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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사람 기부도 많이 해"…'축복' 뒤 숨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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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사람 기부도 많이 해"…'축복' 뒤 숨은 진실?

[그리스도교와 미국 사회] <아메리칸 그레이스>

후발 대형 교회에 관한 연구를 위해 표본으로 삼은 몇 개 대형 교회 교인들과 인터뷰를 하던 때였다. 한데 어떤 사적 모임에서 만난 중년 남자가 그 교회들 중 한 교회의 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식 인터뷰가 아닌 데다 그 일과 무관한 다른 이들도 있던 자리여서 녹음을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연구의 연장선에서 그와의 대화가 흥미진진했다. 당시 그가 신자로 참여하던 교회의 담임 목사에 얽힌 매우 불명예스러운 스캔들로 세간이 시끄럽던 터였기에 대화는 자연 그 교회 분위기와 그의 소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뜻밖이었던 것은 그는 그 일로 별로 동요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 사건에 대해 세간에 알려진 것 이상을 알고 있었다. 무심하게 그 사건을 접하지 않았다는 얘기겠다. 그는 결코 냉담신자가 아니다. 교회 활동에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교회의 일원이라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주에 한 회 이상 교회 모임에 참여하던 사람이었다.

다른 맥락에서 던진 질문에서 그는 직전 주일 목사의 설교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또 그 어간에 기억나는 설교 내용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나의 선 이해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귀속의식이 비교적 강하고 교회 출석률도 평균 수준을 넘는 대학원 학력 이상의 교인이, 담임 목사의 추문에 대해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설교 내용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가. 더욱이 그의 증언에 따르면 적지 않은 그 교회 교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니 말이다.

그 무렵 인터뷰했던 사람들에게서 들은 얘기도 얼추 비슷했다. 그 교회의 교인들은 다른 교회들의 교인들에 비해 교인 자부심이 높았지만, 교회 담임 목사의 스캔들에 대한 충격도 별로 없었고, 설교 내용에 대해서도 그다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편 설교를 주의 깊게 듣지 않는 것은 다른 대형 교회들의 경우도 비슷했다.

이런 현상은 대형 교회 담임 목사나 교계 지도자들의 발언들, 설교들, 행태들로 그 교회들을 이해하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국에서 대형 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의 경우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교회 대형화의 가장 결정적인 이유의 하나임은 익히 알려진 바다. 수천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사람들의 결속체인 대형 교회가 그 규모에 상응하는 복잡한 조직을 두지 않고도 중대한 통합의 위기를 겪지 않는 것은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상징성이 갖는 압도적인 위상 때문이라는 얘기다.

한데 놀랍게도 그 교인들은 그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발언, 설교, 행태들에 그다지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목사의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훨씬 약한 중소형 교회들의 경우, 목사의 설교나 발언들에 교인들이 크게 유념하지 않는 분위기가 비슷하게 혹은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조심스런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하여 그 연구를 진행하면서 목사들의 설교나 발언, 행태 및 교회 간 연합체들의 공식 문건만이 아니라 평신도인 교인들의 생각이나 태도를 살피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아메리칸 그레이스>(로버트 퍼트넘·데이비드 캠벨 지음, 정태식·안병진·정종현·이충훈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 ⓒ페이퍼로드
그런 점에서 로버트 퍼트넘과 데이비드 캠벨의 책 <아메리칸 그레이스>(안병진 외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는 꼭 읽고 싶었던 저작이다. 지난 50년간의 미국의 종교적 지형 변화를 읽어보겠다는 거창한 기획 의도만큼이나 그 연구는 방대한 스케일로 진행되었다.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는, 6년간 3차에 걸친 설문조사를 수행했고, 설문 방식은 45분간의 전화 인터뷰였다. 2006년 거의 6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시도해서 3108명의 설문 결과를 얻었고, 그 이듬해에 1차 조사에서 응답한 이들에게 다시 인터뷰를 시도하여 1909명의 설문 결과를 얻었다. 이것을 수년간 분석하여 2010년 이 책을 펴냈으며, 그 이듬해인 2011년 1차 응답자 중 1685명에 새로 961명을 추가하여 도합 2646명에게 설문한 3차 조사를 시행하여 그 분석 결과를 이 책의 에필로그에 실었다.

그 방대한 조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조사 방식과 기간, 그리고 분석 및 집필 기간까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또한 분석자들의 전문성과 탁월한 해석 능력에 혀를 내두를 만큼 이 저서는 훌륭했다.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지만 우리가 몇 년 전에 시도했던 후발 대형 교회 연구는 불과 20여 명을 인터뷰했을 뿐이다. 그나마 그 작업을 수행하던 내가 일하는 연구소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부터 위험한 기관이라는 낙인이 찍힌 후 줄줄이 약속된 인터뷰가 거절당하는 바람에 더 연구를 수행할 수 없었다.

색인까지 846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 속에 담긴 고급 정보를 일일이 소개하는 건 무모한 일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너무나 많았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래에 인용한 구절과 관계가 있다.

"(…) 좋은 이웃 관계에 대해 종교성이 갖는 실제적인 영향이 나타나는 것은 예배 후 갖는 친구와의 수다나 성서 공부에 참여하는 것 등을 통해서이지 설교를 듣거나 열정적으로 신을 믿는 행위 등을 통해서는 아니다." (568쪽)

종교인, 특히 개신교 신자들이 일반적 미국인보다 기부도 더 많이 하고 더 이타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하여 '더 좋은 이웃'이 되고 있다는 '뜻밖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뜻밖'이라 함은 이들 신자들이 참여하는 예배들의 설교가 기독교 중심주의적 언술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저들'을 나누고, '저들'의 영역, 곧 '교회 밖 사회'에 대해 냉담하고 기껏해야 교화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 공세적 언술들이 넘쳐나는데, 그런 언술들의 수용자 층인 교인들의 사회적 행동들은 이웃에 대해 포용적이고 이타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들이 내놓은 해석은 설교나 예배 행위보다는, 교회에서 동료 신자들과 나누는 친밀한 수다와 사회봉사에 관한 생각 나눔을 통해 형성되는 '종교에 바탕을 둔 사회 연결망'이 이들의 생각과 행동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결과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들에게서 교회란 성직자가 주도하는 설교나 예전에 참여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니 그 이상으로 그들 간의 관계(종교에 바탕을 둔 사회 연결망)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들이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에는 아마도 관계가 이루어지는 장으로서의 교회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성직자-교인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면, 오늘의 교회는 성직자-교인의 관계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교인-교인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직자-교인의 관계는 주로 교리로서 표현되지만, 교인-교인의 관계는 신앙과 일상 간의 문제로 표현된다. 즉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나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로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직장 생활, 혹은 학생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스도인인 나는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 등등.

이러한 '과거'와 '오늘'의 문제를 저자들은 '1960년대의 체험'을 분기점으로 하여 해석한다. 1960년대의 체험이 이후 50년 동안의 변화를 설명하는 축이 된다는 것이다. 즉 1960년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긴 1960년대'라는 얘기다. 저자들이 인용하는 시드니 알스트롬의 표현에 따르면 '긴 1960년대'에는 "지난 수세기 동안, 아니 지난 천년 동안 굳건히 유지되어 왔던 명제들이 의심받기 시작했다."(120쪽)

이후 두 차례의 반작용이 있었는데, 하나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반작용으로 형식상 1950년대의 상황으로 되돌아간 형식을 띠었으나 실은 1960년대의 변화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종교적 보수주의의 재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에는 탈교파적 초대형 교회가 있는데, 그들은 1960년대적 문법인 문화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해 문화 정치적 보수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1990년대와 2000년대의 현상으로, 앞의 종교적 보수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무종교인 혹은 '제도권 밖의 종교인'의 급증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50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긴 1960년대'가 종교적 보수주의 대 무종교인의 급진적 자유주의로 대별되는 양극화 현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양극화로 미국 사회는 전 영역에서 첨예한 갈등과 협상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한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갈등과 협상의 상황이 미국 사회의 통합에 기여했다고 저자들이 본다는 것이다. 갈등이 봉합된 신사협정 시대에는 경계가 모호한 지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계를 자명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각자 그 경계 안에 머물렀다. 해서 결혼도 주로 그 경계 내에서 수행되었고, 사적 친분 관계도 그 경계 내에서 형성되었다. 하지만 첨예한 갈등과 협상의 시대는 경계의 모호함을 도처에서 들춰낸다. 즉 광범위한 경계인을 낳게 되고, 그들의 대대적인 경계 이동을 야기했다. 하여 보수주의적 초대형 교회는 수많은 '회심자'들을 통해서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했고, '무종교인' 현상도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 경계 밖으로 탈출한 이들의 출현으로 통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계의 이동 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조사 결과가 종교 경계를 넘은 결혼과 '절친'의 뚜렷한 증가 추세다. 그런데 이러한 결혼과 '절친'의 양상은 '긴 1960년대'의 양극화 현상이 상호간 배타주의를 지양하고 '우정 연결망'을 확장하게 했다. 하여 '긴 1960년대'적 양극화는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는 얘기다.

여기서 저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종교성,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적인 보수주의적 복음주의/기독교가 배타성과 자기중심주의를 지양하자 사회의 다른 범주보다 훨씬 강한 이타성과 사회적 기부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앞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즉 종교에 기반을 둔 사회 연결망은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볼 수 없는 더 강력한 이타성과 기부 현상을 낳는 요소라는 것이 저자들의 논지다. 교회의 좋은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교회 밖 타자에 대한 이타적 태도가 그들의 근본주의적인 종교적 확신과 맞물리면서 이 더 열렬한 생각의 실천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교회에는 그러한 이타적 실천과 사회적 기부를 실행에 옮기게 하는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이 구비되어 있다는 점에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데 더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물론 저자들은 성적인, 계급적인, 인종적인 불평등을 치유하기 위한 공적 행동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상대적으로 크게 소극적임을 지적한다. 하여 그것이 향후 그리스도교의 과제임을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국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는 타자에 대한 마지못한 수용에서 전략적 인정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조건 없는 수용으로 변화해가는 추세에 있다. 하여 그리스도교는 미국 사회를 점점 더 호혜적인 사회로 만들어갈 주역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아메리칸 그레이스', 미국의 축복이라는 것이다.

내가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저자들의 분석과 해석은 한국에서 교회와 사회를 이야기하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한데 '아메리칸 그레이스'로 끝나는 이 책의 결론적 논지에 대해 얼마만큼의 동의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저자가 '내 친구 알 원칙(My Friend Al Principle)'이라고 명명한 것, 즉 다른 종교적 경험을 가진 이와 우연한 접촉을 통해서 친구가 되면서 그 우정을 통해서 서로에 대한 이질성이 해체되는 체험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한데 그 반대도 있다. 일상적인 사회적 접촉은 이렇게 우정 연결망 형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쾌한 경험이 편견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더욱이 최근 모슬렘에 대한 미국인들의 모습은 미디어를 통한 파급 효과가 '친구 모함메드'와의 다정한 기억을 한순간에 상쇄해버리는 경우를 보여준다. 저자의 표현을 패러디해서 이를 '더러운 모함메드 원칙'이라고 하자. 여기서는 미디어를 통한 간접체험이 직접체험을 잠식해버린 것이다.

하여 방대한 설문조사에서 배타성의 감소와 이타성의 증가가 드러났다고 하지만, 저자들이 그런 두드러진 징후가 드러났다고 주장한 2000년대 미국에서 '더러운 모함메드'에 대한 적대감 또한 뚜렷이 증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미국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적대감의 진원지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관타나모와 아부 그라이브에서 벌어진 '더러운 모함메드'에 대한 가학적 행위들을 생략한 채 이타성의 증가만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메리칸 그레이스' 같은 주장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저질러온 온갖 증오와 만행의 신앙사에 대한 뼈저린 성찰을 생략한 채 종교, 아니 그리스도교의 행복한 미래를 논하는 무책임함을 논하는 것으로 침부될 우려가 있다. 신앙의 가능성은 설문조사의 결과만으로 추론될 수는 없다. 거기에는 혹독한 자기 성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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