있었다. 미소공위를 통해 최종적인 국가 형태의 완성을 이룰 준비를 해온 것이다. 1947년 가을 미소공위 파탄에 이어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에 조선 문제가 상정되자 이북 지도부는 독자적으로 국가 형태 완성 작업에 들어갔다. 1948년 2월에는 헌법 초안이 발표되고 조선인민군 창설이 공포되었다. 미국과 이남 극우 세력이 유엔을 통해 정부 수립 과정에 들어선 데 맞서 '자주 건국'의 길로 매진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중간파와 김구 세력의 남북 협상론이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이북 지도부에게 두 가지 방향으로 기회를 열어주는 호재였다. 하나의 방향은 포기했던 통일 건국의 희망을 되살리는 것이었고, 또 하나의 방향은 분단 건국이 결국 진행되더라도 이남에 수립될 정부의 명분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남의 중간파-우익 남북 협상파는 첫 번째 방향에 희망을 걸었지만 이북 지도자들에게는 두 번째 방향이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특히 민주 기지 노선의 입장에서는.

김구와 김규식은 김두봉, 김일성과의 '4김 회담'에서 남북 대표가 대등하게 협상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북 지도자들이 이남 협상파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할 수 있었을까? 이남 민심이 협상파를 지지한다고는 해도, 이남의 정치 현실을 남북 협상으로 이끌 실력을 협상파가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김규식은 몰라도 김구는 이북에서 최고 악질 반동분자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황해도 출신인 김구가 귀국 이래 평양은커녕 고향조차 한 번 찾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1946년 3·1절 평양 폭탄 테러의 세밀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어도, 김구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이었다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이북 지도부에게 김구와 김규식의 협상 제안은 '투항'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북 입장에 이로운 제안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는 하면서도 지금까지 추진해 온 자기네 노선을 크게 바꿀 뜻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체면을 세워주되 자기네의 현실적 실력이 관철될 수 있는 '연석 회의' 방안을 준비한 것이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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