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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서 발견한 '미당' 뺨치는 시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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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서 발견한 '미당' 뺨치는 시 한 편!

[꽃산행 꽃글] 길마가지나무 옆에서

길마가지나무 옆에서

길마가지나무라는 나무가 있다. 그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은 전라남도 장성의 백암산에서였다. 나무는 등산로에 바짝 붙어 있었다. 사람이 좋아 사람 곁에 가까이 가고 싶어 그러는 것일까. 하지만 사람의 마음들도 다종다양한 야생화처럼 다 오리무중이라서 쉽게 다치기도 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만난 길마가지나무는 모두가 성한 것이 없었다. 어디든 가지 한두 쪽이 부러져 있었다.

처음 만난 길마가지나무. 그 나무는 교목이 아니라서 그저 가는 줄기 몇 개에 삐쩍 마른 몸매였다. 키도 나보다 작았다. 남녘이었지만 때가 일러 꽃은 달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이상하게 정감이 갔다. 나무 공부를 하면서 이름이 도통 외워지지가 않는데 그 이름은 쏙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기억을 아무리 뒤적여도 어릴 적 시골에서 만난 나무 같지가 않았는데도 그러하였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꽃산행에서 길마가지나무를 보긴 보았다. 만날 땐 어디에서나 길가에 있었고 군락이 아니라 홀로 외로이 서 있었다. 압도적인 꽃들 옆에서 그저 있으나마나한 존재. 그렇게 등산로 옆에서 울긋불긋한 나무들 곁에 시부직이 서 있다가 시나브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 산에 가더라도 그저 서너 개체, 여전히 삐쩍 마른 몸매로.

한반도에서 굳이 보물섬을 하나 꼽으라면 어디일까. 봄이면 바람난 이들에게 섬이란 섬은 모두 보물이겠지만 그중에서 이름 자체가 보물인 곳도 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를 테지만 나는 특히 진도, 하면 곧장 보물섬을 떠올리게 된다. 몇 가지 개인적인 체험과 더불어.

경주에서 올해 첫봄 맞이를 하고 굳이 균형을 맞추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뜻밖의 기회가 생겨 지난주에는 진도를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진도 야산의 어느 모퉁이에서 올봄의 선물처럼 길마가지나무를 만났다. 예의 나무는 길가에 서 있었다. 다행인 것은 야트막한 산이라 등산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길마가지나무는 꽃을 제대로 활짝 피우고 있었다. 그래서 활짝 피운 꽃을 그대로 건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 길마가지나무. ⓒ이굴기

아직 철이 일러 발아래에 야생화가 거의 없는 때였다. 생강나무가 노란 꽃을 드문드문 달고 있을 뿐. 드물게 노루귀, 현호색, 산자고, 개구리발톱이 있을 뿐. 그래서 내 눈과 비슷한 높이에 달린 길마가지나무의 꽃을 보면서 미당의 '冬天'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그랬다. 진도 어느 야트막한 산의 호젓한 길모퉁이에 있는 길마가지나무를 만났을 때. 그 길마가지나무의 활짝 핀 꽃을 보았을 때. 적어도 내 눈에는 길마가지나무 꽃들이 공중에 떠있는, 움터나는 눈썹과 긴 속눈썹을 제대로 갖춘 한 세트의 눈(眼) 같았다. 그 꽃의 높이를 좀더 정교하게 가늠한다면 실제 내 눈썹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도 같았다. 조금 각도를 달리 하면 노란 수술은 파르랗게 떨리는 여인의 속눈썹!

▲ 길마가지나무의 꽃은 동천을 배경으로 속눈썹이 긴 눈처럼 떠 있었다. ⓒ이굴기

미당은 창작 과정에서 마음에 쏙 드는 시를 낳고 나면 노루처럼 방안을 떼굴떼굴 굴렀다고 한다. 자신도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 주체 못할 희열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아마 저 정도 '동천'급의 시를 짓고 나서 미당은 몇 바퀴를 굴렀을까. 모르긴 몰라도 구들장이 패이도록 여러 날을 구르지 않았을까.

시인이라고 꼭 시를 지을까. 당장 여기 진도의 야산에 '동천'에 필적하고도 남을 시 한 편이 있다. 그것은 마침 저기에 핀 노루귀! 가늘고 연약한 줄기에 뽀얀 솜털이 빽빽한 야생화. 고운 흙이 어렵게 토해낸 한 편의 시(詩)!

쓰지는 못해도 읽을 줄은 안다. 떼굴떼굴 등을 대고 구를 자격은 없지만 죽은 낙엽 위에 바스락거리며 엎어질 줄은 안다. 나는 한 편의 시를 읽기 위해 내 발등 높이의 뜬, 노루의 귀를 닮았다는 노루귀 앞에 착 엎드리는 것이었다.

▲ 길마가지나무의 꽃 근처에서 만난 노루귀.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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