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크리스 임피 지음, 이강환 옮김, 시공사 펴냄)가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임피의 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가 다른 책에서 보여준 풍성한 입담으로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늘어놓을지가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말했다. 오늘 진리인 것이 내일은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현실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모든 과학은 원시적이고 유치하다. 하지만 이것은 여전히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젊은 종족이고 우리의 과학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우리는 어둠을 무서워할 정도로 어리지는 않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하지는 못하다. 우리의 여행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책 제목으로 쓰인 질문이 무색할 만큼 평범하고 규범적이고 평범한 결말이다. 하지만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 임피가 쓴 이 문장보다 더 정직한 대답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결론은 우리가 아직 우주의 시작에 대해서도 역시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무엇을 위한 책일까.
이 책의 목표는 우주를 여행하는 시간여행자들의 안내서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거리로는 더 멀리 시간적으로는 더 과거로 나아가며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크리스 임피 지음, 이강환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
빛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유한한 속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어떤 물체의 과거의 모습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보는 달빛은 1.3초 전에 달에서 출발한 빛이다. 태양빛은 8분도 넘는 시간 전에 출발한 빛을 우리가 보는 것이다. 4광년 떨어진 어느 별을 본다는 것은 그 별에서 4년 전에 출발한 빛을 우리가 본다는 것이다. 1억 광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어느 은하를 관측하면 그 은하로부터 1억 년 전에 출발한 빛을 관측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 공간에서는 거리가 곧 시간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아주 짧은 인생을 살고 가지만 밤하늘에는 가까운 과거로부터 먼 과거까지 시간 순서대로, 즉 거리 순서대로 우주의 진화의 역사를 한 번에 보여주는 파노라마 극장이 열려있는 것이다.
임피가 이 책에서 '우주의 시작'을 이해하는 전략으로 선택한 것은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나아가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가까운 곳은 먼 곳보다 최근의 과거일 테니 더 멀리 가다 보면 결국은 시작의 순간에 도달할 것이다. 그 과정은 결국 우주가 시작되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된 빅뱅우주론의 진화 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억 여행이기도 하다. 시작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결국은 시작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책은 결국 '시작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책인 것 같다. 물론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의 마지막 부분은 아직은 과학과 SF의 경계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하다. 다중우주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과학적인 관측의 문제로 가면 아직은 성숙되지 못한 과일처럼 SF의 나무에 달려있다. 상상력이 한걸음 더 나아간 지대에서 만나는 우주의 기원론도 설렘을 주지만 과학의 경이로움을 주기에는 구체성이 떨어진다.
임피는 이런 딜레마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주의 시작, 즉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진리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미천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진리라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은 어쩌면 '과정' 자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제목이 붙은 책의 대부분을 그 시작의 지점으로부터 시작된 현재까지의 진화의 과정에 대해서 사용한 임피의 의도도 그런 것이었을 것 같다.
제목을 보고 명확하고 궁극적인 해답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과학은 시대의 과학이고 늘 불완전했고 자신이 이룩한 견고한 패러다임을 스스로 깨부수면서 진화해 왔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이 책은 멋진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절대적이고 종교적인 결론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그냥 책을 덮어라. 과정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면 이 책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읽으면서 오래된 나의 고민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 책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우주의 시작에 대한 과학의 경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담론으로부터 우주의 진화의 역사의 세세한 과정까지 우주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풍성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 한 권에 어느 정도의 정보를 넣어야할 것인가.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책에서는 그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는가 하는 것이 나의 오랜 고민이다.
이 책은 우주의 시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다른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내용이 풍성한 것은 분명히 장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용의 난이도가 각 장마다 크게 차이가 나서 내용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너무 넘치는 내용의 풍성함 때문에 오히려 읽으면서 좀 지치기도 했다. 읽다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서 무슨 내용인지를 확인해야하는 번거로움도 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너무 내용이 많다는 생각이다. 오히려 '우주의 시작'이라는 화두 자체에 임피의 풍성한 입담을 더 집중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넘치는 내용의 풍성함이 좀 벅차기는 하지만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는 여러 면에서 좋은 책이다. 내용이 정확하고 알차다. 번역된 다른 과학책에서 만나기 힘든 내용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참고 자료로서의 가치도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어려운 내용을 재미있게 잘 풀어놓았다. 여전히 문장을 좀 더 다듬어서 간략하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여운처럼 계속 남긴 하지만.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와 함께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우주의 기원과 진화와 미래에 대해서 통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작이다. 여기에 <우주 생물 오디세이>(크리스 임피 지음, 전대호 옮김, 까치글방 펴냄)까지 더한다면 그야말로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책 시리즈가 될 것이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의 넘치는 풍성함에 대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 권의 책을 추천하면서 나는 임피의 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사족 : 오타 몇 개가 눈에 보여서 적는다. 168쪽 아래에서 세 번째 줄의 '성운들의 구했는데' 부분에는 아마 '거리를'이라는 단어가 단어들 사이에 들어가야 했을 것 같다. 235쪽 아래에서 두 번째 줄의 '가지광선'은 '가시광선'의 오타인 것 같다.
연도 표기가 잘못된 곳도 몇 군데 보인다. 310쪽 아래에서 일곱 번째 줄의 '1489년'은 아마 빅뱅이라는 용어를 프레드 호일이 영국 BBC 라디오 방송에서 말한 1949년이나 1950년으로 바로잡아야할 것이다. 328쪽 위에서 아홉 번째 줄의 '1996년'은 조지 스무트와 존 매더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해를 말하는 것일 테니 '2006년'으로 바로 잡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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