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못 두툼한 <왜 다시 계몽이 필요한가>(쉬지린 지음, 송인재 옮김, 글항아리 펴냄)라는 책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라면 나는 다소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이 문장을 들고 싶다. 이는 '계몽은 어떻게 기사회생할 수 있을까?'라는 이 책 11장의 맨 마지막(472쪽)에 등장하는 문장인데, 원래 이 장의 제목이 중국어 원서명이다. 그리고 부제도 번역본처럼 "현대 지식인의 사상적 부활"이 아니라 "현대 중국 지식인의 사상적 곤경"이다.
다시 말하면 원래 제목은 번역본처럼 단순히 계몽이 필요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중국 사상계에서 계몽은 죽었는데 어떻게 죽은 계몽을 살려낼 수 있을까 하는, 계몽적 지식인으로서 저자의 절박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현대 중국의 지식인의 사상적 곤경이 있다는 것이다.
쉬지린(許紀霖, 1957~)은 상하이에 있는 화동 사범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며 20세기 중국 사상사와 지식인 연구로 꽤 유명한 학자이다.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학술 발표를 한 적도 있고 그가 주편한 책(<20세기 중국 지식인을 말하다>(1·2 권, 강태권 등 옮김, 길 펴냄)이나 논문이 이미 번역되어 소개된 적도 있지만, 현대 중국의 사상계에 관심이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그는 다소 생소한 인물이 아닐까 한다. 이번 단행본의 번역 출판을 계기로 현대 중국 사상계의 다양한 면모가 우리 학계에 알려지게 된다면 매우 다행스럽고도 반가운 일일 것이다.
계몽 진영의 분화
▲ <왜 다시 계몽이 필요한가>(쉬지린 지음, 송인재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
하지만 시장 경제가 심화되어가는 90년대 중반 이후로 중국의 사상계는 점차 분화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분화가 잘 알려진 것처럼 이른바 자유주의와 신좌파의 대립이다. 쉬지린은 이런 중국의 사상계의 지형도에서 나름대로 한쪽에 치우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래서 양쪽 모두로부터 자기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중도적인" 위치에 자리한 인물이다. 한 인터뷰에서 쉬지린은 스스로를 좌익적 자유주의자로 규정하고 있지만 크게 보면 온건한 자유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국가주의, 고전주의, 다원적 현대성
그렇다면 80년대 중국 사상계에서 하나의 컨센서스였던 '계몽'이 어쩌다가 와해 혹은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가. 쉬지린은 이 책에서 그 주된 원인으로 국가주의, 고전주의, 다원적 현대성이라는 세 가지 사조의 유행을 거론하고 있다. 여기서 국가주의란
90년대 이래 자유주의적 방식의 계몽 운동에 도전하는 사조는 중국에 이외에도 많다. 역사주의(12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허무주의, 민족주의, 인민주의, 신유가(新儒家), 신좌파 등이 그것이다. 더구나 급진적 신좌파와 보수적 국가주의 사조, 고전주의(레오 스트라우스)와 국가주의(칼 슈미트)가 동맹을 이뤄(그는 이를 양대 동맹이라 부른다) 자유주의적 계몽을 협공하는 심각하고도 강력한 형세를 이룬다고 보고 있다. 계몽이 죽었다고 그가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실제로 중국의 사상계가 계몽의 사망을 선언할 정도에 이르렀는지는 차지하고라도 계몽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사조가 유행하는 것을 사실이다. 특히 신좌파로 거론되는 간양(甘陽)이나 고전학자인 류샤오펑(劉小楓)의 적극적 소개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레오 스트라우스가 크게 유행하는 것은 우리 학계의 상황과 비교해볼 때 특기할 만한 일이다.
초기 현대성
쉬지린이 선언한 것처럼 만약 계몽이 죽었다면 그는 도대체 죽은 계몽을 어떻게 살리겠다는 것인가. 그가 택한 방법은 초기 현대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몽의 내부로부터 새로운 자원을 발굴해 계몽을 구하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계몽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현대 사회를 이룩하는 데 긍정적 역할을 했지만 현대성이 '성숙'되면서 점차 병폐를 야기했다.
그도 현대성의 부정적인, 즉 "인간 본성 속의 교만함과 탐욕이 유례없이 팽창했고 기술과 이성이 기형적으로 발전했으며 물질주의와 향락주의가 모든 것을 압도했고 정신세계가 쇠락한" 측면을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만하거나 탐욕스럽지 않았던 초기 현대성에 주목해서 계몽에 활력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고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았던 프랑스 초기 계몽 사상가인 몽테뉴, 파스칼이나 <국부론>을 저술한 경제학자인 동시에 윤리학자였던 아담 스미스 등이나 옌푸(嚴復), 량치차오(梁啓超), 장타이옌(章太炎) 등 중국의 초기 계몽가들의 사상적 풍부함과 모순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쉬지린은 계몽적 지식인으로서 이러한 자원의 발굴을 통해 이기적이며 냉소적인, 원자화된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전락해가는 중국의 여러 병폐를 구하려는 시도를 한다. 원자화된 개인주의 사회는 권위주의의 온상이기 때문이다.
어떤 계몽이 문제인가
쉬지린의 이러한 시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의 사상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간양(甘陽)과 같은 이른바 신좌파(간양 자신은 왕샤오광, 추이즈위안, 왕후이와 함께 스스로를 자유 좌파라고 규정한다)는 전혀 다른 진단을 내리고 있다. 계몽은 칸트가 말한 것처럼 미신으로부터의 해방인데, 서양의 역사에서 계몽은 세 차례 발생하였다. 첫 번째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생한 계몽으로 철학의 이성적 사고로 신화라는 미신을 깨우친 것이고, 두 번째는 잘 알려진 서양 현대의 계몽으로 당시 최대의 미신은 기독교이었기 때문에 이성으로 계시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2차 세계 대전과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후 태동한 반계몽적 계몽이다. 계몽 자체가 하나의 미신이 되어버린 것을 반성하는 것이다. 이른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역설이다. 따라서 단순히 계몽을 말할 것이 아니라 당시 지배적인 생각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양에 따르면 계몽은 서양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일찍이 중국에서도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일차적 계몽은 공자와 유가가 일으킨 계몽이다. 당시의 미신은 무력과 패권이었는데 공자와 유가가 인(仁)을 핵심으로 하는 도덕 이성과 도덕 실천으로 이러한 미신을 깨우쳤다는 것이다. 두 번째 중국 현대의 계몽은 중국 사상 전통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외래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서양의 제 2차 계몽의 성과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중국의 문명이 최고라는 미신을 깨치고 서양의 현대성을 수용하는 과정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새로운 미신, 즉 서양의 문명이 최고라는 미신을 낳는 데 있었다.
물론 이 점을 민감하게 자각한 사상가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중국의 현대 사상사에서 주류가 아니었다. 간양이 보기에 현재 중국의 최고의 미신은 서양에 대한 미신이다. 특히 서양의 2차적 계몽에 대한 미신이다. 따라서 간양은 중국의 부상이 단지 경제에 머문다면 커다란 의미가 없고 '문화적 자각'을 기초로 중국이 민족 국가에서 서양 문명보다 더 나은 문명을 제시할 수 있는 문명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계몽의 사망인가, 반계몽의 부재인가
간양의 이러한 비판은 쉬지린을 직접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그도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쉬지린이 초기 현대성을 말하지만 그 현대성이 서양의 2차적 계몽에서 유래한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쉬지린이 말한 것처럼 과연 계몽이 죽었는가, 아니면 간양의 지적처럼 도리어 반계몽의 부재가 문제인가. 쉬지린의 주장처럼 계몽이 죽었다는 것은 엄살이 섞인 과장된 주장으로 보이지만, 중국에서 계몽이 점차 청중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쉬지린은 간양의 주장을 의식했는지 한국판 서문에서 "천하를 가슴에 품은 문명적 자각"이라는 "신천하주의"를 새롭게 제창하면서 "문화적 자각에서 문명적 자각으로, 특수한 '우리'에서 보편적으로 '좋음'과 인류 전체의 '좋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보편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회의적이다. 한국판 서문은 그가 최근에 중국의 한 신문에 실린 인터뷰를 약간의 수정을 거쳐 전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번역 용어에 관해서 덧붙이자면, 모더니티를 근대성으로 번역했는데 현대성으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중국에서 하는 식으로 현대성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사실 원의에 가깝다. 또한 '차축 시대'로 번역한 야스퍼스의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축 시대'라고 번역하기 때문에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현재 중국 사상계의 다양한 흐름을 쉽게 일별해보기에 유익한 책을 쓴 부지런하고 성실한 저자 못지않게 두꺼운 책을 번역 하느라 고생한 역자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면서 글을 마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