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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반달곰의 외침 "진짜 주인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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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반달곰의 외침 "진짜 주인은 나다!"

[꽃산행 꽃글] 지리산의 주인은 누구인가?

지리산 반달곰의 외침

지리산의 주인은 누구일까. 작년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이 무산되는 통쾌한 소식을 접하면서 이런 질문을 가져 보았다. 이번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는 무리한 발상이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걸로 다 끝난 문제가 아닌 듯했다. 앞으로도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끊임없이 그 계획을 이루려 시도할 것이며 또한 환경부에서는 향후 자격 요건을 갖추면 허가를 내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겼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어떤 자격으로 지리산에 험악한 쇠말뚝을 박고 굉음이 진동하는 케이블카를 산중에 오르내리도록 하려는 것일까. 누가 주인이라서 그런 발상에 요건을 따지고 또 그에 맞는다면 그리 하도록 허가를 내준다는 것일까.

과연 지리산의 주인은 누구일까. 얼핏 많은 이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지리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 국립공원을 관리한다는 직원들. 공원의 시설 허가를 좌지우지하는 공무원들. 국립공원의 생태를 걱정한다는 자문위원들. 그리고 지리산이 좋아서 오르내리는 등산객들. 과연 그들 중의 누군가가 지리산의 주인일까.

사람들이야 뚫린 귀와 입을 갖고 있어서 제 나름대로의 이런저런 말들을 깜냥껏 하고 산다. 그러니 제 속셈이 있어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자는 의견을 냈을 것이다. 그리고 왜 그리 해야 하는지 나름의 논리를 개발하기 위하여 자신의 대가리를 괴롭혔을 것이다. 추측컨대 앞으로도 지리산을 개발하자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의 모가지 위에 그 못난 대가리가 붙어 있는 한 그럴 것이다.

ⓒ이굴기

지리산에 간다. 어쩌다 마흔이 되어 지리산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해마다 한 번씩은 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달마다 한 번씩 간다. 지리산의 식물을 두루 탐사하고자 몇 분들과 의기가 투합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음정-연하천-벽소령을 탐방했다. 일행 중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했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지리산을 앞산, 뒷산 드나들듯 자주 가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대꾸는 아니 했지만 나 역시 그분의 의견과 한 치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지리산을 자주 들락거려도 내가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지리산에 이미 나 있는 등산로를 짚어나간다. 그러니 지리산의 일부에 난 길, 그 길 중에서도 지극한 일부를 겨우 걷고 올 뿐이다. 지리산에 처음부터 길이 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희미한 길이 있었다가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길은 길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 길은 지리산의 이곳저곳에 나 있다. 우리 같은 등산객들은 모두 뜨내기손님들에 불과하다. 모두들 그 길로 지나다니면서 잠시 지리산에 머물다 가는 것이다. 그러한 우리들과는 달리 아예 지리산에 붙박이로 사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누군지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지리산에 붙박이로 사는 이들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지리산 속에서 숲을 헤치며 하루 종일을 머물 때 많은 것을 만난다. 물론 흙이나 돌들도 있다. 하지만 나도 역시 생물이니 일단은 살아있는 것을 대상으로 삼자. 그들은 대부분 녹색의 식물들이다. 그들은 정말 늠름히 제자리에서 일생을 견디며 지리산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의 겨드랑이나 팔뚝에는 각종 벌레나 곤충이 깃들어 사는 것을 보게 된다. 아마도 지리산의 주인을 굳이 찾는다면 이들이 바로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

ⓒ이굴기
ⓒ이굴기
ⓒ이굴기
ⓒ이굴기


성삼재에서 출발해 노고단을 거쳐 본격적인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다. 돼지령을 지나 임걸령을 지나 삼도봉을 지나 뱀사골 계곡으로 굽어드는 동안. 등산로의 좌우를 호위하는 교목과 관목, 초본들 사이에 간간이 낯선 짐승 하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반달곰이었다. 이 짐승 또한 혼자 외로이 지리산에서 지리산을 지키며 지리산과 함께할 것이다.

실제 반달곰은 등산로 저 너머 너머의 빽빽한 숲속에 살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만난 반달곰은 흰 광목 속에 들어 있었다. 물론 나도 안다. 저 반달곰은 아마 어느 인쇄소에서 대량으로 찍혀져 이 지리산 등산로에 뿌려져 있다는 것을. 그러나 지리산에 방사된 반달곰이 시시각각 다른 운명을 만나듯, 등산로에 포진한 반달곰도 그냥 같은 곰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람을 따라 각종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굴기
ⓒ이굴기
ⓒ이굴기
ⓒ이굴기


사람들은 산에서 곰을 만나면 무서워한다. 그래서 '곰 출현주의'라는 저런 경고 현수막을 크게 내걸었으리라.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할까. 최근에 안 사실이 하나 있다. 반달곰은 덩치가 보통 사람들보다 작다고 한다. 오히려 지리산에 낯선 기계 문명을 설치하려는 사람들이 곰에게 무서운 존재가 아닐까. 더구나 사람들이란 언제나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 지팡이도 지니고 있고 무전기 같은 핸드폰이 있고 또 떼로 몰려다니지 않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대구 시인 이하석의 시 한편이 생각났다. 우리더러 곰을 주의하라고 저런 경고막을 크게 달아놓았다. 하지만 저 너머 숲에 사는 반달곰은 오히려 그런 인간들이 무서워 저렇게 바람의 힘을 빌려 시시각각으로 무언의 함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 "이곳으로 들지마. 네 편이 더 무서워!"

버스에 부딪쳐 / 소형차는 길 밖으로 튕겨 / 가로수를 들이받아 쓰러뜨리고 뒤집혀져, /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 그러나, 다아, / 살았다. / 죽음의 냄새 같은 / 향기가 주위에 가득할 뿐. / 그것은 살아 있는, / 측백나무 향기. // 살펴보니 측백나무 울타리를 / 들이받고 멈춘 것이었다. / 측백나무 울타리가 우릴 막아주었다, / 죽음으로 가는 길을. / 측백나무 가는 길을 / 측백나무 너머 캄캄한 / 죽음의 세계가 보인다. // 신선한 향기로운 나무라고 / 모든 길들마다 측백나무를 심자고 / 그것이 죽음을 막아준다고, / 측백나무를 찬양한다. // 그러나 나는 결국 한쪽만을 찬양한 것이다. / 측백나무가 어찌 죽음에 개의하랴. / 측백나무 울타리 저 너머에서는 / 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더러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 달려 나가지 못하게 타이른다 / 이쪽 켠에 / 도리어 위험한 세계가 있다. (이하석의 '측백나무 울타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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