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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테러든지 보호해 주겠다!"

[해방일기] 1948년 3월 20일

1948년 3월 20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는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통합으로 이뤄진 단체다. 독촉협의회는 1945년 11월 이승만을 중심으로 민족 통일 전선을 지향하여 만들어진 단체였고 총동원위원회는 그 해 연말 반탁 운동의 열기 속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1946년 초 신탁 통치안을 둘러싸고 좌우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우익 통합을 위해 독촉국민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통합 당시 총동원위원회의 기세가 드높은 반면 독촉협의회는 유명무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록 총재를 이승만으로, 부총재를 김구로 하였지만 독촉국민회의 주도권은 김구 쪽이 가질 전망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독촉국민회가 완전한 이승만의 사조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조직의 달인' 신익희가 김구 쪽에서 이승만 쪽으로 줄을 바꾼 것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에 신익희가 이승만과 결별하며 유림에게 합작을 청했을 때 유림에게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호통을 들은 일이나(1946년 8월 4일 일기) 신익희가 자유신문 사장이 되어 김구를 고문으로 내세운 것을 김구가 정면 반박한 일이(1946년 11월 23일 일기) 모두 이 '변절' 때문이었을 것이다.

독촉국민회 제6차 전국대표자대회가 3월 18~19일 양일간 시공관에서 열렸다. 총재 이승만의 훈화에 이어 부총재 김구의 치사를 대독하는 중 일부 대의원의 맹렬한 중지 요구로 대독이 중단되었다. 남북 협상론을 내놓은 김구의 정치적 고립이 확인되는 해프닝이었다. 치사 낭독 중단 사실을 회의록에 남기지 말자는 제안이 둘째 날 회의 중 있었으나 표결에서 회의록에 그대로 남기자는 주장을 다수 대의원이 지지했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0일)

김구의 세력 기반은 한독당과 국민의회밖에 남지 않았다. 독촉국민회 대회의 결의 사항 중 "한국민족대표단은 우리 전 민족의 최고 기관이니 우리는 절대 지지하는 동시에 그 지시를 복종하기로 맹서한다"는 항목이 이 사실을 분명히 했다(<경향신문> 1948년 3월 18일).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우익에서 주장하는 기구로 국민의회와 민대가 있었는데 김구는 양자 통합을 위해 계속 노력해 왔다. 당시 재판이 진행 중이던 장덕수 살해 사건도 이 통합 노력과 관련된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두 기구를 대표자 대회 없이 약식 절차로 통합한다는 발표가 1947년 1월 8일 나왔으나, 이것은 김구 측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김구가 남북 협상론으로 돌아선 중요한 이유도 이 통합 노력의 좌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촉국민회가 민대를 "전민족의 최고기관"으로 확인한 것은 국민의회의 권위를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독촉국민회 대회 결정 중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김두한 판결의 재고와 특별 선거구 설치를 당국에 진정한다는 것이다. 특별 선거구란 월남민 수가 460만 명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대표할 선거구를 남조선 주민의 선거구와 별도로 설치해 달라는 단독 건국 추진 세력의 요구였다. 현실성 없는 요구를 정치 공세의 일환으로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두한 얘기는 왜 나온 것일까? 1947년 4월 중순 좌익 활동가들을 납치 살해한 '대한민청 사건'은 미군정으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악질 범죄였다. 그런데 7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김두한에게 벌금 2만 원 등 경미한 판결이 나오자 미군정은 상고 상태에서 이 사건을 미군 군사법정으로 이관했다. 1948년 1월 22일부터 2월 12일까지 군정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그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하지의 감형 조치 후 3월 15일 발표했다.

"김두한 사형 재심에서 언도"

조선인 재판소에서 이미 판결을 받은 김두한 김영태 등 16명에 관한 군률 재판은 조사위원회에서 지난 2월 12일 그 심리를 마친 후 그 내용 발표를 보류하고 있던 바 지난 15일 조선주둔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즉 동 조사위원들은 김두한·김영태·신영균·홍만길·조희창·박기영·양동수·임일택·김두윤·이영근·이창성·송장환·고경주·김관철 등 14명에 교수형으로, 문화태·송기현 등 2명은 종신형으로 판결하였는데 하지 중장이 다시 재판한 결과 김두한 교수형, 김영태·신영균·홍만길·조희창 4명은 종신형으로, 박기영·양동수·임일택·김두윤·이영근·이창성·송장환·고경주·김관철 등 9명은 30년 형으로, 문화태·송기현 2명은 20년 형으로 각각 감형 수감되었는데 하지 중장으로부터 수감장소가 명령될 때까지는 미군 제7사단 구금소에 임시 수감 중이라 한다.

그리고 김두한 사형에 대하여서는 교수 집행 전에 미국 극동사령관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18일)

테러가 활개 치는 해방 공간의 남조선에서도 '군계일학'이라 할 극한 테러의 상징 김두한의 교수형이 확정된 것이다. 그런데 이 발표가 나오자 독촉국민회에서 그 감형을 진정하고 나선 것이다. 23일 이화장에서 열린 민대 회의에서도 김두한 감형 추진이 결정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25일자) 선거를 앞둔 급박한 상황 속에 김두한 구명이 이승만 세력의 큰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결국 김두한은 형이 집행되지 않은 채 이승만 정부 수립 후 감옥을 빠져나오게 된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 따르면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어 있다가 형 집행 예정일 며칠 전 정부 수립으로 모면했다고 하는데, 그 경위는 확인하지 못했다.)

1948년 10월 8일자 <경향신문>에 대전형무소에 복역 중인 김두한이 장출혈로 보석될 것 같다고 하는 기사가 나온 후 그에 관한 기사가 없다가 이듬해 6월에야 신문 지면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김두한 등 송청"

지난 5월 30일 종로서에 검거되어 그간 문초를 받고 있던 대한청년단 건설국장 김두한(31), 김준경(40), 박중운(30) 등 3명은 협박 공갈 무기불법소지 불법감금 등의 혐의죄 등으로 17일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청되었다. (<경향신문> 1949년 6월 18일)

김두한이 당시 테러리즘의 상징이었던 만큼 그를 보호한다는 것은 "우리 쪽 테러라면 어떤 테러라도 감싸준다"는 선언이었다. 1948년 3월은 그런 선언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단독선거 감행을 위해 극한 테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집권 후 그가 풀려나 활동을 재개한 것도 테러리즘의 수요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5·10 선거의 공포 분위기에 대한 예고가 분명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엔 조선 위원단은 선거의 자유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었고, 기권의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3월 18일 유엔위원회 그랑 정보관은 기자와 문답에서 이 점을 다시 밝혔다.

(문) 만약 선거가 있어서 투표를 강요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 그것은 위법이며 자유스러운 분위기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문) 합법적으로 선거를 반대할 수도 있는가?
(답) 그 문제에 대하여는 말할 수 없으나 군정 당국에 제출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관한 위원단 건의 가운데 이런 점도 포함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1948년 3월 19일)

김구-김규식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자들이 선거 거부를 표명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거 불참여가 인민의 중요한 의사표시 방법이었기 때문에 기권의 권리가 부각되었다. 인민에게 선거 참여를 강요하는 것이 분단건국 추진 세력에게 최대의 과제였다. 5월 18일 독촉국민회 대회에서 이승만 훈화 중 이런 대목이 선거 참여를 강요하는 논리였다.

"공산당을 비롯한 선거를 반대하려는 사람들은 갖은 선동과 모략으로 또는 파괴로써 선거를 방해하려고 할 것이니 우리는 이 점에 특히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남북 통일 선거가 아니므로 대외적 체면상으로 참가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으나 남북통일선거를 하지 말자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0일)

3월 18일자 <동아일보>에 기묘한 기사 하나가 실렸다. "이해 곤란한 언동, 군정 연장이 내조(來朝) 목적?-서 박사 발언 각 방면에 충동"이란 제목인데, 서 박사의 발언 내용은 보이지 않고 그 발언에 대한 극우 단체의 비난만 소개되어 있다.

총선거대책위원회 : "총선거를 반대하는 자는 조선의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자이다. 서재필 박사가 무엇 때문에 총선거를 반대하는 암시를 하고 이 박사를 중상하는지 알 수 없다. 결국 그는 조선 독립과 조선 독립을 도우려고 내조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도구가 되려고 온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민족통일총본부 : "서재필 박사가 이승만 박사를 중상하고 오늘 총선거를 반대하는 암시를 발표한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아마 조선말도 할 줄 모르는 서 박사의 말이 와전되어 악질 반동분자가 역선전한 것으로 보인다."

반탁독립투위 : "총선거를 반대하는 암시를 하는 자가 미군정의 관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유감이다. 미국은 조선 독립과 자주 정부 수립을 도우려고 총선거를 지지하는 우방인데 그러한 자가 미군 관리 중에 있다면 미국 정부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 것이다."

국민회 선전부 : "정치적 이해관계로 총선거를 반대하는 악질 반동분자의 도량이 날로 심하여 가는 금일에 조선 독립 정부 수립을 도우려는 미국의 현지 관리로서 우리 독립에 협조하러 온 줄 알았던 서재필 박사가 의외로 선거를 반대하는 반동분자의 도구가 되어서 3월14일부 신민일보 등에서 최고 영도자인 이 박사를 중상하여 민중과의 이간을 일삼는 것은 진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며 일 미국 군정관리로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은 결국 군정을 연장할 기도가 아닌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민일보>에 실린 서재필의 발언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총선거 반대의 암시와 이승만에 대한 중상이라고 한다. 온갖 단체들이 야비한 언사까지 써서 다구리에 나서는 것도 볼 만하고, 원래 발언은 빼놓고 그에 대한 비난만 대서특필하는 <동아일보>, 역시 대단하다.

5·10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판별할 첫 번째 기준이 기권할 권리의 보장 여부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유엔 소총회와 조선 위원단의 "중앙 정부 수립을 위한 가능 지역 선거"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조선인이 자기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선거 참여 거부였기 때문이다. 분단 건국 추진 세력이 이 권리를 묵살하고 싶어 한 것은 당연한 일이거니와 미군정은 이 권리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나? 3월 22일 하지 사령관의 특별성명 뒷부분에 드러나 있다.

"통일 위한 총선거, 참가 거부면 적화 초래-애국적 대사업에 충성을 다하라."

(…) 만일 조선 국민이 투표하지 않는다든지 또는 오도된 지도자들이 참가를 거부하고 자기 부하들에게 선거를 거부하도록 종용한다든지 만일 소수의 진정한 애국자만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여 투표를 하면 그와 같이 조직된 정부는 전조선 국민의 희망을 충분히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조선독립의 지연을 초래하며 또 그 결과로 인하여 공산주의의 노력이 팽창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그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이다.

조선 중앙 정부를 수립하여 분열된 국가를 통일되도록 공작하는 것도 여러분의 자유요, 또는 혼란을 가져오는 것도 여러분의 자유요, 일 공산당 하의 위성국가가 되어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도 여러분의 자유이다. 외국인으로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어떤 결정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선거는 자유이여야 하고 여러분의 의견도 실행되어야 한다. 여러분만이 이것을 결정할 수 있다. 정당의 지도자이든지 보통 유권자든지를 막론하고 총선거에 참가 불참가는 여러분의 자유이다. 만일 여러분이 참가하여 후보자를 선거하고 누구나 다 투표하여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양성한다면 본관은 이상 말한 책임과 권위 있는 대의원을 맞이할 것이요, 만일 여러분이 참가를 거부한다면 그 결과는 전 조선을 혼란과 공산주의와 외국의 노예로 도입(導入)할 위험에 봉착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23일)

'자유'란 말을 거듭해서 쓰는데, 가만 보면 반어법이다. 형식적으로는 '자유'지만 그런 자유를 누리려 드는 것은 '방종'이란 뜻이다. 완전 협박이다. 조병옥이 앞장서서 수십만 '향보단'을 조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기권의 권리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는데, 미군정이 그것을 승인하는 까닭을 여기서 벌써 알아볼 수 있다.

위 원고를 끝낸 뒤 <신민일보> 1948년 3월 14일자에 실린 서재필-신영철(신민일보사 사장) 대담 기사 "구국 투쟁과 신국민 운동" 내용이 <서재필이 꿈꾼 나라>(최기영 엮음, 푸른역사 펴냄) 349~359쪽에 실려 있는 것을 찾았다. 이승만 추종 세력이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이는 대목을 옮겨놓는다.

"이 박사는 하지 중장을 조선으로부터 퇴임시킬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 박사가 조선에 와서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가라고 하여 노골적인 반소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선에 있어서의 미소 관계는 험악하여지고 하지 중장의 입장은 대단히 곤란하여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미국 정부는 극우의 이 박사를 지지하는 것은 조선 통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하지 중장에게 중간 노선을 가는 사람을 물색하라고 지령을 내린 것입니다."

"미소의 대립을 격화시키고 조선의 허리를 잘라서 남은 미, 북은 소로 대진(對陣)시켜 놓으면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쯤을 예견치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정치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견식 있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남북 분할을 도(賭)하고라도 단선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는 그 해결점을 미소 전쟁에서 구하려 하고 미소 전쟁이 발발하여야만 조선 민족의 살 길이 나선다고 극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소가 싸울 것인지 안 싸울 것인지는 몰라도 조선을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파괴주의자이니 파괴주의자가 어찌 애국애족하며 건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류는 평화를 희구하고 있고 평화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지옥인데 자기에게는 비누 한 장 변변히 만들 능력도 없으면서 남에게 전쟁을 권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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