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떻게 오는가. 봄은 한꺼번에 오지 않는가 보다. 햇빛이 물씬하게 퍼진 날에 흙길을 걸으면 따뜻한 기운이 발에 채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머리 한 켠에서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작년에는 눈이 4월에도 왔는데. 눈이 한 번 더 오고 나서야 겨울이 완전히 물러나는 게 아닐까.
봄은 한날 한시에 오지 않는가 보다. 국토의 저 아래 남녁에서는 벌써 꽃 소식이 들린다. 꽃에 입문 한 지 2년째. 올해 들어 나에게도 봄을 맞이하는 한 가지 증상이 생겼다. 찬 기운을 뚫고 솟아나는 피어나는 꽃들의 근황이 궁금해진 것이다. 그 꽃들을 보아야 올해의 봄을 봄이라고 인정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의 꽃동무들이 지리산을 다녀온 지 일주일 만에 경주에서 번개를 소집했을 때 벼락같이 따라 나선 것이었다. 처음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을 간 이후 그동안 경주하고는 많은 추억을 쌓았다. 경주 한 복판 성동 시장에서 한복으로 가정을 일구신 내 존경하고 좋아하는 고모님, 그리고 또 경주 너머 감포 근처의 봉영암을 숱하게 드나들며 보낸 시간의 갈피는 제법 두툼하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려니 아내의 눈총이 제법 따가웠다. 2주 연속으로 먼 지방을 돌아다니는 가장을 보는 심사가 그리 편치 않아 보였다.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었다. 그러나 올 해 들어 처음 가는 봄맞이가 아닌가. 더구나 그 야들야들한 꽃을 보러가는 길이 아닌가. 그것도 경주가 아닌가.
까닭없이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냥 아무에게라도 말 걸면 받아줄 것 같은 경주. 그 경주의 외곽 산을 훑기로 했다. 토함산과 남산만 밟았던 나에게 오늘은 특별한 경험을 줄 것 같았다. 더구나 오늘 경주 꽃산행을 안내하실 분은 이 근방의 산자락의 꽃들의 주소를 훤히 꿰는 분이었다. 시내를 곧장 가로질러 양동마을 근처 안강으로 향했다.
안강읍 들판은 광활했다. 싸늘한 겨울의 끝기운도 있었지만 밀려오는 봄의 기운이 바야흐로 대세를 장악한 것 같았다. 두 기운이 넓은 들판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것은 아니겠지만 서로 일합을 겨루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 안내판을 따라 골짜기를 들어가다가 화산곡 저수지에서 내렸다. 이 계곡 가까이에 변산바람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고 했다. 오늘 우리가 과녁에 꽂아야 할 꽃은 이 말고도 노루귀, 복수초, 너도바람꽃. 장비를 갖추고 대오를 갖추고 꽃산행을 출발하는데 슬며시 <삼국유사>의 한 대목에 기대어 상상 한 자락을 마음대로 펼쳐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선덕여왕 치하라고 하자. 이 근처 어디가 아니었을까. 백제군이 매복해 있고 이를 토벌하러 떠나는 신라군. 군사들의 숙영지를 고려한다면 이 저수지가 딸린 골짜기는 군사적 요충지일 것 같았다.
오동나무, 버드나무, 굴피나무가 도열한 가운데 멀리 숲을 정찰하면서 나아갔다. 늘어진 갯버들 수꽃이 척후병처럼 길가에 피어났다. 그 옆 작은 도랑에는 군량미처럼 산개구리가 알을 잔뜩 슬어놓고 있었다. 아마 곧 저 알에서 개구리들이 일어나 이곳은 개구리들의 합창 소리로 꽉 찰 것 같았다. 개구리 소리를 방패삼아 적들의 후방을 습격하는 작전을 펼쳐볼까.
▲ 갯버들 수꽃. ⓒ이굴기 |
▲ 개울에 잔뜩 슬어놓은 산개구리 알. ⓒ프레시안(이굴기) |
저 숲 어딘가에 내가 찾는 적이, 아니 변산바람꽃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혼자서 만끽하면서 앞으로 전진했다. 사주경계를 하듯 한번 뒤를 돌아보았더니 가지 끝이 붉은 말채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김유신 장군을 태운 말의 튼튼한 허벅지처럼 건장한 나무였다.
무덤이 어디 시대를 구분하랴. 폐허가 된 봉분을 짐작하니 이곳 위로 오랜 세월이 다녀간 듯 했다. 그냥 신라 시대 무덤이라고 치기로 했더니 엄숙한 기운이 더 감도는 듯 했다. 흩어진 여러 기(基)의 무덤 주위에 포진해 있는 것은 변산바람꽃!
꽃들은 무덤이 낸 창문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 피어 있었다. 지하 세계에 거주하는 이들은 창문 하나를 달아도 저렇게 기막히다. 다보탑이나 석가탑을 보라. 신라 시대 사람들은 돌을 밀가루처럼 주물렀다고 초등학교 때 배웠는데 그이들은 흙도 아마 그렇게 반죽을 잘하는가 보다.
변산바람꽃을 위시해서 자잘한 꽃들을 관찰해 보라. 정교한 장치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그냥 밋밋하고 뭉툭한 사각의 형태는 어디 명함도 못 내밀 것이다. 그 창문으로 은은히 번져 나오는 불빛은 물론이려니와 그 창가에 드리워진 커튼들. 술이 풍부한 휘장들. 아아, 그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 변산바람꽃. ⓒ이굴기 |
▲ 너도바람꽃. ⓒ이굴기 |
▲ 노루귀. ⓒ이굴기 |
▲ 복수초. ⓒ이굴기 |
이윽고 여러 군데를 수색해서 숨어 있던 꽃들을 모두 찾아내었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았는지 카메라에 포박된 녀석들은 새파랗게 질리거나 꽃잎을 닫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드디어 오늘 목표로 한 너도바람꽃, 노루귀, 복수초를 모두 보았다. 올해 들어 처음 만나고 맞이하는 꽃들! 이제 경주의 봄은 누가 뭐래도 봄으로 인정해야겠다.
꽃산행을 모두 내려오는 길. 어느 골짜기로 오르는 길 한 복판에 지게가 버티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지게. 무슨 공사를 하려는지 지게에는 비료가 한 포대 실려 있었다. 최신식 지게라서 작대기만 빼고 모두 금속 제품이었다. 지게를 받쳐주고 있는 작대기는 무슨 나무일까.
사람의 키만한 작대기만 가지고 동정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행들은 물푸레나무일 것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아직 나무에 관한 초보자인 나는 아무런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지게 주인은 지게를 벗어놓고 어디로 갔을까. 그 와중에 나는 지게 주인은 틀림없이 신라인의 후예일 것이라는 뻔한 짐작을 하면서 경주의 봄으로 성큼 더 들어갔다.
▲ 경주 근교 어느 산에서 만난 지게와 작대기. ⓒ이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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