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는 때로 일상의 평온함을 깨곤 한다. 너무도 흔한 정보의 더미들 속에서 가끔 우리는 책이라는 창문을 통해 느닷없이 하나의 세계와, 낯선 세상과 마주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에 저항하고 의아해하다가도 이내 그것에 빠져들게 된다. 독자의 삶 자체가 이 독서 체험의 색깔로 물들어간다. 이제 삶은 이 체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내게 이런 만남으로 다가온 책들 중 하나는 파울 프뢸리히의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과 실천>(석탑출판사 펴냄, 1989년. 이 책은 2000년에 책갈피에서 정민과 최민영 번역으로 다시 나왔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 상태다)이었다. 대학 합격 통지를 받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다가 집어든 책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나를 '의식화'하고 말았다. 주인공 로자의 삶과 사상은 입시 교육의 지옥에서 막 벗어난 한 넋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이후 오랫동안 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나 레온 트로츠키보다도, 심지어는 카를 마르크스보다도 로자 룩셈부르크를 더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다른 누가 아니라 그녀를 통해 사회주의에 호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당시 유행하던 소련 교과서 내용들에는 일찌감치 비판적 안목을 갖게 되었다. 현실 사회주의권이 차례로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내 딴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것 역시 이미 로자 룩셈부르크를 따라 10월 혁명의 공과를 냉정히 바라볼 줄 알게 된 덕분이었다.
한참 뒤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작가 조명희의 단편 소설 <낙동강>을 읽다가 이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이 '로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 1920년대 초 이제 막 좌파 사상을 받아들이던 식민지 조선 젊은이들에게도 몇 년 전 독일 혁명 와중에 순교한 로자의 삶은 해방 투쟁에 뛰어들 것을 촉구하는 전 지구적 메시지로 다가왔던 것이다. 눈이 트이는 또 다른 독서 체험이었다.
막상 조명희 자신은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 '동지'라 생각한 그 정권에 의해 숙청, 총살당했다. 스탈린 정권이 학살한 다른 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처럼 '일본 첩자'라는 죄명이었다. 로자만큼 신산한 삶이었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에서 조명희로 그리고 다시 우리에게로 이어지는 이 뜻밖의 정신적 계보는 내게는 커다란 힘의 원천이었다. 이 면면한 흐름 덕분에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될 위험으로부터 끊임없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조우한 대표작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그런데 로자 룩셈부르크를 존경하면서도 그녀의 저서를 직접 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프뢸리히가 쓴 전기를 읽고 나서 곧바로 찾아 읽을 수 있었던 책은 <러시아 혁명, 레닌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박영옥 옮김, 두레 펴냄, 1989년)뿐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다른 저서들은 우리말로 나와 있지 않았다.
물론 <러시아 혁명, 레닌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이라도 나와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이 책은 짧지만 굉장히 중요한 저작이다. 또한 국가 사회주의 체제들이 무너지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정세에서 반드시 소개되어야만 했던 문헌이기도 하다. 10월 혁명에 대한, 특히 그 일당 독재화 경향에 대한 예언자적 경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만으로는 로자 룩셈부르크 사상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린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도, 경제학 대저인 <자본의 축적>도 모두 책 제목만 알려져 있는 형편이었다. 정치 이론 분야의 또 다른 대표작 <대중파업론>의 경우 한때 번역본(최규진 옮김, 풀무질 펴냄, 1995년)이 발간된 적이 있는데, 이마저도 이내 절판되고 말았다.
▲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김경미·송병헌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19세기가 저물고 20세기가 동터올 무렵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벌어진 이른바 수정주의 논쟁 와중에 발표한 논설들 모음이다. 긴 분량은 아니지만,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저자의 논지나 어조가 현학적이기 때문은 아니고, 당시 논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만 이해되는 대목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호적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이름을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본래 베른슈타인은 1891년에 카를 카우츠키와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 강령('에르푸르트 강령')을 집필할 정도로 당 안에서 존경받던 이론가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1899년에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강신준 옮김, 한길사 펴냄, 1999년)로 묶여져 나온 일련의 논설들을 발표해, 당 강령이 표방하던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정면 공격하고 그 '수정'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독일 사회민주당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주의 운동 전체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베른슈타인의 핵심 결론은 하나로 집약된다. 자본주의가 계속 성장해가는(제국주의의 전성기이던 1890년대 말에는 실제 그렇게 보였다) 상황에서는 노동조합의 단체 협상과 협동조합의 자조 노력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입법 활동을 통해 점진적으로 개혁을 쟁취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상 실천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단 하나의 현실적 길이다.
즉 이제 더 이상 '혁명'이라는 강령 문서 속 목표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 당이 벌이고 있는 실제 '개혁' 투쟁에 대해 주저할 필요가 없다. 현재 당이 벌여나가는 개혁 투쟁이 곧 사회주의의 '전부'다. 베른슈타인은 이렇게 단언했다, "내게는 운동(즉 개혁)이 전부다. 궁극 목표(즉 혁명)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당 강령 작성자 중 한 명이 강령의 '수정'을 주장하고 나서는 이 사태 앞에서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단지 침묵과 무시로 일관했다. 당의 얼굴 격인 아우구스트 베벨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던 또 다른 강령 집필자 카우츠키가 주로 이런 태도를 보였다. 당 내 좌우 어디에도 베른슈타인만큼 현실을 고민하면서 제 할 말 다 하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당시 막 독일 거주 폴란드계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한 젊은 유대계 폴란드인 여성 당원이 논박의 포문을 열었다. 독일인이 아닌 폴란드인이고 유대인이라는 것만도 핸디캡이었는데, 더구나 젊은 여성이었다.
당시는 아직 여성이 참정권도 없었을 뿐더러 정당에 가입하는 것만으로 풍기문란 죄 처벌을 받아야 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불과 20대 후반의 여성이 쟁쟁한 고참 당 이론가들에 맞서고 나선 것이다. 그녀가 바로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그리고 그녀가 이때 발표한 논설들을 모은 책이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읽는 한 방법 : 100년 전 논쟁의 대질 심문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논쟁서다. 주식회사와 독점 대기업이 등장하면서 자본주의가 붕괴할 가능성이 사라졌다거나 개혁의 축적으로 사회주의를 도입할 수 있다는 베른슈타인과 그 추종자들의 주장을 꼼꼼히 논박해나간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논쟁적 맥락이 한 세기 뒤 독자들의 독서를 쉽지 않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차라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그 논적들의 책과 함께 읽는 게 더 좋은 접근법이 될 수 있다. 이 책들의 대질 심문을 통해 당시 논쟁을 실감나게 재연해보는 것이다. 다행히도 현재 우리에게는 이런 독서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 문헌들이 소개되어 있다. 크게 주목받지 못하면서도 이때의 역사와 문헌을 소개하는 데 힘써 온 송병헌이나 노서경 같은 학자들의 노고 덕분이다.
우선 카우츠키의 <에르푸르트 강령>(서석연 옮김, 범우사 펴냄, 2003년)이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에르푸르트 강령'을 충실히 해설하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당시 당론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에르푸르트 강령'은 궁극 목표를 밝히는 전반부와, 당면 실천 과제를 밝힌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자는 이른바 '최대 강령'으로 카우츠키가 작성했고, 후자는 '최소 강령'으로 베른슈타인이 썼다.
그런데 최대 강령과 최소 강령 사이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었다. 일상 투쟁 과제들(보통선거권, 8시간 노동, 누진세 도입, 무상 의료 등)이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어떠한 의의와 전망을 지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최대 강령' 부분 집필자인 카우츠키는 단지 궁극 목표는 '미래'에 자본주의가 붕괴하면 혁명을 통해 실현하면 되고 '지금 당장'은 개혁 투쟁에 매진하자는 식으로 이 간극을 메우려 했다. 한 마디로, 단계론적 봉합이었다.
베른슈타인의 주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는 이런 엉성한 논리에 대한 시원한 논파였다. 그는 자본주의가 붕괴하는 '미래'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런 때가 오지 않는다면 사회주의 건설의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것, 즉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대중정당의 일상 개혁 투쟁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는 분량이 꽤 된다. 그래서 읽기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 분들에게는 대안이 있다. 문고본 베른슈타인 선집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외>(송병헌 옮김, 책세상 펴냄, 2002년)가 그 책이다. 여기에는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의 요약본이라 할 '사회민주주의에서 수정주의의 의미'라는 논문이 실려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베른슈타인의 글을 직접 읽다 보면, 누구나 한 가지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론의 타당성에 상관없이 이후 100년간의 사태 전개는 그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베른슈타인의 장담과는 달리 대공황이 오기는 했다. 그러나 이 위기를 일단 극복한 뒤의 자본주의 그리고 그 속에서 좌파 정치가 걸어온 여정은 대체로 그가 가리킨 바로 그 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분명한 또 다른 사실이 있다. 크게 보아 베른슈타인이 가리킨 그 길을 걸어온 좌파 운동은, 그의 낙관적 기대와는 달리, 아직 자본주의 아닌 어떤 사회를 실현하지는 못하고 있다. 베른슈타인은 현실을 냉철히 지적하기는 했지만, 사회주의는 본래 그러한 현실의 '극복'에 대한 염원이고 시도다. 베른슈타인 유의 수정주의가 사회주의 이념, 전략으로서는 충분한 매력을 지니지 못해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수정주의 논쟁 당시에도 이것이 문제였다. 누구보다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를 가장 신랄하게 파고들었지만, 어찌 보면 베른슈타인과 더 가까운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논자들 중에도 그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한 인물이 있었다. 프랑스 사회당의 장 조레스가 그 사람이었다.
그의 문고본 선집도 <사회주의와 자유 외>(노서경 옮김, 책세상 펴냄, 2008년)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그 중 제2장('다수 혁명론')이 수정주의 논쟁에 대한 조레스의 개입의 산물이다. 여기에서 조레스는 '혁명적 진화'를 주창한다. 굳이 베른슈타인식 '진화(진보)' 앞에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가장 저속하기만 한 경험주의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규칙과 목표가 없는 기회주의 속에서 자진 해체되지 않고, 당은 자신의 모든 사상과 모든 행동을 공산주의적 이상을 위해 정돈해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 당의 낱낱의 행위와 당의 낱낱의 말 속에서 언제나 현존하고 언제나 식별될 수 있어야 한다.
베른슈타인은 논쟁의 필요상 특히 자기 저술의 비판적 측면을 해명하게 되었던 것 같다. 어떻든 사회주의의 궁극적 목표가 미래의 안개 속에 녹아버린 듯 만든 것은 중대한 실책이고 중대한 잘못이리라. 공산주의는 모든 운동의 직접적이고 뚜렷한 사상이어야 한다." (<사회주의와 자유 외>, 82쪽)
조레스는, 베른슈타인과는 달리, "목표 없는 운동"이 대안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지금 여기의 개혁 투쟁이 의미와 활력을 갖기 위해서도 이러한 행위 안에 궁극 목표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러한 혁명과 개혁의 생생한 결합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물음은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와 그 이후 저서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관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녀는 1898년 독일 사회민주당 슈투트가르트 당 대회에서 이러한 당돌한 진단을 내린 바 있었다.
"우리 당에서는 극히 중요한 문제가 흐지부지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목표와 일상 투쟁의 관계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리고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의 '서문'은 바로 다음의 문구로 시작한다.
"이 글의 제목을 처음 본 순간 놀랄지도 모른다. 사회 개혁이냐 아니면 혁명이냐?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개혁에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 물론 그렇지 않다. 사회 개혁을 위한, 또 기존의 기반 위에서 노동하는 대중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그리고 민주적 제도를 위한 일상적인 실천 투쟁은 사회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을 지도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임금 체계를 폐지한다는 최종 목표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10쪽)
'사회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 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책 제목의 인상과는 달리,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혁 투쟁이야말로 일상 시기에 좌파 정당이 혁명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유일한' 길이라고 못 박으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사회 개혁과 사회 혁명 사이"의 "분리될 수 없는 연관"을 밝히는 것이 근본 과제라고 천명한다.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고민은 생각보다 더 복잡한 것이었다.
혁명과 개혁의 변증법 : 대중 파업을 통하여
그럼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시하는 개혁과 혁명 사이의 "분리될 수 없는 연관"은 무엇인가?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는 단지 한 문장의 짤막한 대답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노동조합 투쟁과 정치 투쟁이 갖는 커다란 사회주의적 의미는, 그것이 노동자 계급의 인식과 의식을 사회화한다는 것이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1908년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화한다"는 다소 추상적인 문구 뒤에 이런 해설을 덧붙였다. "사회화한다, 즉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조직한다".) (55쪽)
너무 추상적인 명제다. 좀 더 풀어 이야기하면, 이런 내용일 것이다. 개혁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장의 현실적 성과들이 아니다.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의 의식과 조직의 성장을 꾀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노동 대중은 이렇게 집단적 체험을 쌓아감으로써 실제로 자본주의의 위기가 닥치는 순간에 혁명을 향해 나아갈 능력을 확보해나가게 된다. '개혁' 투쟁의 중심을 노동 대중의 '변혁 역량 형성'에 둠으로써 혁명과 개혁을 현재의 실천 속에 서로 만나게 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공산당 선언> 제1장에는 이런 언급이 있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승리하나, 그것은 단지 일시적일 뿐이다. 그들의 투쟁들의 진정한 성과는 직접적인 전과(戰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더욱더 확대되는 단결이다."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박종철출판사 펴냄), 409쪽)
이제 문제는 이러한 이론적 실마리를 어떻게 사회민주당의 일상 활동 속에서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으로 추진할 것인가이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에는 이러한 실천 프로그램까지는 없다. 저자의 뛰어난 이론적 혜안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다.
그 사정은 막스 갈로가 쓴 또 다른 로자 룩셈부르크 전기(<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임헌 옮김, 푸른숲 펴냄, 2002년. 안타깝게도 이 책 역시 절판 상태다)를 보면, 실감나게 파악할 수 있다. 사실 프뢸리히의 전기만 해도 좀 고리타분한 성인전 냄새가 난다. 이에 반해 갈로의 전기는 이 무렵 로자의 집필 및 정치 활동이 당시의 급박한 정치 상황과 어떤 직접적 연관을 맺고 있는지 생동감 있게 전한다.
이런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집필 당시 로자 룩셈부르크는 추상적 방향 제시 이상의 무엇을 제시할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무렵 수정주의자들에게는 제도 정치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다수의 당 소속 공직자들(제국의회 의원, 주의회 의원)이 있었다. 당 관료 조직은 베벨, 카우츠키의 중앙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반면 이 망명객 출신 여성 당원에게는 그런 손발이 없었다. 그래서 1900년대 초반에는 구체적인 전략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시대를 뒤흔드는 바람은 뜻밖에도 동쪽으로부터 불어왔다. 1905년 2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했다. 그런데 이 혁명의 양상이 특이했다.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마치 밀물, 썰물처럼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놀랍게도 1년 넘게 지속됐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한 번도 노동 운동 혹은 사회주의 운동을 접해보지 못했던 가장 낙후한 노동자층까지 투쟁에 결합했고, 심지어는 농민과 중산층까지도 합세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혁명이 벌어지는 동안 고국인 폴란드(당시 러시아령)로 달려가 투쟁 양상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왔다. 그녀의 <대중 파업론>은 그 관찰의 결과물이다. 이 책에서 로자는 일단 정치 총파업이 벌어지면 전혀 새로운 차원의 투쟁 국면이 열린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를 '대중 파업'이라고 이름 붙였다.
대중 파업의 물결 속에서 노동 계급의 의식과 조직은 유례없이 확장되고 가장 낙후한 노동자층이 어느새 투쟁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 경험은 노동 대중이 혁명적 주체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다. 이제 당의 역할은 이렇게 대중에게 새로운 성장의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여기에서 "노동자 계급의 인식과 의식을 사회화"하는 개혁 투쟁의 구체적 방략을 발견했다. 당시 독일도 보통선거권이 완전히 보장된 민주주의 체제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성인 남성에 한정된 보통선거권은 그나마 제국의회 선거에서만 인정되었다. 주의회 선거에서는 소위 3계급 선거라는 계급별 선거가 실시됐다. 더구나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제국의원 선출에도 계급별 선거 제도를 적용하려는 선거법 개악 시도를 되풀이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선거법 문제를 정치 총파업으로 돌파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선거법 문제는 일상 개혁 투쟁의 과제에 속한다. 사회주의 혁명과 직결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개혁 투쟁을 "프롤레타리아를 계급으로 조직"하는 데 중점을 둔 정치 총파업 전술(더 나아가 대중 파업)로써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 개혁을 쟁취함과 동시에 독일 노동 대중의 역량을 결정적으로 전진시키자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1905년 9월의 독일 사회민주당 예나 당 대회는 로자 룩셈부르크 등 당 내 좌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총파업 투쟁을 당 전술의 하나로 채택했다. 이후 로자는 동지들과 함께 독일 전역을 순회하며 선거법 개혁 쟁취를 위한 총파업을 선동했다. 당 내 좌파가 처음으로 구체적인 전략 대안을 제출하고 세력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모처럼의 기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 노동조합 운동 지도부는 정치 총파업 전술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들은 이 전술이 당국의 탄압을 불러와 노동조합 조직만 와해시키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당과 노동조합이 함께 보통선거권 쟁취 총파업을 벌인 이탈리아, 벨기에, 스웨덴 등과는 상황이 달랐다. 노동조합 측의 불만을 무시할 수 없었던 당 지도부는 1906년 9월 만하임 당 대회에서 전년도 대회의 정치 총파업 결의를 사실상 폐기해버렸다.
이와 함께 3계급 선거제 같은 난관을 뚫고 어떻게 권력을 향해 다가갈지에 대한 당의 전략 논의도 모두 중단되어 버렸다. 사회민주당의 대중 기반을 변혁의 힘으로 약동시키려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포부도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몇 년간 그녀는 <자본의 축적> 집필과 당 연수원의 교수 활동에 침잠해 들어갔다. 이런 상태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검은 먹구름이 독일 사회민주당과 유럽 사회주의 운동에 닥쳐왔던 것이다.
서구 혁명 노선의 불발된 꿈
지금까지 주로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살펴봤다. 하지만 모든 고전이 다 그렇듯이, 이 책에는 또 다른 수많은 문제의식들이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다.
가령 우리는 "자본주의 질서 속에 들어 있는 미래 사회를 위한 모든 요소는 자본주의 질서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주의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주의에서 멀어지는 형태를 취한다"(98~99쪽)는 문구로부터도 책 한 권 분량의 사색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런 시대 인식은 '시기상조'의 위험(104쪽)을 무릅쓰고라도 노동 계급이 하루빨리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청으로 이어진다.
수정주의 논쟁 당시에 이런 시대관은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도 너무 낯선 것이었다. 이 시대의 사회주의는 진보사관을 자유주의와 공유했다. 세계사는 서구 문명의 승리와 함께 한발 한발 전진하고 있고 사회주의 운동의 과제는 단지 이 승리의 결실을 계승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이런 시대정신을 가장 정직하게 정식화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역사관은 의문과 극복의 대상이 되어 있다. 이제는 오히려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대 인식, 즉 자본주의를 이대로 조금이라도 더 방치한다면 인류 문명 자체가 파괴될 수 있는 인식(저 유명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기후 변화 문제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한 세기를 뛰어넘는 이런 동시대성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지금 새삼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최근 영국의 버소(Verso) 출판사는 그녀의 영어판 전집을 새로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여러 문제의식들을 하나로 꿰뚫는 핵심 주제는 역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대중이 주도하는 변혁이 가능할까라는 고민이다. 이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필생의 숙제였다. 10월 혁명의 해법이 서유럽에서 그대로 반복되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직시한 것도, 죽기 직전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자신이 주도해 창당한 독일 공산당 안에서 제헌의회 참여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자 선거 참여를 역설한 것도 이런 지속적인 고민의 결과였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불의의 학살을 당한 뒤에는 그녀의 마지막 연인이자 정신적 계승자인 파울 레비가 독일 공산당을 이끌며 로자의 길을 이어갔다. 그는 레닌이 <좌익 공산주의-하나의 유치한 혼란>(우리에게는 <공산주의의 좌익 소아병>이란 제목으로 알려진)을 쓰기 전에, 안토니오 그람시가 코민테른 노선에 대한 반성적 숙고에 돌입하기 훨씬 전에 이미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변혁을 추진하자면 러시아와는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최근 레비의 영어판 선집(
물론 가정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하지만 지구 자본주의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한 '자본주의의 붕괴'에 근접한 것만 같은 상황에 다시 빠져든 지금, 그녀의 여러 유산들 중 가장 치열하게 되새겨야 할 것이 혁명과 개혁의 변증법 혹은 발전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 맞는 변혁 노선의 모색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모색만 되다 만 이 가능성을 다시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는 한, 이번 위기도 인류의 기회로 반전되기 힘들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시한 아래의 딜레마는 또한 21세기의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사실상 승리를 향한 프롤레타리아의 세계사적 전진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역사상 최초로 대중이 스스로 모든 지배 계급에 대항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야만 하며, 이 의지를 현 사회의 저편으로, 즉 현 사회를 초월해 밀고 나가야 한다는 데 이 운동의 특수성이 있다. 그러나 대중은 다시금 이러한 의지를 오로지 기존 질서와 끊임없이 투쟁함으로써만, 즉 기존 질서의 틀 속에서만이 완전하게 성취할 수 있다.
대다수 민중을 모든 기존의 질서를 초월하는 목표와 결합시키는 것, 일상적인 투쟁을 위대한 세계 개혁과 결합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큰 문제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분명 그 발전의 전체 과정에서 두 개의 난관 사이를, 즉 대중적 성격을 포기하는 것과 최종 목표를 포기하는 것, 다시 말해 이단적 분파로 떨어지는 것과 부르주아 개혁 운동으로 변하는 것, 또 무정부주의와 기회주의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116~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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