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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은 없다. 하지만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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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악인은 없다. 하지만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인터뷰] 재일교포 가족의 가슴아픈 삶을 그린 <가족의 나라>의 양영희 감독

평범한 개인의 삶에서도 훨씬 거대한 역사의 풍랑을 읽어낼 수 있다.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2006), <굿바이, 평양>(2009)에 이어 극영화 <가족의 나라>(2012)를 완성한 재일교포 2세 양영희 감독의 삶이 그렇다.

1959년부터 20년간 '지상 낙원'이라는 선전에 속아 재일본조선인연합회계(조총련) 재일교포들이 북한으로 건너갔다. 일본정부와 북한의 협정 때문에 돌아오는 선택권을 박탈당하고 그곳에 강제적으로 머물게 된 이들의 수는 9만 4000명에 달한다. '귀국사업'이라 불렸지만 실제로는 유괴 사건에 가까운 이 북송(北送)사업에 양영희 감독의 오빠 세 명도 휩쓸렸다.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의 결정에 따른 결과였다.

당시 6살이었던 양영희 감독은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원망했고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버지의 인생을 카메라에 담아볼 것을 결심하면서부터 변화는 시작됐다. 10년 동안 카메라 앞에서 아버지는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디어 평양>) 이후 평양을 몇 번 방문하면서 양영희 감독은 세 오빠와 그들의 아내, 무엇보다 귀여운 조카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빈곤과 억압과 조심성을 일찌감치 깨치면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조카들은 더할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이다.(<굿바이, 평양>)


▲ 영화 <가족의 나라>. ⓒ미로비젼

<가족의 나라>는 뇌종양 치료차 일본에 3개월 동안 머무를 수 있는 특별 허가를 받은 오빠 성호(이우라 아라타)의 귀국으로 시작한다. 25년 만에 재회한 가족들은 마냥 행복하다. 하지만 여동생 리애(안도 사쿠라)는 언제나 집 앞을 지키며 성호 가족의 일상을 지켜보는 감시원 양 동지(양익준)의 존재가 불편하다. 양영희 감독은 지금까지 가족 구성원에게만 초점을 맞췄던 카메라 안에 처음으로 제3의 인물, '북한 출신' 양 동지를 집어넣음으로써 지금까지의 다큐멘터리 작업과는 사뭇 결이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방한한 양영희 감독에게 3월 7일(목) 개봉한 <가족의 나라>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

▲ <가족의 나라>의 양영희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가족의 나라> 언론 시사회 당시 저뿐만 아니라 주변 기자들이 죄다 눈물의 바다가 되었던 건 알고 계세요?(웃음)

양영희 : 음, 우는 분들이 많이 보이긴 했어요. 그런데 왜 울었어요? 혹시 기자 분 가족 중에도 북한에 간 분이 계신가요?

프레시안: 아뇨, 그건 아니고 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북한 개성이 고향이신데 1.4후퇴 때 남쪽으로 오셨어요. 전 서울 태생이기 때문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초등학교 때 서로 부모님 고향 얘기하다가 '북한 개성'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주변 친구들이 "너 북한 사람이었어?"라며 미심쩍게 쳐다보더라고요.(웃음) 어린 시절 한동안 그게 충격이었습니다.

양영희 : 재밌네요. 한국에 오면 월남한 이북 출신 2세대, 3세대들이 참 많아요. 흔히 재일교포 조총련 계열은 북한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재일교포는 95퍼센트 이상이 남한 출신입니다. 북한이 진짜 고향인 사람은 극히 드물고요, 한국에 오면 오히려 북한 출신 사람들이 많아요.

제 아버지는 조총련 간부였습니다. 그래서 일본 친구들이 "영희 아빠는 조선 국적을 유지하면서 남한 출신이었어?"하고 놀라곤 했어요. 일본은 섬이다보니, 다른 나라와 이어져 있질 않아요. 외국으로 가는 건 언제나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간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북한과도, 대륙과도 잇닿아 있다는 실감이 나잖아요. 우리가 지금 발을 내딛고 가는 길로 북한도 이어지고, 중국과도 이어지고, 러시아로도 이어지죠. 최근 TV 드라마나 영화에 중국 거주 조선족이나 탈북자도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저한테는 그런 의미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느낌이 아주 강합니다.(웃음) 일본인의 국제적인 감각은 부분적이라고 해야 할까, 미국이나 유럽만 본다든가 아시아의 다른 지역은 잘 안 보고 성장했다든가 하는 느낌입니다.

<가족의 나라>는 사람들이 기억을 안 하거나 잊어버렸던, 그렇게 풍화되어 갔던 '북송(北送)'이라는 정치적 이주 프로젝트에 대한 영화입니다. 저는 딱히 정의감이 강한 것도 아니고 사회 고발적인 의미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도 싫어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제 작품이나 제 존재 자체가 어떤 촉매의 역할을 해서, 지금까지 입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던, 그래서 지금까지 없었던 이야기가 나올 수 없었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일본 내에서는 <가족의 나라> 반응이 어떻습니까?

양영희 : 다루는 내용은 무거운데, 아라타나 안도 사쿠라 같은 젊고 인기 있는 배우들이 나오니까 반응이 확실히 좋습니다.(웃음) 심지어 패션 잡지에도 소개가 많이 됐어요. 그런데 잡지들에 소개될 때마다 꼭 '북송이란?'이라는 설명 박스가 붙어요. 젊은 사람들은 잘 몰랐던 과거를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는 거죠. 북송이 뜻하는 바를 잘 이해는 못해도 '아 들어봤어, 아라타가 나온 그 영화에서 봤어' 이렇게 되는 거지요.

북송은 북한과 일본 정부 양쪽에서 추진했던 엄청난 이민 프로젝트죠. 9만 4천명이 일본에서 북한으로 건너갔으니까요. 조총련이 이 계획을 적극 밀어붙인 건 맞지만, 조총련에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우익 신문들에서도 북한을 지상 낙원으로 소개했었거든요. 이제 와서는 그 과거가 창피하니까 '북송'이라는 사건 자체를 아예 지워버리려고 했던 겁니다. 책임 추구를 하자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이 있었고 이렇게 산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과거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섹시하지 않아요. 우리 가족에 대해 잘 알려면 과거를 잘 들어줘야 하는데, 그런 무거운 과거를 재미없다고 여기면 저 역시 그 사람이 재미없어져 버려요. 현재가 이렇게 형성된 이유가 다 과거에 있잖아요. 과거에 왜 흥미를 가질 수 없는지, 전 오히려 그게 궁금해요.(웃음)

<가족의 나라>는 아주 저예산으로 2주 만에 찍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배우들이 이 각본을 아주 사랑했고 무척 출연하고 싶어했으며 이런 영화가 일본 영화계에 꼭 필요하다고 말해줬어요. 일본에선 작년 8월에 개봉했는데 아직도 계속 상영 중입니다. 여기저기 수상을 하면서 자꾸만 관객이 늘어나고 상영관도 늘어나요. 우리조차 놀라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서도 개봉한다고 하니 배우들 역시 굉장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프레시안: 사실 한국에서도 북송 사업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을 것입니다. 감독님께서 잠깐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양영희 : 1959년 12월 북송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80년대 초까지도 진행되었다고 하던데, 대부분은 60년대 전반에 이뤄졌어요. 9만 4000명이 당시 북한으로 건너갔으니까요. 그 다음부터는 수가 줄었어요. 왜냐하면 건너간 분들이 일본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오지 말라고, 지상 낙원이 아니라고 편지를 보냈거든요.

프레시안 : 편지 검열을 받았을 텐데 그런 얘길 하는 게 가능했단 말인가요?

▲ 양영희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양영희 :
갈 때 약속을 한 거죠. 먼저 북한으로 건너가서 지상 낙원인지 확인해보겠다, 내가 편지를 보낼 때 연필로 쓰면 편지 내용이 참이고 잉크로 쓰면 반대로 해석해라, 이런 식으로요. 일본으로 도착한 편지를 읽어보니 '너무 행복하다, 나라에서 다 대주니까 부러움 없이 산다, 수령님 덕택으로 잘 산다'는 내용이 잉크로 쓰여 있는 거죠. 아니면 그런 내용을 우표 뒤에 쓰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받은 가족들 심정이 어땠겠어요. 눈물도 안 나오는 겁니다. 북한에 오지 말라고 하는 건, 이젠 두 번 다시 그 가족을 못 만나는 걸 뜻하니까요.

이렇게 들으면 마치 조총련 사람들이 사기를 친 것처럼 여겨질 텐데, 그 사람들도 그땐 정말 믿었던 겁니다. 당시 군사 독재 정권이었던 남한에 비해 북한이 잘 사는 나라고, 10년 안으로 남북통일이 될 거라는 믿음이 굳건했어요. 60년대 남한은 재일 조선인들을 모른 척 했지만 북한에선 조선 학교를 지으라며 돈도 많이 보내줬거든요. 세 오빠를 북한으로 보낸 우리 아버지도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아버지를 보면 북한에 대한 조총련 사람들의 충성심은 이론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제일 쓰레기처럼 취급받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라 김일성 수령이었으니까요. 그때의 '오야붕'을 배반 못하는 거죠. 자기를 구해준 오야붕에게 평생을 바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야쿠자의 논리 같기도 해요.(웃음) 아버지만 해도 가난해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는데 주체사상을 어떻게 속속들이 이해했겠어요. 감상적으로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 시대 재일 조선인들의 심리를 김일성이 잘 파고든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감독님의 오빠께서 일본에 실제로 귀국했던 게 언제인가요? <가족의 나라> 주인공 리애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감독님이 <디어 평양>을 만들기 이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보았습니다만.

양영희 : 음…1999년이었던 것 같아요. 2001년 9.11 사건이 발생한 다음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적'으로 규명하고, 또 2002년 일본 수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했거든요. 그 이후부터 북한은 말할 것도 없이 '에너미 넘버 원'이 되었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이 예전의 오빠처럼 일본으로 잠깐 다니러 올 수도 없게 된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그 질문을 드린 이유는, 영화 속 리애의 분노가 감독님이 첫 작품 <디어 평양>에서 보여주었던 감정보다 훨씬 강렬하고 선명했기 때문입니다. 감독님은 <디어 평양>에서 분노를 겉으로 표출하지 않고 부모님과 화해를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줬잖아요. 물론 <가족의 나라>가 감독님의 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본인의 모습과 모든 것이 일대일 대응하진 않겟지만, 아무래도 영화를 보는 입장에선 '리애=양영희 감독'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격렬한 모습의 당신은 언제 적의 당신일지 궁금했습니다.

양영희 : 오빠가 일본에 왔을 때의 재현 드라마는 아니에요. 실제 경험과 영화 내용에는 분명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에선 1997년경이 배경입니다. '오빠가 25년 만에 왔다'는 그 숫자가 외우기 쉬운 이유도 있었고, 또 아라타와 사쿠라의 실제 나이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주인공들의 나이를 좀 낮게 잡았어요. 리애의 극중 나이는 31살입니다. 아직 자기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색 중인 소녀처럼 설정했죠.

양익준이 연기하는 감시자와 리애가 대립할 때, 잘 사는 나라에서 나고 자란 리애가 좀 유치하고 어리게 보였으면 했어요. 오히려 거친 환경에서 어렵게 버티며 살아온 감시자는 어른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는 걸 대조시키고 싶었어요. 그 장면에서 리애가 맘껏 유치하게 굴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거, 그게 참 예쁘고 눈부시게 보이면서도 아직 어린애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리애가 그러죠. "당신도, 당신 나라도 싫어!" 이런 말 하는 거, 어린애니까 가능한 거잖아요.(웃음) 거꾸로 어린애니까 할 수 있는 솔직한 말, 어른이 하지 않는 말, 엄마 아빠도 절대 하지 않는 말이기도 하죠. '북한에 충성을 다하라'고 배웠던 조총련 간부의 딸인 제가 "그 나라는 싫다"는 말을 공적으로 외치기에는 40년 이상 걸렸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단지 '싫다'는 외침만으로 그치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도, 거기엔 가족이 있다, 라는 그 다음 대사까지 하나의 세트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리애가 저 말을 하니까 감시원이 그러잖아요. "그 나라에서 네 오빠도, 나도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고. 감시원의 그 말이 더 중요했고, 그 말이 필요했기 때문에 리애는 '어릴 필요'가 있었어요.

전 북한 체제가 정말 싫은데, 그래도 거기엔 제 소중한 오빠와 조카들이 있어요. 지금까지 그 말을 마음속으로 몇 만 번이나 외쳤던 것 같습니다. 일본에선 저를 마치 북한 대표나 노동대 대표처럼 취급할 때도 있고, 일본인 납치 문제를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저한테 따지는 바보 같은 아저씨도 있었어요. 나도 그 나라가 정말 싫다, 하지만 가족들이 있다, 이 말을 저 말고도 얼마나 많은 북송 가족 재일 교포들이 집 안에서 외쳤을까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말이죠.

▲ 영화 <가족의 나라>. ⓒ미로비젼

프레시안 : 아마도 관객들의 감정이 가장 크게 폭발할 장면은 클라이맥스에서 리애가 떠나는 오빠를 붙잡고 매달리는 부분일 텐데요.

양영희 : 영화에서 오빠가 리애에게 너는 여행 가방을 끌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살라고 그러잖아요. 우리 가족들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실제로 오빠가 제게 그런 말을 했었어요. 하지만 영화 속에서 리애가 오빠를 붙잡는 건, 제가 그렇게 못했기 때문에 사쿠라에게 시킨 겁니다. 사쿠라에게 시간은 걱정하지 말고 액션하라고 했어요. 네 마음이 내키는 대로 감시원 양 동지를 때려도 좋고, 차 위에 올라타도 좋다고 했어요. 카메라가 알아서 좇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요.

지금도 후회가 돼요. 오빠가 떠나버리는데 차 유리창이라도 깨버릴 걸,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게 후회스럽습니다.

프레시안 : 양익준 감독이 연기한 감시자는 가상의 인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똑같이 북한과 일본으로 나뉘어 살고 있는 가족 이야기를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다큐멘터리 작업과 극영화 <가족의 나라>가 구별되는 중요한 지점이 바로 이 제3의 인물인 감시자인데요. 왜 이 인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까?

양영희 : 실제로 오빠가 일본에 왔을 때에도 감시자는 있긴 했어요.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붙진 않았고요, 오히려 일본 공안이 집 앞에서 감시하더라고요.(웃음) 북한 측 감시원이 따라붙지 않아도 이미 감시가 된다고 할까요. 오빠는 꼬박꼬박 전화를 걸어 보고했고요, 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자가 엄청 많았어요. 공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던 이야기들까지 다 알고 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들었습니다.

<가족의 나라>를 본 어떤 관객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분 가족도 북송됐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가 되어 엄청나게 많은 돈을 내고 가까스로 허락을 받아 북의 고모님이 오셨대요. 그런데 따라온 감시원이 아예 그 집에서 두 달을 묵었답니다.(웃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내 영화가 너무 나간 건 아니구나, 오히려 너무 예쁘게 그린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감시자가 영화 전반부에는 괴물이지만 후반부에선 인간적으로 그려지죠. 게다가 (양)익준이 눈이 예쁘면서도 슬프잖아요. 감시자가 나쁜 사람으로만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익준의 그런 눈이 도움이 됐고요. 처음엔 사나워 보이지만 나중에는 사람다운 표정을 보여주는 부분이 필요했어요. 그러니까 이 영화에선 악인이 한 명도 없어요. 하지만 아무도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영화 속에서 엄마가 감시자에게 양복을 선물하죠. 양복은 그에게 딱 맞아요. 둘은 그전까지 제대로 얘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는데, 이미 엄마는 감시자를 잘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게 사랑인 겁니다. 엄마는 큰 사람인 거고요. 실생활에서는 개개인이 절대로 정치적인 파워를 이기지 못하잖아요. <가족의 나라> 안에서만큼은 엄마가 이겨야 했어요. 엄마가 정치보다 크고, 초상화 속 수령님보다 큽니다.

프레시안 : <똥파리>를 보고 양익준 감독을 캐스팅하게 된 건가요?

양영희 : 네. <똥파리>를 보면서 대단한 연출력이자 연기력이라고 감탄했어요. 영화를 보다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감독이 스크린에서 막 흘러 넘친다는 느낌이요. 그 감독의 지성일 수도 있고, 혹은 아주 따뜻한 감성일 수도 있어요. <똥파리>에선 주인공이 아버지를 때리는 장면을 보는데 거기서 양익준이라는 인간의 사랑이 흘러 넘쳤어요. 전 압도당했습니다. 개인적 경험을 극복하고 그걸 영화화해서 그 수준에 이르렀다는 게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 경험을 영화화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데, 심지어 너무 좋은 영화를 만든 거죠. 전 익준이가 평생 동안 <똥파리> 하나만 남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사람들이 자꾸 신작 만들라고 재촉하는지 모르겠어요.

▲ 양영희 감독의 <디어 평양>(2006). ⓒ양영희

▲ 양영희 감독의 <굿바이, 평양>(2009) ⓒ양영희

프레시안 : 한국에도 아라타의 팬들이 꽤 많습니다.(웃음) 이번에 <가족의 나라>를 보면서 놀란 게, 제가 기억하는 예전의 아라타는 패션지를 장식하는 멋진 모델이었는데 이 영화에서 그는 완벽하게 '평범한 남자'를 소화했어요.

양영희 : 모델 출신 배우들을 원래 별로 안 좋아해요. 어딘지 모르게 모델 티가 나버리거든요. 그런데 아라타는 모델 분위기를 다 빼버렸어요. 영화 속 오빠의 자세가 안 좋잖아요. 계속 구부정하게 어깨를 앞으로 숙인 그걸 완벽하게 표현하더라고요.

리애를 연기한 안도 사쿠라 같은 경우는 인형 같은 얼굴이 아니라서 계속 조연으로만 등장하는 편인데요. 전 사쿠라의 얼굴이 너무 좋아요. 화낼 때와 웃을 때 분위기가 정말 다르거든요. 여행가방 들고 서 있을 때도 너무 예뻤어요.

프레시안 :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굿바이, 평양>에 이어 극영화 <가족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게다가 모두 본인의 가족 얘기를 담으셨죠. 돌이켜보면 어떤 감회가 드시는지 궁금합니다.

양영희 : 시나리오를 쓸 때 항상 입구와 출구를 먼저 생각해요. 입구와 출구를 작게 만들고 싶어요. 작은 그림을 보여주면서 관객더러 그 입구로 들어오라고 초대하는 거죠. <디어 평양>에선 우리 아버지 재밌는 사람이죠? 하면서 초대했고 <굿바이, 평양>에선 평양에 사는 제 조카들 귀엽죠? 하면서 초대했죠. <가족의 나라>는 리애와 성호라는 특별한 남매를 보여주는 입구로 시작합니다.

막상 그 안으로 들어오면 여러 가지 문이 또 보일 거예요. 재일교포, 오빠와 여동생, 엄마의 사랑, 아빠와 아들의 갈등, 남한과 북한의 역사 같은 문이요. 어느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든지 그 안에서는 매우 큰 그림이 보일 겁니다. 그러다가 출구는 다시 작아져요. 작은 가족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다큐든 극영화든, 언제나 이런 과정을 거쳤던 것 같아요.

일본 영화들은 요즘 주로 작은 이야기를 다루죠.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은 이야기만으로 그친다고 생각합니다. 반경 3미터 이내의 얘기만 보여준달까요.(웃음) 예쁘고 깔끔하고 감성적이긴 한데,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들끼리만 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메인 코스가 아니라 아주 예쁘고 맛있는 디저트만 먹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가족의 나라>가 부족한 점이 많은 작품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일본 내에서 신선한 평가를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프레시안 : 준비하시는 다음 작품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양영희 : 완전히 환상적이기만 하거나, 상상력만으로 SF나 호러를 만드는 재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실제 이야기, 제 경험담, 제가 만났거나 들은 사람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드는 걸 더 좋아해요. 철저하게 사람에게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음 번 작품도 가족 이야기입니다. 단 이번에는 제 가족은 아닙니다.(웃음) 모델은 따로 있어요. 아무래도 제가 가장 잘 알고 디테일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소재를 찾다보니 재일교포 이야기가 빠질 순 없을 거 같고요. 가능하면 한국에서도 찍고 싶습니다.

▲ <가족의 나라>의 양영희 감독. ⓒ프레시안(최형락)

양영희 감독의 책 <가족의 나라>(장민주 옮김, 씨네21북스 펴냄)도 영화 개봉에 맞춰 3월 7일 발간되었다. 양영희 감독은 "<디어 평양><굿바이, 평양><가족의 나라>의 뒷이야기도 많이 나오고, 60년대 재일교포의 삶이 잘 보일" 거라면서 "책과 함께 본다면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남한과 북한,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자부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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