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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처럼 육체 탐한 남녀, 혁명이 낳은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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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처럼 육체 탐한 남녀, 혁명이 낳은 괴물!

[프레시안 books] 옌롄커의 <물처럼 단단하게>

그의 이름은 우리들에게 아직 약간 어색하지만, 이미 몇 권의 한국어 번역본이 나와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작가. 옌롄커(閻連科, 1958년~)는 1978년 인민 해방군에 자원하여 2004년까지 근 26년간 군대에서 생활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그곳에서 전투병부터 시작하여 간부, 비서, 포병대 문선대(방송국 시나리오 작가) 활동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했고(1985년 허난(河南) 대학교), 다시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1991년 해방군 예술학원 문학과).

중국에서 1978년은 부도옹(不倒翁) 덩샤오핑이 다시 정권의 실세로 등장하면서 이른바 개혁개방의 단초를 마련한 때이자 오랜 세월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던 민중들의 목소리가 돌연 폭발하기 시작했던(톈안먼 시단(西單)에 민주의 벽이 설치됨) 해였다. 사람들이 민주에 대한 갈망을 터뜨리고 정권은 홍(紅)에서 전(專)으로 본격적인 시동을 걸 때, 그는 군대로 들어갔다. 굳이 그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허난 성 숭(嵩) 현의 궁핍한 작은 전(鎭) 출신인 그가 군대를 택한 이유는 능히 짐작할 만하다. 아마도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를 이해시키거나 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군대로 들어간 그 해부터 그는 '문학'을 시작하여 1980년 첫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고, 이후 <정감옥(情感獄)>, <최후의 여성 지식청년(最后一名女知青)>, <일광유년(日光流年)>, <물처럼 단단하게(堅硬如水)>(문현선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인민을 위해 복무하다(爲人民服務)>(<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김태성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풍아송(風雅頌)>, <사서(四書)>(문현선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등 7권의 장편 소설과 <연월일(年月日)> 등 수많은 중단편 소설이 실린 10여 권의 소설집을 출간했다. 현재 그의 이름을 딴 5권짜리 문집이 나와 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초라한 젊은이는 루쉰 문학상을 두 차례나 받았고, 라오서 문학상을 비롯한 20여 개의 문학상을 수상한 중국의 이른바 '일급 작가' 반열에 올랐으며, 노벨상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영국의 권위 있는 맨 부커 국제 문학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의 올해(2013년) 수상자로 선정되어 다시 한 번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문학을 돈으로 계산하길 좋아하는 이들은 '중국 작가 부호 리스트(富豪榜)'에서 그를 20위로 올려놓았다.

▲ <물처럼 단단하게>(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그의 소설 가운데 <견경여수(堅硬如水)>는 2009년에 중국에서 출간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물처럼 단단하게>라는 제목으로 2013년 처음 소개되었다. 제1장 '혁명과의 해우'부터 제13장 '에필로그(尾聲)'까지 비교적 긴 장편 소설인데, 소설의 내용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때는 문화 대혁명이 한창인 1967년. 소설은 25세의 인민 해방군 가오아이쥔(高愛軍)이 퇴역하고 고향인 허난 성 뤄양(洛陽) 청강(程崗) 진으로 돌아오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의 고향은 송대 이학대사(理學大師)인 정이(程頤)와 정호(程顥) 형제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자, 이름과 달리 여성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아내 청구이즈(程桂枝)와 의무적으로 만든 아이가 낯설게 맞이하는 그런 곳이었다. 애당초 그는 자신의 욕망이나 의지에 관계없이 그저 간부 자리를 주겠다는 마을 지부서기(支部書記)의 꼬임에 빠져 그의 딸과 결혼한 것이었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입대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전혀 예상치 못하게 한 여인이 나타난다. 이미 딸 하나를 둔 유부녀로, 학교 선생인 청칭동(程慶東)의 부인 시아홍메이(賀紅梅)이다. 이 유부남과 유부녀는 한편으로 구시대적 사상, 문화, 풍속을 척결해야 한다는 이른바 '혁명'의 동지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육정을 불사르는 내연 남녀가 되었다.

소설은 그들의 '혁명'적 투쟁과 '성애'의 갈망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독자는 그들의 투쟁과 갈망이 실은 권력욕과 성욕의 결합임을 천천히 눈치 챌 수 있다. 결국 후반부에서 그들은 더욱 큰 권력에 의해 희생양이 되고 만다. 마지막에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성애가 진정한 혁명적 애정임을 자부하면서 눈을 감는다.

텍스트(소설의 내용)는 이렇듯 비교적 간단한데, 컨텍스트(문맥에 숨겨진 뜻)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일이 다른 시절이 아닌 문화 대혁명 초기에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일단 그 시절부터 살펴보는 것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화 대혁명,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無産階級文化大革命)'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대략 10년간 이루어진 기묘한 '혁명'으로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가 참으로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마오쩌둥에 의해 발동되었으며, 아직 어린 젊은이들을 붉은 보위 병사란 뜻의 홍위병(紅衛兵)으로 삼아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게 했고, 끊임없는 선전과 선동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전체 인민을 동원하여 '혁명'의 노래, 마오쩌둥 찬가를 부르게 했다는 것.

이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분명하지만 황당한 죄목에 따라 죽거나 다쳤고, 쫓겨나거나 스스로 산골이나 시골로 떠났으며(하방(下放), 상산하향(上山下鄕)), 학교는 폐쇄되고 선생은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죽음을 선택했으며,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마오와 저우언라이를 뺀 중국공산당 정치국 지도자들은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를 향해 달리는 자들)란 죄명으로 몰락하고 대신 장칭을 위시로 한 사인방(四人幇)과 린뱌오 국방장관, 마오쩌둥의 오랜 조수들이자 보안 책임자였던 천보다, 캉성, 왕둥싱 등 과격·급진파들이 득세하여 악랄한 짓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결국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마치 일장춘몽처럼 끝이 났으며, 이후 쫓겨난 이들은 복귀하고 억울한 이들은 복권되었으며, 도시에서 쫓겨난 홍위병들은 일부 돌아오거나 그냥 그곳에 남을 수밖에 없었고, 다시 누군가는 쫓겨나거나 죽었으며(사인방을 포함한 급진파 축출), 결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시커먼 멍과 울이 잔뜩 들어 영 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게 마오쩌둥의 영구 혁명론에 근거한 것이든, 그야말로 사회주의 체제 강화를 위해 또는 아무런 자산도 가지고 있지 못한 무산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문화적 변혁을 감행한 것이든, 권위(마오의 권위)를 위해 권위(마오 이외의 권위)를 말살하고자 했던 것이든, 진정 중국 공산당의 영원한 집권과 정화를 위한 것이든 간에, 그것은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공화국이 끝까지 가지고 가야할 업보이자 영원히 풀리지 않을 중국 공산당의 족쇄이며, 인민들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억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문화 대혁명이 발생한 지 반세기가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그 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문학의 소재로 끊임없이 재탕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개혁개방과 이에 따른 사회주의 시장 경제, 그리고 중국 역사가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는 물질적 풍요가 문화 대혁명과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이 뜬금없는 '사회주의 시장 경제'라는 말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들이 경험한 '사회주의' 정치와 경제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바꾸었겠는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바로 이러한 문화 대혁명의 초기로, '혁명'의 기치가 가장 높이 치솟아 있을 때이다. 주인공은 바로 그때 입대를 했다. 그는 미국의 본토 공격에 대비하여 모든 군수 물자와 군 시설을 내륙 깊은 곳에 보호해야 한다는 명령 하에 부지런히 땅굴을 팠으며, 혁명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강박관념 속에서 혁명적 투쟁을 불살랐다. 그의 땅굴 파는 기술과 솜씨는 그가 귀향한 후 내연녀인 샤홍메이와 밀애를 나눌 때 그것을 위한 땅굴 파기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가 당시 군부 실권자였던 린뱌오(林彪) 치하에서 목이 닳도록 외쳐 불렀던 혁명가와 구호, 그리고 선동적인 말솜씨는 청강진의 젊은이들을 마을 혁명을 위한 '젊은 피'로 규정하고 비밀 집회를 거쳐 '혁명'을 일으킬 때 무엇보다 요긴한 수단이자 무기가 된다.

그가 군대에서 배운 '혁명'은 그의 삶 전체에 녹아들어 아내의 자살을 마주할 때나 밀회 현장을 목격한 샤홍메이의 남편을 죽일 때는 '어쩔 수 없는 희생양'으로 간주할 수 있는 대담성이 되며, 고문을 당할 때는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여 견뎌낼 수 있게 만드는 인내성이 되고, 마을의 상징이자 봉건주의의 상징인 패방(牌坊)을 깨부수러 갈 때는 자랑스러운 용맹성이 되며, 마침내 섹스를 할 때는 가장 좋은 최음제가 된다.

본래 혁명과 사랑은 프로 문학의 중요 소재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애달픔이고 진지함이며, 그만큼의 숭고함이었다. 다만 혁명을 위해 사랑이 희생되고 그럼으로써 사랑이 완성된다고 믿을 경우에만 그러했다. 그런 사랑엔 폭풍우와 같은 첫 키스는 있을지언정 정상위나 후배위와 같은 낯간지러운 단어는 끼어들 틈이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양자가 다 있다. 아니 후자는 더 많다. 그래서 출판되자마자 적색(赤色, 혁명, 공산주의)과 황색(黃色, 성)의 금기를 어겼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어쩌면 그 이유는 자명하다. 혁명은 섹스가 아니고, 섹스 또한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끊임없이 혁명을 이야기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혁명'은 '혁명하다'와 다르다는 것.

'혁명'은 그 자체로 누군가의 또는 어떤 것의 운명을 바꾸는 것, 또는 바꿔진 것을 말한다. 그러나 '혁명하다'는 누군가에 의해 또는 어떤 것에 의해 이미 이루어진 '혁명'을 또 다른 누군가가 한다거나 저지른다거나 꾸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어에 그런 말은 없지만, 내가 '까오구이(搞鬼, 꿍꿍이나 모략을 꾸미다)'의 '까오'를 혁명에 붙여 '까오거밍(搞革命)'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때문이다. 문화 대혁명은 사실 '반문화 혁명'이었으며 '혁명'이 아니라 '혁명을 하다'에 가까웠다. 문제는 '혁명'을 하는 데 있어 그 '혁명'에 대해 잘 모르거나 또는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문화 대혁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혁명'은 곧 '성애'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은 문화 대혁명 시절 그렇게 자주 외쳤던 '혁명'이 사실 무엇인지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혁명'으로 저질러진 온갖 추악한 면모를 보여줄 따름이다. 그 곳에서 독자는 때로 헷갈린다. 예컨대 정이와 정호 형제(이정(二程))의 귀한 전적들을 밑에 깔아놓고, 그 위에서 두 주인공은 격렬한 섹스를 즐긴다. 아니 섹스를 '투쟁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들을 '혁명'의 적으로 규정하여 동아줄로 꽁꽁 묶은 홍메이의 시아버지이다. 그는 이정의 전적을 몰래 빼돌려 혁명가들의 손에서 구출한 장본인이다. 그것을 주인공들에게 들킨 것이다.

이정을 비롯한 송대 이학은 "인간의 욕정, 욕망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함(去人慾, 存天理)"을 중시했다. 그들에게 인간의 욕정,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성욕은 제일 절제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두 주인공은 이러한 거대 전통에 대한 반항이자 저항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불륜을 통해? 자유 연애를 통해? 작가는 분명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독자는 헷갈린다. 그렇다면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지? 거짓 혁명? 진정한 성애?

그래서 나는 이 책이 하나의 우화(寓話)라는 생각을 한다. 비록 등장인물이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인격화된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 속에서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라는 뜬금없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실제로 책의 주인공들은 자신들 또는 자신들의 행동을 개와 돼지 또는 개와 돼지의 그것에 빗대기도 했다.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그들의 행동이 동물적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인간의 성욕을 거침없이 노골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남자 주인공, 아이쥔(愛軍)은 정말 군대를 사랑했다. 사랑했기 때문에 남자들만의 세상에서 당연히 성욕을 감내했고, 부드러운 애정의 달콤함을 누구보다 기대하면서도 끝내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군대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그는 참아왔던 성욕을, 수도 없이 갈망했던 애정을 마치 정액을 뿜어내는 것처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지닌 권력욕만큼이나 강렬했다. 누가 말한 것처럼 권력의 욕망은 성욕과 비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옌롄커는 소설에서 바로 그런 성애, 성욕에 대해 과감한 노출을 감행했다. 예일 대학교 출신의 중국계 학자 샤즈칭(夏志淸)이 말한 '하드코어 리얼리즘(hard-core realism, 노골적인 사실주의)'인 셈이다. 성욕은 동물로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다. 그리고 문화 대혁명, 즉 혁명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진 온갖 추악한 몰골은 그 기본적인 욕망을 가장 추악하게 드러냈다. 문화 대혁명이야말로 '하드코어'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가 성애에 그처럼 신경을 써서 묘사한 것도 이해가 된다.

옌롄커는 줄기차게 중국의 아픈 과거사(문화 대혁명 시기 강제 수용소와 부정당한 지식인의 애환을 그린 <사서>)를 들춰내고, 지금의 환부(매혈과 에이즈에 대한 쓴 <딩씨 마을의 꿈(丁莊夢)>(김태성 옮김, 아시아 펴냄))를 도려내려고 애쓴다. 그가 '바링허우(八十後, 1980년 이후)' 세대들이 문화 대혁명을 잊지 말고 그 시대를 산 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글쓰기는 앞으로도 중국의 영원한 업보에서 그리고 현재 드러나고 있는 암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그의 글을 계속 지켜보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의 글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뛰어난 역자들 덕분이다. 그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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