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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오세훈도 사랑한 '디자인', 만능 열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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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오세훈도 사랑한 '디자인', 만능 열쇠일까?

[프레시안 books] 페니 스파크의 <디자인의 탄생>

1.

'주시 살리프'라는 물건이 있다.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디자이너 필립 스타크가 디자인한 레몬즙 짜개다. 이름값을 하느라 무척 비싸다. 우리나라에서 이 물건을 사려면 최소 14만 원을 지불해야 하는데, 참고로 가장 싼 아이보리색 플라스틱 레몬즙 짜개는 1500원도 하지 않는다. 100배나 비싼 거다. 그렇다고 이 물건이 레몬즙을 100배쯤 잘 짜주거나 그만큼 맛있게 만들어주는가 하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이 물건을 구입해 자신의 부엌에, 혹은 장식장에 들여놓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를 '속물 취향'이라 비웃으며 코웃음을 친다.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벌어지는 이런 신경전은 지루할 만큼 똑같은 전개 방식을 따른다. 동원되는 말들도 대략 엇비슷하다.

▲<디자인의 탄생>(페니 스파크 지음, 이희명 옮김, 김상규 감수, 안그라픽스 펴냄). ⓒ안그라픽스
지금 소개하는 이 책 <디자인의 탄생>(이희명 옮김, 김상규 감수, 안그라픽스 펴냄)의 저자 페니 스파크의 입장은 전자, 그러니까 기꺼이 이 아름다운 오브제를 위해 지갑을 여는 사람에 가깝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알레시 사를 위해 디자인한 레몬즙 짜개 '주시 살리프'는 아마도 그의 디자인 중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예술과 디자인의 섬세한 경계를 잘 표현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인공물을 디자인한다는 것이 단지 사물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로고와 이쑤시개>(김현희 옮김, 세미콜론 펴냄)를 쓴 디자인 연구가 존 헤스켓의 입장은 좀 다르다. 그는 "이 화려한 오브제로 부엌을 장식하려면 더 단순하지만 훨씬 유용한 일반 레몬즙 짜는 기구의 20배가 넘는 비용이 든다. 사실 이 '압착기'는 레몬즙보다는 수익을 짜내는 기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얘기한다. 전자가 디자인 교과서적인 얘기라면 후자는 저널리즘의 어투를 닮았다.

이 중 어느 쪽이 더 그럴 듯하게 들리는가. 아마 나라면 존 헤스켓의 손을 들어 줄 것이다. 페니 스파크가 디자인의 가치를 쉽사리 이상화하는 데 반해 존 헤스켓은 현대 사회에서 디자인의 가치에 수반하는 이면 중 하나를 직설적으로 언급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페니 스파크의 입장이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아무 경계심 없이 무조건 디자인을 옹호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명확하게 선을 그어 적군과 아군을 가리는 건 아니지만 이 책에서 그녀가 옹호하는 디자인의 가치는 비교적 선명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속물 취향이나 전후 미국의 교외 가정 생활로 대표되는 물질주의보다는 바우하우스로 대표되는 기능주의에 살짝 더 기울어져 있다든지, 로라 애슐리나 마사 스튜어트로 대표되는 꽃무늬 취향보다는 '재료의 진실성'을 추구하는 전통에 한 표를 더 얹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일반적으로 싸구려 취급을 받는 플라스틱에 디자이너들이 쏟은 엄청난 노력을 길게 서술함으로써 플라스틱이라는 합성 재질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시 살리프에 대한 그녀의 서술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디자인의 역사를 따라가며 다종다양한 디자인적 성취를 객관적으로 전달해주는 데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엄정한 판관보다는 신중한 사관의 입장을 자처하며 말이다. (아마 그녀의 이런 입장은 이 책의 시작이 다큐멘터리였다는 데서 기인할 것이다.) 그 결과 마르셀 브로이어의 강철관 의자와 베르네르 판톤의 하트 의자가, 디터 람스의 브라운 제품과 드로흐의 가구들이 아무런 충돌 없이 사이좋게 나란히 서술된다. 연륜이 묻어나는 그녀의 설명은 디자인을 공부하는, 혹은 거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디자인사(史) 개론서로서 흠 잡을 데가 없다. 하지만 책의 완성도를 떠나, 이런 디자인에 대한 착한 서술이 나로서는 마냥 기껍지만은 않다.

2.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낯익은 말이다. 이건희의 디자인 경영이나 오세훈의 디자인 시정까지 끌어들일 것도 없다. 디자인은 모든 것이라는 말은 신문과 방송에 차고 넘친다. 이 말에 시비를 거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건 사실 이 말이 거의 아무것도 지칭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하고 싶은 거다. 그런 점에서 이 문장은 '모든 것이 구근식물이다' 혹은 '모든 것이 코끼리다'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디자인 역사, 비평에 대한 책은 저 문장을 토대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 나간다. 이 책 <디자인의 탄생>도 그렇고, 앞서 인용한 존 헤스켓의 책 <로고와 이쑤시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라고 얘기함으로써 디자인 서술가들은 디자이너들의 창작 활동을 단순한 지적 노동이나 미적 유희가 아닌, 삶과 유리되지 않은 실천적 고민으로 승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만약 정말 모든 것이 디자인이라면 우린 디자인사 대신 물질 문명사를 쓰면 족할 것이다.

인정한다. 이건 지나치게 심술궂은 과민 반응이다. 모든 것이 디자인이라고 해봐야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 말은 그저 디자인 책의 서두를 시작하는 관용구에 지나지 않을 터다. 그렇지만 이 관용구를 반복하면 할수록 디자인의 의미는 흐릿해진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라는 디자인은 왜 이토록 비싸며, 별나며, 때론 불편한 것일까. 왜 주시 살리프는, 마이클 그레이브스의 주전자 '디자인'은 저토록 반짝거리고 아름다운데 그 물건이 놓인 우리의 부엌이라는 '디자인'은 이토록 초라하며, 베르네르 판톤의 의자 '디자인'을 놓았는데도 형광 불빛 아래 우리의 거실 '디자인'은 왜 아직도 후줄근한 걸까. 이 모든 것을 나쁜 디자인, 혹은 값싼 디자인이 너무 많은 현실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 있을까. '좋은 디자인은 천국에 가고, 나쁜 디자인은 모든 곳으로 간다'라는 디자인 격언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차라리 디자인이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라는 말의 무게를 줄이는 편이 디자인의 위신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근원적으로 보자면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은 기능과 형태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디자인의 산물이겠지만 현대 디자인은, 그러니까 매일 우리가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그 디자인'은 다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3.

디자인에 있어 많은 논쟁은 '기능'을 중심에 두고 벌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느슨한 기능주의'의 원칙을 꾸준히 고수한다. 책의 앞머리에서 저자는 "왜 사물은 그런 모양을 가지고 그런 기능을 하는 것일까. 이 책은 그러한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밝히고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기능주의의 대명제를 기계적으로 고수하거나 무리하게 적용하려 하지 않는다. 예컨대, 강철관 의자와 프랑크푸르트 부엌에 적용되는 잣대를 극단적으로 유희적인 멤피스 그룹의 가구나 지독히 장식적인 마르셀 반더스의 제품에 억지로 적용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형태는 욕망을 따른다'든지, '형태는 픽션을 따른다'는 식의, 그러니까 기능의 논점을 중심 없이 풀어놓는 상대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용인하고 있지도 않다. 디자이너와 디자인 매체가 조장하는 말놀이에 놀아나지 않고 자신만의 느슨한 기능주의 원칙을 책 전체에 걸쳐 묵직하게 유지하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 네덜란드 디자이너 그룹 '드로흐'의 일원 마르텐 바스의 '책장이 되자' 연작 중 하나. ⓒ안그라픽스

이런 점에서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등장한 이른바 '비평적 디자인'이나 신모더니즘의 경향에 대해 간단히 언급만 하고 넘어간 것은 퍽이나 아쉬운 대목이다. 저자가 고수하고 있는 느슨한 기능주의적 원칙은 이런 경향과 맞닿았을 때 가장 빛을 발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드로흐의 작업을 두고 형태와 기능 사이를 두고 벌어지는 '냉소적 유머'라 평했듯, 비평적 디자인이나 신모더니즘은 디자이너와 생산의 입장만을 강조하지 않고, 사용자의 맥락을 디자인 과정에 끌어들이는 식으로 '기능'의 방향과 폭을 넓혔다. 이 성과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추켜세우는 실수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이들의 움직임이야말로 저자가 첫머리에 제기했던 질문의 가장 최상급의 대답이 될 것이다. 또한 예술, 혹은 다른 분야와 디자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최근 디자인과 인접 분야에서 일고 있는 움직임은 더 역동적이고, 그만큼 폭넓은 관점을 제시해줄 수 있었을 터다.

4.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나는 절대로 디자인을 혐오하지 않는다. 디자인이란 오로지 남과 나를 구별하는 데에만 쓸모가 있는 액세서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왜냐하면 나도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나는 깨어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디자인에 할애하는 성실한 디자이너다. 나는 디자인이란 유익한 행위이고 괜찮은 직업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이 그럴듯해지는 경우도 자주 마주친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 이상의 평가와 자리 매김은 오히려 디자인을 초라하게 만든다. 디자인 스스로가, 혹은 정책 입안자가 디자인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칭하는 횟수만큼 디자인의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맨 앞에서 언급한 주시 살리프를 디자인한 필립 스타크는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의 주서기는 레몬을 짜는 도구가 아니다. 이것은 의사소통의 시작을 뜻한다." 나는 이 말을 읽었을 때 주시 살리프를 앞에 두고 티격태격하는 젊은 부부를 떠올렸다. 하긴 싸우는 것도 의사소통이니 꼭 비웃을 것만도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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