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어느 미친 독자의 영웅적이고 미미한 모험에 대한 이야기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라 만차의 어느 마을에 창걸이에 창, 낡은 방패, 야윈 말 그리고 날쌘 사냥개를 가진, 흔히 볼 수 있는 한 귀족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 끼하다, 혹은 께사다, 어쩌면 끼하나. 다소 방정맞은 이름이다. 보무도 당당한 '돈 끼호떼 데 라 만차'라는 이름과 비교한다면 더더욱.
어느덧 쉰을 바라보는 끼하다, 혹은 께사다, 어쩌면 끼하나는 평범한 시골 귀족의 평온한 삶에 안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낮에는 양고기보다 쇠고기를 더 많이 넣어 삶은 요리를 먹고, 밤에는 잘게 썬 고기 요리, 토요일에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달걀 요리를 먹으며, 금요일에는 불콩 콩국을, 일요일이면 새끼 비둘기 요리를 곁들여 먹으면서도 콜레스테롤 수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 수도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도대체 왜? 바로 책 때문이다.
▲ <돈 끼호떼>(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현창 옮김, 범우사 펴냄). ⓒ범우사 |
한 마디로 그는 독자였다. 우리 시대의 독서 멘토로 불린다는 어느 '미남' 저자는 일찍이 독서를 세 부류로 나눈 바 있다. 1단계인 프로 리딩(Pro‐Reading)은 "자기 분야에 관한 책 100권 이상을 읽어서 3000년의 내공을 쌓는 독서"이고, 2단계인 슈퍼 리딩(Super‐Reading)은 "1년 365권 자기계발 독서 프로젝트를 통해 성공자의 사고방식을 갖는 독서"이며, 그레이트 리딩(Great‐Reading)은 "인문고전 독서를 통해 리더로 거듭나는 독서"라고 한다(<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이지성 외 지음, 다산라이프 펴냄) 11쪽 참고). '돈 끼호떼 라 만차'만큼이나 거창한 작명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재기 넘치는 시골 귀족은 어떤 독자였을까?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요컨대 그는 이런 종류의 책(*기사도 소설)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매일 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웠고, 낮에는 낮대로 아침 동이 틀 때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오로지 독서에만 열중하였는데, 이러한 바람에 그는 정신마저 잃게 되었다. 요술, 싸움, 전투, 결투, 부상, 구애, 연인, 번민, 그 밖의 온갖 황당무계한 사건 등 모두 그 엄청난 책에서 읽은 이상야릇한 환상이 언제나 그를 사로잡았으며, 그리하여 그가 읽은 숱한 허황된 얘기들이 모두 진실로만 여겨졌고,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확실한 이야기는 없다고 여겨질 만큼 그의 공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말았다. (30쪽)
그러니 우리는 그를 책에 쓰여 있는 그대로 믿는 독자, 다시 말해 크레이지 리딩(Crazy‐Reading)을 하는 독자라고 해두기로 하자. '프로'도 '슈퍼'도 '그레이트'도 아니다. 그냥 미친놈이다. 돈 끼호떼의 시대에 성공을 약속하는 멘토들의 자기계발서나 다정한 '힐링 도서'가 없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행여나 그가 그런 책을 읽었다면 우리 미치지 않은 독자들은 애잔한 편력 기사의 모험담을 읽을 수 없었으리라. 우리의 신사 양반 또한 아무리 그런 책을 읽는다 해도 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찌감치 포기했겠지. 정신 나간 삼촌 탓에 속을 끓여야 했던 조카딸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대부분의 독자란 이렇게 이기적이다.
미친 독자의 운명을 비장하게 노래한 것은 바로 사사키 아타루다.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34쪽)
그러므로 이런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37쪽)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읽어도 전혀 모르겠다,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지루해서 왠지 싫은 기분이 든다고 하는 것, 다들 뭔가 자신의 능력이 뒤떨어져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화를 내거나 책을 내팽개치거나 하는 것입니다. "번역이 나빠"라고 한다거나 "좀 더 쉽게 쓰란 말이야"라며 다른 사람 탓을 하거나 "좀 더 공부해야겠는걸", "좀 더 쉬운 책은 없을까"라든가, 초급이 있어야 중급이 있고 중급이 있어야 상급이 있다는 듯한 지의 서열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런 일종의 열등감이나 분노를 이용하여 엉터리 같은 입문서나 비즈니스 책이나 팔아치우며 독자를 착취하는 패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39쪽)
물론 이것은 사사키 아타루의 주장이다. 나는 우리 시대의 몇몇 베스트셀러 저자들을 "엉터리 같은 입문서나 비즈니스 책이나 팔아치우며 독자를 착취하는 패거리"라고 부를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이 글을 읽으며 "뭐 이딴 글이 다 있어"라고 투덜대는 당신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더는 책을 읽고 미칠 수 있는 시대를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따듯한 방에 앉아 낄낄거리며 책장을 넘기는(혹은 마우스 휠을 돌리는) 안전한 소비자‐독자가 되는 일이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것은 우리의 잘못인가? 글쎄,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언젠가 루카치는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던가.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러니 사소한 의문들은 뒤로 한 채, 검은 글자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책장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자. 평범한 시골 귀족 끼하다, 혹은 께사다, 어쩌면 끼하나는 그것을 읽었고, 아니, 읽고 말았고, 그리하여 돈 끼호떼가 되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Neo)'가 '그(The One)'가 된 것처럼, 그는 그저 믿음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편력 기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창대한 모험이라도 그 시작은 미미한 법. 우리의 편력 기사를 기다리는 것 또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차라리 궁상맞은 사소한 문제들이었다.
그가 처음 만난 난관은 편력 기사의 코스튬을 갖추는 일이다. 창고를 뒤져 몇 대나 지난 옛 조상의 낡은 갑옷을 발견하지만, 투구에 낯가리개가 없었다. 그는 뛰어난 손재주를 활용해 두꺼운 판지를 잘라 쇠모자에 붙이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비록 "그것이 얼마나 튼튼하며 칼끝의 위험에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려고 칼을 뽑아 두어 번 내려쳐서, 일주일 동안의 노력의 결과를 망가뜨려버리고 말"지만, 다시금 공들여 완성한 그것을 두 번 시험하지 않을 정도로는 현명했던 것이다.
첫 번째 난관을 무사히 통과한 그는 모든 기사가 자신에게 꼭 맞는 명마를 가지고 있듯 자신의 '로신'(비루먹은 말이라는 뜻)에게 로시난떼라는 멋진 이름을 지어주고, 돈 끼호떼 데 라 만차라는 이름을 통해 스스로의 신분과 고향을 분명히 나타낸 후, 한 번 본 적도 없는 이웃 마을 농부의 딸에게 둘씨네아 델 또보소라는 이름을 붙여 아름다운 공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모든 편력 기사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들을 단숨에 마련한다. 이제 남은 것은 긴 창을 비껴들고 로시난떼에 오르는 일이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고 보니 그가 쳐부수고자 하는 부조리, 바로잡아야 할 부정, 고쳐야 할 비리, 제거해야 할 폐해, 처리해야 할 부채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어서 자기가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있으면 그만큼 세상이 받는 손실이 크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돈 끼호떼>, 33쪽)
우리 시대 어떤 정치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사심 없는' 희망의 첫발을 내디딘 돈 끼호떼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는 아직 기사가 아니다. 누구보다 그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아직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지 않았고, 기사도 소설의 법도에 의하면 정식 서임을 받지 않은 이는 어떤 기사와도 맞설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보고, 공상하는 모든 것이 책에서 읽는 그대로 되어 있고 또 된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모험가"는, 그러니까 미친 독자는 이내 "사면의 누각이 있고, 은빛 찬란한 첨탑과 들어 올리는 다리와 깊은 해자 등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성"(이라고 쓰고 주막이라고 읽는다)을 발견한 것이다.
성주는, 그러니까 주인은 한 눈에 보기에도 미친 게 분명한 허름한 손님에게 돈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끼호떼에게는 한 푼도 없다. 그가 읽은 편력 기사의 이야기책에 돈을 가지고 다녔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기사를 주인은 좋은 말로 타이른다. 굳이 책에 쓰지 않은 것은 편력 기사들이 깨끗한 속옷처럼 돈을 갖고 다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구태여 그것을 밝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에 나오지 않는 사실이라고? 세상에, 그럴 리가! 책으로 기사도를 배운 성실한 독자로서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만, 그는 차분히 주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따름이다. 성실한 독자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법이고, 우리의 주인공에게는 기사 서임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그는 이미 미쳤으니까. 누구도 두 번 미칠 수는 없는 법이다.
마침내 돈 끼호떼는 기사 서임을 받는다. 말썽을 원치 않는 주막 주인이 주먹구구식으로 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서임은 서임이다. "말의 배때기까지 터질 듯한 기쁨으로 싱글벙글 마음도 가볍게 매우 만족스러운 심정으로" 주막을 나선 돈 끼호떼는 곧바로 정의를 구현한다. 양치는 소년을 묶어놓고 채찍질을 하고 있는 농부를 만난 것이다. 그는 이 사악한 사내가 소년의 임금도 지불하지 않은 채 트집을 잡아 분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채고, 저 현명한 솔로몬 왕에 뒤지지 않는 판결을 내린다. 농부에게 지금 즉시 집으로 소년을 데려가 밀린 임금을 지불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즉결 심판을 내릴 수도 있지만, 기사가 천한 농부에게 검을 들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기사가 떠나는 순간 더욱 가혹한 매질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지만, 돈 끼호떼는 기사도와 맹세를 운운하며 농부에게 거듭 경고할 뿐이다.
"레알 은화로 지불해주어라. 그러면 나는 만족이다. 아무튼 반드시 서약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니라. 만일 어길 경우에는 그대의 서약 그대로 다시 되돌아와 그대를 찾아내어 형벌에 처할 테다. 제아무리 그대가 도마뱀처럼 달아나 숨더라도 찾아내지 않고는 가만있지 않을 테다. 이것의 이행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대체 이것이 누구의 명령인가를 가르쳐주마. 나는 사악과 비도의 징벌자인 용맹스러운 돈 끼호떼 데 라 만차다. 그러니 한 번 맹세한 서약을 꿈에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엔 앞에서도 말한 대로 형벌이 그대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니 그리 알아라." (48쪽)
아, 우리의 멋진 돈 끼호떼! 무정한 무리들의 부정을 간단히 제압한 초보 기사는, 그러나 결코 초보로는 보이지 않는 용감한 기사는 "자기의 기사도가 참으로 화려하고 고매한 발족을 했다고 생각하고 일의 진행 경과에 매우 만족해하면서 무척 우쭐해져서" 자신의 길을 가고, 남겨진 소년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 채 혹독한 고초를 겪는다. 세르반테스는 첫 번째 업적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우리의 용사 돈 끼호떼는 이런 식으로 무도(無道)와 비리를 바로잡았던 것이다. (49쪽)
그렇지만 용사의 길에 시련이 없을 리 없다. 우리의 남다른 기사에게 시련은 무척 일찍 찾아온다. 성주의 조언에 따라 깨끗한 속옷과 금화, 내친 김에 방패를 들릴 종자를 구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력 기사의 무리(는 물론 비단을 사러 가는 상인들)를 만난 것이다. 새로운 모험에 흥분한 늙은 기사는 길을 막고 서서 큰 소리로 의연하게 외친다.
"라 만차의 여왕인 둘씨네아 델 또보소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이 세상에 없다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거기 있는 누구라도 이곳을 지나가게 하지 않으리라." (50쪽)
미친놈과 적당히 놀아주자는 생각에 말재간이 있는 상인 하나가 돈 끼호떼에게 수작을 건다. 훌륭한 부인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조금도 모르니, 한 번 그분을 보여 달라고. 그런 다음에 그토록 아름다운 분이라면 기꺼이 진실을 고백하겠노라고. 하지만 정작 돈 끼호떼조차 한 번 본 적 없는 여인이 아닌가? 돈 끼호떼는 말한다.
"아니, 부인을 보여주고 난 다음에"하고 돈 끼호떼가 대답했다. "명명백백한 사실을 고백한다고 하면 무슨 그리 대단한 일이겠느냐.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부인을 한 번도 보지 않고도 그것을 믿고 고백하고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면 이 오만불손하고 건방진 녀석들, 나하고 한바탕 싸워야 할 줄 알아라. 기사도의 관습에 따라 한 사람씩 차례로 덤벼도 좋고, 너희들 같은 무리들의 관례와 악습대로 한꺼번에 덤벼 와도 좋다. 나는 나의 정의를 믿고 여기서 기다리겠노라." (50쪽)
그렇다. 믿음, 돈 끼호떼에겐 그것만이 중요하다. 본 적은 없지만 틀림없이 사랑하는 부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 자신의 정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책에 인쇄된 글자 하나하나가 사실이라는 단단한 믿음. 돈 끼호떼의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인 동시에 계부인 세르반테스가 서문에서 친절히 밝히고 있듯 기사도에 대한 공격, 다시 말해 "기사도에 관한 서적이 세상이나 속인들 사이에 갖고 있는 권위와 세력을 타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는 우스꽝스러운 이 편력담이 시대를 거치며 작가의 의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르반테스가 쓴 것은 분명 엉터리 기사도 소설에 대한 패러디이고 무자비한 공격이다. 세간의 평에 의하면 길고도 지루했던 라블레를 다룬 이 연재의 첫 4회 분을 위해 내가 적지 않은 돈을 주고 구입한 블라지미르 쁘로쁘의 <희극성과 웃음>(정막래 옮김, 나남 펴냄)에 따르면 패러디는 "패러디되는 대상의 내적 불충분성에 대한 폭로의 수단"이며 "문학에서 패러디가 출현한다는 것은 패러디되는 문학사조가 소멸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세르반테스가 하는 일이고 이는 라블레가 기사도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했던 작업, 즉 "작품의 작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성격의 현상들에 반대하기 위하여 전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들의 형태를 풍자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와 구별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늙은 돈 끼호떼를 만들었고,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험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돈 끼호떼는 잊히지 않았다 — 대부분의 수단들이 목적을 이룬 후 버려지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그렇지만 단단한 믿음과 함께, 신이 사라진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인간들의 운명을 낡은 갑옷처럼 두룬 채 살아남은 것이다. 유일한 절대 진리는 사라졌다. 인간에게는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마치 사막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지만 어느 하나 구원을 보장하진 않는 가능성이 주어졌다. 자유라는 이름의 형벌. 돈 끼호떼는 황량한 자유의 사막을 자신의 두 다리로, 아니, 사랑하는 애마 로시난떼의 네 다리로 걸어간다. 기사도라는 우스꽝스러운 믿음을 그러쥔 채. 그는 미친 독자(讀者)인 동시에 독자(獨自)이며, 나아가 믿음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누구보다도 신실한 독신자(篤信者)인 것이다. 그가 낭만주의의 영웅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영웅이라고 해도 뭇매를 맞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부인의 초상화라도 보여줄 수 없겠냐며 "아니 비록 그 초상화가 한쪽 눈이 애꾸고 다른 눈에서는 진물과 고름이 흘러내린다 해도 우리는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라는 불경스러운 말을 지껄이는 악당을 향해 "아무것도 절대로 흘러내리지 않는다, 이 흉악한 놈팡이야!"라고 사자후를 내뱉으며 돌진하던 돈 끼호떼는 그만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고, 북소리가 나게 두들겨 맞은 것이다. 물론 빗발치는 몽둥이찜질을 당하면서도 입만은 쉬지 않고 놀리며 호통을 치긴 했지만….
그러나 우리의 돈 끼호떼는 이런 재난은 편력 기사들에게는 으레 따라다니는 것이라고 은근히 기쁘게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말의 탓으로 돌렸지만, 온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도저히 일어날 가망이 없었다. (52쪽)
아무리 노력해도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돈 끼호떼는 늘 하는 방법을 써보려고 마음먹는다. "그것은 전에 읽은 책들 중의 어느 한 대목을 생각해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두들겨 맞지 않았음에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때 내가 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통한 목소리로 어느 기사도 소설에 등장하는 로망스를 부르던 그가 "오 고귀하신 만뚜아 후작님! 한 핏줄을 나눈 나의 숙부님이여!"란 대목에 이르렀을 때, 마침 같은 동네에 사는 농부가 그를 발견한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동네 어른을 본 마음씨 착한 농부는 그를 당나귀에 실어 마을로 데려온다. 이렇게 우리 기사의 첫 번째 모험은, 모두가 기대했던 풍차와의 대결도 미처 벌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반면 주인어른이 말도 없이 사라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그의 집에서는 돈 끼호떼의 가장 친한 친구들인 마을 신부와 이발소 주인이 가정부가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제 짐작이 틀림없어요. 나리께서 언제나 끌어 모아 가지고 늘 읽고 계시던 그 몹쓸 기사도 책들이 나리의 머리를 돌게 만들고 만 거예요. 이건 신부님, 제가 태어나서 죽는 것이 틀림없는 일인 것처럼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 그 따위 책은 악마나 염병 귀신에게 줘버려야 해요." (55쪽)
사랑하는 조카딸도 한 마디 거든다.
"외삼촌은 그 엉터리 기사도 책을 꼬박 이틀 동안이나 쉬지 않고 열심히 읽곤 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러고 나서는 책을 내동댕이치고 칼을 들고 벽을 향해 마구 내리치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지치시면 자신이 탑만큼이나 큰 거인을 넷이나 죽였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또 지쳐서 땀이 흐르면, 이것은 싸움에서 입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 그 나쁜 책들을 모두 불살라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교도처럼 화형이 알맞을 책들을 잔뜩 가지고 계시거든요." (56쪽)
이에 신부가 입을 열어 "내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책들을 공식 재판에 붙여서 꼭 화형에 처해야겠어. 앞으로 다른 사람이 그것을 읽고 또 나의 소중한 친구가 한 것처럼 되풀이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라고 화답했으니, 아마도 다음 장에서는 '우리의 기지 넘치는 귀족의 서재에서 신부와 이발사가 행한 유쾌하고 엄숙한 검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