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있다"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없다" 하는가? 있으면서 없을 수 있을까? 또는 없으면서 있을 수 있을까? 아니, 없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있고, 있다고 여겼지만 알고 보니 없기도 할까? 어떻게 하면 없는 것을 있게 하며, 있는 것을 없게 할 수 있는가?
우선, 이런 질문이 뭔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술"을 떠올려보면 이 질문은 금세 흥미로운 사건이 된다. 마술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환상적인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잠시 흥미를 돋우는 것일 뿐이고, 내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이런 방식의 질문이 어디에 써먹을 데가 있는가 말이다, 라는 반박이 나올 법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윤구병을 통해 이걸 한번 짚어보자.
윤구병은 서양철학이 고대로부터 다루어온 "존재와 무"라고 번역되어온 철학적 질문을 "있음과 없음"이라는 우리의 쉬운 일상의 말로 바꾸어 좋은 세상 만들기에 필요한 생각의 틀거리를 따지고 묻는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철학을 다시 쓴다>(보리 펴냄)이다. 철학에 대한 자세를 바로 잡아보겠다는 뜻이다.
철학은 시간의 여유가 남아돌아 심심풀이로 하는 관념의 유희도 아니며, 머리가 우수한 이들이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난제를 끌어안고 더더욱 알아듣기 어려운 논리를 펴는 체계도 아니다. 철학은 생각과 사물의 뿌리를 찾고 현상의 까닭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한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 캐보는 정신노동이다. 윤구병은 지금 농사를 짓고 있으면서, 이 정신노동의 가치를 여전히 소중하게 여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의 의미
▲ <철학을 다시 쓴다>(윤구병 지음, 보리 펴냄). ⓒ보리 |
그런데 윤구병은 이 있음과 없음의 개념을 가지고 사물의 차이를 정리한다. 이 사물에 있는 것이 저 사물에 없거나, 저 사물에 있는 것이 이 사물에 없으면 우리는 두 사물이 서로 "다르다"라고 판정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라 그는 그의 강의를 듣고 있던 학생들의 이름을 거명해서 이렇게 묻는다.
"이 강의실에는 여러 학생들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하나 저마다 다르지요? 이를테면 변강세군과 이옥녀 양은 각각 한 사람이면서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강세 군과 이옥녀 양이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 안다고 했지요?"
이 질문에 어느 학생이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건 첫 시간에 가르쳐주셨듯이, 변강세 군에게 있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없고, 변강세 군에게 없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실에 폭소가 터졌음은 물론이다. 이름이 또한 변강쇠, 옹녀와 비슷한 탓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라는 윤구병의 우스개 주석이 이어진다. 그런데 윤구병이 정작 관심을 가지려는 바는, "있어야 할 것은 있고, 없어야 할 것은 없는" 상황에 대한 성찰이다. 그것이 가장 "좋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윤구병에게 있어서 존재론의 철학적 의의는 좋은 세상 만들기를 위해 있어야할 것과 없어야 할 것을 가려보는 생각의 힘을 기르는 것에 있다.
경계철학, 그리고 아페이론의 움직임
여기서 그의 "경계철학"이 나온다. 어떤 존재도 그 한계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와 맞닿아 있지 않은, 또는 함께 나눌 수 없는 한계지점이 있기 때문에 구별되는 기준이 생기는 것은 이해하기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걸 한계 또는 경계라는 개념을 동원해서 존재론에 들이대는 까닭은, 그 한계가 명확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있기도 하면서 없고 없기도 하면서 있는 시간과 공간 말이다.
그가 예를 든 기타나 바이올린 줄은 하나로 존재하지만, 그것을 손으로 짚는 순간 한계가 설정되고 그로써 그 줄 안에 숨어있던 소리가 존재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소리는 줄을 짚는 손의 위치에 따라 무한대이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이어져 하나의 줄 안에 맞닿아 있다. 그러니 이는 있기도 하면서 없고 없기도 하면서 있는, 일종의 경계를 그을 수 없는 "아페이론(apeiron)"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아페이론의 지점을 윤구병은 사물이나 사건의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는 운동의 축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한계 또는 경계는 단지 있음과 없음을 구별하는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변화의 힘이 생겨나는 유동적인 지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는 스피노자의 "나투라 나투란스(natura naturans), 나투라 나투라타(natura naturata)"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 자연스럽게 하는 힘"으로 번역하면서 생성을 향한 상승운동과 소멸에 이르는 하강운동이 서로 맞닿아 있는 구조를 주목한다. 그건 새끼줄이 꼬아지는 것과 비견된다.
이 생성과 소멸 또는 확산과 응축이 서로 번갈아 주도권을 잡다가 어느 단계에선 팽팽하게 평형을 갖게 되는 마디가, 스피노자가 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과거의 사건이 기억에서 존재하다가 망각에서 사라지는 그 한계점이,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변화하는 아페이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어디에도 속하는 기묘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
나투라 나투라타를 향해
그러면 이것을 아는 일이 무엇에 그리 도움이 되고 기여하는가? 뭘 그리 복잡하게 사고해서 골치만 아프게 하고 우리의 삶에 실천적인 지침도 되지 못하는 생각 놀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 나올 법도 하다. 윤구병의 강의에 참여한 학생들도 이런 불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윤구병 자신도 말은 쉽게 하는 듯하면서, 꽤나 복잡하고 단숨에 이해하기 어려운 회로를 만들어 가는 일에 넉살좋은 농담을 섞다가 식은땀을 흘리기도 한다.
사실 윤구병의 책을 읽는 일은, 초입에서 아 이 정도야 하고 여기고 쉽게 달려 들었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친다. 읽어 가면 갈수록 어, 이게 뭔 소리여? 하는 탄식 아닌 탄식이 절로 나오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매우 정교하고 그 논리가 담고 있는 의지는 또한 대단히 분명하다.
공간에서만 아페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라는 시간은 사라지고 없는 것인가? 아니다. 윤구병에 따르면 그것은 "스스로 움직여서 현재와 미래의 모습까지도 바꾸어 낼 힘을 가진 살아 생동하는 그 무엇"이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그러니 과거가 이미 없는 것이라느니, 우리 머리나 몸에 간직된 정보를 통해서만 현재나 미래에 힘을 미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과거는 있음과 없음이라고 실체화되어 고정된 그 어느 것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함과 됨의 영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있음과 없음"이 결국 "함과 됨"이라는 실천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철학적 관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있음과 없음의 한계까지 밀고나가는 철학적 사유로 아페이론의 지점을 깨우쳐 생성과 소멸을 자연스럽게 관장하는 주도권인 나투라 나투라타를 우리가 획득하자는 것이다. 그래야만 있을 것을 있게 하고 없을 것을 없게 하는 좋은 세상 만들기의 실천적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생성-소멸의 상상력, 그 실천의 힘
이걸 우리의 현대사를 성찰하는 방식에 도입해본다면, 1945년에서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몰았던 시간들은 과거로 소멸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맞닿아 이어져 존재하고 있으며 아페이론의 영역에서 소멸에 줄기차게 저항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그 시간의 정체가 가진 한계점을 치열하게 밝혀내는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아페이론의 주도권이 결정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의 존재양식이 갖는 한계점을 치밀하게 파악해 들어가면서 그것이 생성-소멸의 지점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아는 것은 인간의 삶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작업의 의미를 갖는다. 있을 것이 있게 하고 없을 것이 없게 하는 일은, 이 유동적 변화의 지점을 짚어내는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걸 윤구병 식으로 이렇게 물으면 될까?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아닌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자본주의에 있는 것이 자본주의 아닌 것에 없고, 자본주의 아닌 그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자본주의에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두 새끼줄이 서로 꼬여 상승과 하강의 운동이 벌어지는 좌표는 어디인가? 그러자면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있는, 그래서 없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있는, 그 다른 새끼줄을 존재하도록 하는 길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자면 없다고 여기는 이 다른 새끼줄에 대한 사유를 깊게 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 새끼줄의 한계를 드러내주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나 그 어디에도 속하는 이 아페이론의 경계에서 우리는 생성-소멸의 주도권을 만들어내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윤구병의 철학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정말 그의 본래 취지와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고 난 다음, 적어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한계를 내다보는 힘을 가지게 된다면 새것이 태어나게 하는 지점에서 생성-소멸의 상상력을 가져 좋은 세상을 이루는 길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어진 경계선 안에서 너무 쉽사리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부터 던져봐야 할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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