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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색에 빠진 왕, 하늘은 홍수로 답했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알고도 가는 길, 그 세 번째

☞전회 바로 가기 : 알고도 가는 길 ②아들 낳은 미녀를 총애한 그 왕의 속내는?

후궁 장 씨를 위해 별당을 짓다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내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면서 비판을 모면하는 한편, 뒤로는 별당 공사를 계속했던 숙종.

김수항이 23세 때 본 둘째 아들로, 대사성이었던 김창협은 숙종의 그런 행태에 대해 "스스로는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사관은 "김수항이 죄를 입게 된 것을 두고, 그의 아들 김창협(1651~1708년)이 한 말 때문에 임금의 마음에 불평이 남아 김수항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농사짓는 바위

나는 지곡서당에서 <고려-조선 열 명의 이름난 문장 뽑아보기(麗韓十家文鈔)>라는 편집본을 읽으며 김창협을 처음 알았다. 이 책은 지금도 고전 문학을 하는 학자들의 필독서이며, 번역본도 나와 있어 일반 시민들도 읽을 수 있다. 또 그의 저술을 모은 <농암집(農巖集)>이라는 문집이 남아 있고, 일부 번역되어 있다. 이 분에 대해 설명하려고 해도 책 한 권으로는 어림없지만, 오늘은 우리 주제와 관련하여 조금만 언급해둔다.

▲ 농암 김창협.
그의 호 농암은 영평(永平, 포천의 옛 이름) 응암(鷹巖, 매바위)에서 유래한다. 1679년, 그는 이곳에 집을 마련해두었는데, 1689년(숙종 15년) 부친 김수항이 사사(賜死)되자 세상에 나갈 뜻을 버린 김창협은 응암을 농암으로 고치고 여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였다. 농암, '농사짓는 바위'……. 그 때의 심정을 알 수 있을 듯하다. 서울 집에 혼자 남아 있던 어머니를 자주 뵙기가 어렵게 되자 1697년 8월에는 삼주(三洲, 경기도 양주군)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래서인지 농암이라는 호와 함께 삼주라는 호도 썼다.

그의 학문이 높았던 것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숙종 8년(1682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6품 수찬(修撰)으로 등용된 뒤, 대부분 홍문관 관원으로 있었다.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 관원은 '명예로우면서도 잘 나가는' 관직이었다. 똑똑하고 잘 나가면 그대로 살아도 아쉬울 것이 없을 텐데, 이 분은 대놓고 바른 말을 하였다. 그것도 한참 여자에 빠져있던 젊은 숙종에게.

"김치를 보내주어 고맙네"

몇 세대에 걸쳐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문(名門)이면 경제력도 있을 법한데, 이 분은 그런 주변도 없었나보다. 하긴 조선의 명문 집안이 경제력만 가지고 되는 경우는 없었다. 순조 이후로 넘어가면서 서서히 왕조의 붕괴와 함께 그런 양상이 나타나지만, 김창협이 살았던 무렵의 조선은 많이 달랐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장희빈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하면서, 이미 세상을 뜬 아버지 김수항도 복관되었으나, 이런 상황의 변화가 경제적 안정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삼주에 살 때 형편을 알 수 있는 편지 몇 장이 전해진다. 김시좌(金時佐, 1664~1727년)라는 집안 조카이자 제자로 <농암집> 편찬을 주도했던 인물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김창협(金昌協)의 농암진적(農巖眞蹟)>(심영환 정서, 장유승·배미정 역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펴냄, 2012년)에 수록되어 있다.

새 집이 허술하여 "물건을 아무렇게나 보관하면 도둑질을 가르친다"는 말이 걱정되었는데, 과연 지난밤에 도둑이 들어 집안에 있는 것을 싹 쓸어 가버렸네. 이미 깨진 독과 같으니 어쩔 수가 없지만, 앞으로 근심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1697년 4월 6일.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물건을 아무렇게나 보관하면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이고, 얼굴을 예쁘게 꾸미면 음탕함을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네는 전부터 나의 어려운 처지를 자주 도와주었네. 매번 물건을 받으니 마음이 매우 불편하네. 하지만 지금처럼 군색한 때에는 이쪽저쪽에서 빌리기도 좋지 않아 어제 저녁 이후로는 거의 불을 피워 밥을 해먹지 못할 지경이네. 일단 부득불 자네 말대로 가져다 쓰겠네. 고맙고도 부끄럽네. (1699년 2월 19일)

자네가 보내준 신선한 채소는 시골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정말로 고맙네. (1704년 3월 16일)

제자 공부 챙겨주는 말을 하다가, 병든 종(奴)에게 쓸 약을 부탁하다가, 또는 지은 글을 상의하다가, 사이사이에 농암은 미안하고 부끄러워하면서 김시좌에게 도움을 청하고 받았다.

▲ 김창협이 김시좌에게 1704년(숙종 30년) 2월 4일에 보낸 편지. 왼편 작은 글씨로 쓴 추신에, "김치를 계속 보내주어 고맙네. 다만 약을 먹고 있으니 무김치는 먹을 수가 없네(沈菜蒙繼送爲荷, 但方服藥, 若是蘿葡, 則喫不得矣.)"라고 적었다. ⓒ오항녕

아버지와 아들

농암은 아버지 문곡 김수항의 문집 <문곡집(文谷集)>을 책임지고 편집했다. 그가 <문곡집>을 완성한 것은 위 편지들이 오고간 삼주(양주군)에 살 때인 기묘년(1699년, 숙종 25년)이었다. 그 <문곡집>에 다음과 같은 편지가 실려 있다.

전후로 매번 너희들의 편지를 볼 때마다 바쁘다는 뜻이 많이 있으니, 이미 노는 데 분주하여 조용히 편지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겠다. 듣건대 너희들이 하루 종일 나가 놀면서 서책을 완전히 젖혀두었다고 하더구나. 앞서 내가 보낸 편지 가운데 추위를 무릅쓰고 나가 놀지 말라는 뜻은 과연 어디로 갔느냐.

이는 필시 너희들이 내가 멀리 나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때를 틈타 떼 지어 놀면서, 내가 멀리서 걱정하는 마음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니 이는 아버지를 섬기는 도리를 모르는 짓이다. 내가 멀리 나갔더라도 너희 어머니가 계신데 교훈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는 어머니를 섬기는 도리를 모르는 짓이다. 사람이 되어서 부모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이 부모를 아랑곳하지 않더라도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마음에는 부득불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부지런히 배워서 사람이 되는 것은 진실로 바랄 수 없겠지만, 이렇게 혹독한 추위에 잡배들을 쫓아다니면서 밤낮으로 놀게 되면 반드시 큰 병이 생길 것이다. 큰 병이 생기면 나나 너희 어머니의 걱정이 어떠하겠느냐. 오늘 바라는 것은 오직 떼 지어 놀러 다니지 말라는 것이지, 배우고 배우지 않고는 논할 틈도 없구나. 황 교관 집에도 가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창집, 창협에게 보내는 답장(答集協)')

추운데 나가 놀지 말라, 에미, 애비 걱정시키지 말라, 몰려다니며 놀지 말라, 황 교관에게 배우러간다는 핑계로 딴 데 가지 마라(요즘 말로, 땡땡이치지 마라) 등등. 아마 한창 자랄 때 쓴 편지일 것이다. 황 교관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서울에 있는 사학(四學)의 교관으로 있었는데 농암 형제가 배우러 다녔던 듯이다.

요즘에 친한 친구나 연인끼리 이름 두 자 중 한 자를 줄여, '항녕' 대신 '녕', '윤희' 대신 '희'라고 쓰는 경우가 있다. 위의 편지도 '답집협(答集協)'이라고 하여, 아들의 이름인 창집과 창협의 창 자를 빼고 각각 '집', '협'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면 이름을 줄여 부르는 습관은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집'은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으로 문곡의 큰아들이고 농암의 형이다. 문곡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세간에서는 이들을 육창(六昌)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들 형제의 이름이 너무 헷갈려 아예 집(集)-협(協)-흡(翕)-업(業)-즙(緝)-립(立)이라고 외워버렸다. 김창집은 경종 때 벌어진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사사됨으로써 김수항에 이어 큰아들까지 부자가 부당한 권력 행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훌륭하게 자란 아들들이지만, 어렸을 때는 다 비슷했나 보다. 어울려 놀기 좋아하고, 부모 말 안 듣고…. 농암은 이 편지를 갈무리하여 아버지의 문집에 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곡집> 맨 뒤에 실린 '발문'에서 농암이 "눈물을 흘리며 쓴다"고 한 말이 허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자식들이 뒤늦게 깨닫듯이…. 무엇보다 자신의 상소로 시작된 숙종 12년의 이 위험한 국면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장 씨의 오라비 장희재의 에피소드

다시 농암이 숙종을 비판하던 무렵으로 돌아와,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좋은 두 가지 사례를 들어두고 가자.

1683년(숙종 9년) 3월 13일은 인조반정(仁朝反正)의 회갑(回甲)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년)의 집에서 잔치를 열었다. 정명공주는 인목대비의 딸이자 영창대군의 누이로, 광해군 치하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인조반정을 맞았고, 이후 홍주원(洪柱元)과 혼인하고 장수하였다. 이 날 조정 대신 이하의 관원이 공주의 집에 모였는데, 기녀를 다수 모아 술을 따르고 춤과 노래를 하게 하였다.

그 중에 숙정(淑正)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녀가 노래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술을 마신 후 손님 가운데 어떤 사람이 숙정과 더불어 희롱하려 하였는데, 숙정은 후궁 장 씨의 오라비인 장희재의 첩이었다. 숙정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의 종이었다. 동평군은 인조 때 후궁으로, 김자점(金自點)과 결탁, 친청파(親淸派)를 형성하여 반역을 도모했다가 처형된 귀인(貴人) 조 씨의 소생이었다. 숙정을 통해 장희재는 동평군과 결탁하였다.

잔치가 열리던 날, 장희재는 포도부장(捕盜部將)으로서 대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몰래 숙정을 불러내어 달아나 버리니 어떤 사람이 대신들에게 그 일을 일렀다.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조정의 큰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술을 따르는 기녀가 먼저 달아났으니 사체(事體)가 놀랍다"라고 하고, 비변사 낭관(郞官)에게 기녀를 불러 데리고 간 그 남편을 곤장으로 엄하게 다스리게 했다. 곤장을 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희재는 이 일 때문에 뼈에 사무치게 독을 품었는데, 이 일이 1689년 사화의 빌미가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숙종 실록> 권17 12년 12월 10일)

또 다른 배경, 조사석(趙師錫)

한편, 장 씨의 후원자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 씨가 있었다. 후궁 장 씨는 조대비(趙大妃)를 섬겼는데, 이는 조사석(趙師錫)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조사석은 대비의 재종(再從, 6촌) 동생이었다. 또 후궁 장 씨의 어미가 조사석의 처갓집 종이었는데, 조사석이 젊었을 때 사사로이 통했고 장가(張家)의 아내가 된 뒤에도 여전히 때때로 조사석의 집에 오갔다고 한다. (<숙종실록> 권18 13년 6월 16일)

장 씨를 쫓아냈던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돌아가고 나서 장 씨가 다시 입궐하여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결국 조사석은 정승에 임명되었다. 숙종은 조사석을 정승에 임명하기 위해 다섯 차례나 후보 명단을 다시 올리라고 했다. (<숙종 실록>에 세 번 반려했다는 기록도 같이 나온다.) 의정부에서 올린 후보에 조사석이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보로 올리지 않으면 아무리 임금이라도 낙점(落點)할 재간이 없는 것이다. 통상 세 명의 후보(望) 중에 임금이 한 사람을 낙점하는데, 대개 수망(首望), 즉 후보 중 1순위를 낙점하는 것이 관례이다. 특히 대신의 경우는 그러하다. 그러므로 숙종의 조사석 임명과 같은 사례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인사였다. 김수항은 조사석을 후보로 올리지 않았고, 숙종은 김수항이 면직된 뒤에나 조사석을 정승으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숙종은 김수항이 병으로 사직하기를 기다렸다는 말도 돌았다. (<숙종 실록> 권18 13년 7월 24일)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후궁 장 씨의 지원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길거리에서의 말과 항간(巷間)에서의 평론이 갈수록 더욱 떠들썩하면서도 감히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숙종의 장 씨에 대한 애착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한 것이다(<숙종 실록> 권18 13년 9월 11일).

흉년에도 불구하고

숙종 12년 12월, 숙종은 장 씨를 숙원(淑媛)으로 삼고, 숙원방(淑媛房)에 사패 노비(賜牌奴婢) 100명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는 "왕자(王子)를 많이 두어야 하는 도리 때문에 이미 숙의(淑儀)를 선발했는데, 또 반년이 지나지 않아 장 씨를 책봉하니, 궁중 안에서 엄격한 명분(名分)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성색(盛色, 미인)을 경계하라는 말이 또한 이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고 비판하였다(<숙종 실록> 권17 12년 12월 14일).

아울러 효종(孝宗)은 궁인 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옹주(翁主)를 낳기까지 했지만 즉위한 뒤에도 끝내 봉작을 내리지 않아서 지금까지 칭송받고 있다고 상기시켰다. 할아버지의 사례를 들어 손자를 압박했던 것이다. 숙종은 "효종의 일은 사실과 다르다", "억측이 심하다"고 개탄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과도한 '총애'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숙원방에 사패 노비를 내려줄 때 농지에 대한 조항을 누락했다며, 150결(結)을 나누어주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승정원에서는 "팔도(八道)에 흉년이 들어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길에 널려 있어서 막중한 종묘(宗廟)의 제향(祭享)도 절감하자는 의논이 있는 상황입니다. 숙원방에 농지를 주는 일 같이 시급하지 않은 일은 천천히 의논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가까스로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갈라 주도록 하였다(<숙종 실록> 권18 13년 2월 15일).

민심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1687년(숙종 13년) 6월에 큰 수해(水害)가 났다. 지방에서 올라온 장계에 의하면 모든 도의 참상이 똑같았다. 강양도(江襄道, 강원도)의 경우 원성(原城, 원주) 읍내는 급하게 내리는 비가 막 쏟아져 기세가 강(江)을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집이 물에 잠기어 파괴된 것이 164호나 되었고 살림살이도 남김없이 떠내려갔으며 백성들이 도망하여 피할 적에 물에 휩쓸려 죽은 사람도 무척 많았을 정도로 예전에 없던 큰 이변이었다. 사관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옛적의 역사를 보면, 큰 수해는 여자를 총애할 때 나타나는 징조라고 했다. 이때 장 씨에 대한 폐총(嬖寵)이 한창 대단했으니, 이번 수재가 발생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다른 도들도 잇달아 수해 피해를 보고했는데, 사람과 가축이 죽거나 부상하고 집들이 떠내려가고 분묘(墳墓)가 무너진 것이 매우 많았으며, 또한 벼락 맞아 죽은 사람이 많았다.

ⓒ프레시안(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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