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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기생충 '인간'! 언제까지 그리 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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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기생충 '인간'! 언제까지 그리 살래?

[프레시안 books] 볼프 슈나이더의 <인간 이력서>

나는 책을 읽을 때 인정사정없이 책장을 접는다. 나중에 다시 볼 부분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 단, 언젠가 어느 선배에게 배웠던 요령이 있다. 책의 주장을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은 위 귀퉁이를 접고, 그와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곱씹고 싶은 부분은 아래 귀퉁이를 접는다. 나중에 서평을 쓰거나 할 때는 위 귀퉁이가 접힌 쪽을 펼친다. 그게 아니라 심심해서, 혹은 다른 곳에 인용할 멋진 문장을 찾을 때는 아래 귀퉁이가 접힌 쪽을 펼친다.

<인간 이력서>(볼프 슈나이더 지음, 이정모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서평을 쓰려고 책을 다시 집었을 때, 조금 당황했다. 아래 귀퉁이만 잔뜩 접혀 있었기 때문이다. 400쪽 남짓한 본문에서 35군데나. 몇 군데만 인용해 보겠다.

"로마의 특권층, 러시아 귀족, 영국의 상류층 같은 일부 소수파가 사치에 빠져 흥청거리는 동안 지구는 흠집이 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것은 사치가 민주화된 다음의 일이다. 보잘것없는 인간이 안락함과 풍요를 누리게 된 것은 멋진 성취였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는 평온함을 깨뜨리고, 도로를 막고, 공기를 더럽히고, 아름다운 풍경을 짓밟도록 만들었다." (239쪽)

"1994년 르완다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투치족과 후투족이 살해당했을 때 전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매년 120만 명의 교통사고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통계 때문에 유엔 회의가 소집된 적은 아직 없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인간과 자동차의 관계는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중국과 인도, 아프리카에서 자동차가 대규모로 보급되기 시작한 이상 소음과 공해, 사망자와 장애인은 늘어나게 되어 있다." (243, 244쪽)

"관광 산업의 시작은 여행을 즐기는 영국인들의 습성과 영국적 '스포츠' 정신의 산물이었다. 동시에 저 황막하고 수천 년 전부터 악명 높은 알프스 산맥을 아름답게 느낄 수도 있고 그곳에서 휴가를 보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알프스 산맥은 오늘날 전 세계 관광 산업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알프스가 '아름답다'는 해괴한 주장을 펴면서 이목을 끈 것은 루소였다." (본문 246쪽)

"인간은 정말 대단한 존재다. 농사를 짓기 위해 숲을 태우고, 자원을 채취하려고 지각을 긁어내는가 하면 도시와 도로, 공항과 공장으로 땅을 덮어 버리고 쓰레기는 도시 변두리 지역으로 내다 버린다. 잿빛 갈색 하늘이 머리 위를 둘러도 개의치 않는다. 비닐봉지들은 사람들이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인간의 부지런함을 말해주는 기념비로 남을 것이다." (296쪽)

"인터넷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 인터넷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분야는 광고와 포르노 산업이고, 가장 집요하게 사용하는 부류는 테러리스트와 조직범죄 집단이다. 이런 실정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357쪽)

▲ <인간 이력서>(볼프 슈나이더 지음, 이정모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을유문화사
책에는 저자의 이런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자료가 제법 성실하게 나와 있다. 그러니 그런 구체적인 일화, 숫자, 연표를 언급하면서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이 제대로 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게 동의하는 의미로 웃음을 짓거나, 동의할 수 없어 쀼루퉁하거나, 다른 자료를 더 찾아보아야겠다고 호기심을 느낀 부분은, 대체로 위와 같이 저자의 개인적인 편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대목들이었다. 어쩌면 이런 대목들이 오히려 책의 핵심이 아닐까? <인간 이력서>는 얌전하고 건조한 책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이력서>는 180만 년에 걸친 인류의 역사를 연대기로 정리했다. 그런데 문명의 역사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세계사가 아니다. 사회사, 문화사, 경제사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생존사(史)'다. 인류가 어떻게 생겨났고, 불어났고, 사방팔방 퍼졌고, 마침내 지구의 주인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온 인류를 한 인간으로 보고, 그의 생에서 중요한 사건들만 골라 전기를 쓴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인류의 장편 소설'이라고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저자가 고른 인류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무엇일까? 문명의 흥망성쇠? 전쟁? 진보? 아니다. 저자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서 발전시킨 기술들이다. 인류가 그 기술들을 써서 자연(자원)을 어떻게 착취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는 세계 대전을 다룬 장(章)이 없다. 철학과 이데올로기를 다룬 장도 없다. 왕조와 사회 체제를 다룬 장도 없다. 대신, 제국주의적 팽창을 다룬 장이 있다. 인간이 땅을 차지하려고 다른 인간(원주민)을 몰살한 사건이나 농사를 지으려고 동식물을 멸종시킨 사건이야말로 생존의 고비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지구 정복을 다룬 장이 있다. 인류는 채굴로 물질을 정복했고, 철도로 거리를, 증기선으로 바다를, 비행기로 하늘을, 통신으로 시간을 정복했다. 여기까지는 좋다. 생물은 모름지기 생존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 별짓을 다해야 한다. 누구도 그것에 윤리적 잣대를 댈 수 없다.

문제는 인간이 여느 동물과 다른 수준으로 도약하면서 생겼다. 인간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생존이 아니라 사치스러운 생존을 꾀하면서부터였다. 저자는 자동차 문화, 세계적 관광 문화, 육식 문화를 대표적인 사치로 규정하고 맹렬하게 비난한다. 그리고 인류가 그 때문에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몇 징후를 살펴본다. 자원 고갈, 도시 집중, 지구 온난화, 쓰레기, 생태계 파괴 등이다.

이 대목부터 저자는 시니컬한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불쑥불쑥 드러낸다. 가끔은 저자도 인류의 문제 해결 능력에 감탄하고, 인류가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한 것도 있다고 말하지만(예술이 대표적이다), 속마음은 '지상의 악마는 인간'이라고 했던 쇼펜하우어의 말을 믿는 듯하다.

저자가 보기에, 인간은 지구의 기생충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기생하는 생물을 나무랄 수 없듯이, 지구가 인류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80만 년 전에 도구를 쓸 줄 아는 최초의 인간, 호모 에렉투스가 생겨났던 것은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탐욕과 허영에 휘둘려 자신의 생존 근간을 파괴하는 것도 뉘라서 막겠는가. 더구나 인류는 어차피 멸종할 텐데, 뭘. 인류가 실러캔스처럼 4억 년 넘게 생존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세상에 있단 말이야? 그래서 저자는 눈앞의 현실에만 관심이 있다. 가령 '2018년에 지구에서 90억 명 이상의 인구가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닐까'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인류가 몇 십 년, 아니 몇 년이라도 더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작금의 위험 요인을 하나씩 따져본다. 물 부족, 에너지 부족, 무분별한 세계화로 인한 지역 농업 붕괴, 용병을 동원한 전쟁, 테러 등이다. 희망도 하나씩 점검한다. 평화주의 이상, 계몽된 인간의 자기통제, 인구 집단들의 형제애, 성공적인 인구 조절 등등. 그러나 결국 저자의 결론은 '모르겠다'이다. 독설을 있는 대로 쏟아낸 주제에 너무 무책임하다 싶지만, 일리 없는 말은 아니다. 저자는 모든 전망이 결국에는 자기 부정적 예측이나 자기 실현적 예측일 뿐이라고 말하며, 증명할 수 없는 전망에 몰두하느니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자고 권한다.

저자 볼프 슈나이더의 이런 시각은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김승진 옮김, 이후 펴냄)에서 인류를 '약탈하는 인간'(호모 라피엔스)이라고 정의했던 영국 철학자 존 그레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레이는 반인간주의의 기수라고 불릴 만큼 인간 중심주의를 혐오하고 인간의 지성과 능력에 냉소적인데, 슈나이더도 더하면 더했지 뒤지는 것 같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그레이는 어느 정도 초월하는 차원으로 '넘어가' 버린 데 비해, 슈나이더는 끝끝내 억척스럽게 현실에 발붙인다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비관하는 와중에도, 슈나이더는 눈앞의 작은 희망을 따져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슈나이더의 견해는 이른바 이상적인 진보주의자들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이를테면 그는 지구 온난화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많다고 본다.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가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여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것은 '누구나 품는 정상적인 두려움을 독점한' 짓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지구 온난화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류의 한정된 자원은 대기 오염, 식수 부족 등 더 시급한 문제에 쏟아야 한다는 판단이다. 또한 그는 재생 에너지가 이른 기간에 바통을 넘겨받을 가능성은 없으므로, 원자력을 무작정 포기하는 것은 멍청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주장들 앞에서 여러 번 갸웃거렸다. 저자가 가진 정보(책은 2008년에 씌어졌다)가 최신의 정확한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올해 88세인 슈나이더는 독일 최고의 독일어 전문가로 꼽히는 저널리스트이자 수십 권의 논픽션을 쓴 작가이지만, 어쨌거나 과학자는 아니니까.

아무려나 이 책의 미덕은 간단하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이상주의는 필요하다. 그것을 조롱하지 마라. 하지만 우리는 이상주의를 비관주의로 단련시켜야 한다.' 사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서도 이상주의를 견지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비관주의만큼은 다른 곳에서 더 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얻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백하자면, 나는 인류를 대단치 않은 것으로 보는 슈나이더의 시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후련하다고 느낀 것, 그래서 나도 모르게 서른 몇 군데나 책장을 접은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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