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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괴롭히던 괴물 용, 알고 보니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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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을 괴롭히던 괴물 용, 알고 보니 정체는…

[프레시안 books] 다비드 베의 <발작>

어떤 이들에게 가족은 빠져나와야 할 감옥과도 같다. 가족이라는 친밀하고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의 경험들은 숙명처럼 주어진 것이며, 집요하게 발목을 잡는다. 어른이 되기 위해, 이들은 이러한 지옥을 빠져나올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는다. 어떤 이는 가면을 쓰고 부정하며, 어떤 이는 마음속에 숨겨 놓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말과 글과 그림으로 부단히 그것들을 쏟아냄으로서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삶의 기록들은 하나하나 들추어내져 햇빛에 펴서 말려지고 형태를 갖추게 됨으로서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낸다. 그러한 과정들은 쉽지 않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개인적인 제의이며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자전적 이야기가 20세기 대안만화의 흐름에서 중요한 주제로 자리 잡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수순일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그래픽 노블 작가인 다비드 베(David. B)의 <발작>(이세진 옮김, 세미콜론 펴냄)은 그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형의 간질 발작을 통해 경험해 온 지난한 과정을 그려낸다. 기억은 무의식과 의식, 현실과 영적인 세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그려진다. 그 시선은 결코 객관적이고 담담하지 않으며 필사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이다. 형의 발작은 거대한 고대의 용으로 묘사되며 죽음과 영적 세계의 그림자들은 일상을 지배한다. 작가는 끊임없이 작품 속에서 자신이 왜 이 작품을 그려야 하는지를 확인한다.

"나는 내 속의 분노를 쏟아낸다. 형의 분노도 나와 같지만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형처럼 되면 안 된다는 공포가 나에게 글을 쓰게 만들었다."

"자, 인정하자. 넌 병들거나 미치고 싶지 않은거야. 죽고 싶지도 않고. 이건 불행을 쫓는 방법이자, 마법이야."

"수많은 책들이 나에게 위안과 도움을 줬어. 이젠 나의 책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고 싶어."

▲ <발작>(다비드 베 지음, 이세진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그리하여 저자가 그려낸 이미지들은 마치 주술과 마법의 서적처럼 고대의 상징과 주술적 도상들로 가득하다. 작가는 주술적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자신의 시각 언어로 사용한다. 이는 서구 근대의 상징주의 미술을 떠올리게 하는데 상징주의의 배경인 신지학이나 장미십자단 등의 신비주의적 공동체에서의 체험이 작품 전체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다비드 베가 피에르 프랑소와로 불리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삼남매는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이었으며 부모는 68혁명 세대로서 미술교사였고,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문제는 장남 장 크리스토프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면서 생겨난다. 형은 하루에 세 번씩 발작을 일으켰고, 그가 발작을 할 때면 마치 몸으로부터 떠난 것처럼, 즉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형이 발작을 일으킬 때, 주위 사람들은 차갑게 외면한다.

"네 아버지의 지표는 가톨릭 신앙이었지. 내 지표는 어머니가 주입시킨 공화국의 비종교적 이성이었고. 자유, 평등, 박애 말이다. 가톨릭이 해준 건 아무것도 없어. 네 아버지가 형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 신은 아실 거다. 우리에게 자유는 없었지. 아픈 아들을 두고 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겠니. (…) 박애라는 건 별로 볼 수 없었다. 장 크리스토프가 길에서 발작을 할 때 미친 듯이 고함치는 사람들을 봤어야 해."

부모는 장남을 데리고 의사에게로 가지만 인간을 기계처럼 다루는 현대 의학과 의사들에게 거부감을 느낀다. 차가운 주변의 시선과 현대의학에 대한 환멸에서의 도피처는 대안적 치료, 혹은 신비주의적 세계이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장남의 바람에 따라 다양한 대안적 치료, 혹은 영적 치료에의 순례를 시작한다. 매크로 바이오틱과 같은 선 치료에서 강신술, 루드르의 샘, 인도의 영적 지도자, 연금술의 탐구에 이르기까지 순례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분명 저자의 세계관이나 정신적 세계에 영향을 주었지만 형의 치료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매크로 바이오틱과 같은 대안적 치료는 부분적으로 효험이 있었으나, 어느 공동체든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공동체의 이상을 흐려놓고는 했던 것이다.

질병은 가족을 사회로부터 고립시켰다. 그것이 자신의 질병이 아니라, 가족의 투병일지라도 그러했다. 그 고립은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부터의 고립을 넘어서서 사회를 지배하는 질서로부터의 것이기도 하다. 서구의 합리주의는 사회 안에 견고히 자리 잡고 있는 듯 보였지만 사실상 죽음과 싸우는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은 이성주의가 아니라 영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세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가족은 이들 신비주의적인 세계에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 결국 형은 장애인 센터에 들어가고, 점점 더 자신의 병 뒤로 숨게 된다.

그러나 정작 영적인 과정, 즉 진지한 죽음과 무의식에 대한 탐구, 그리고 형의 질병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작가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는 일상적인 죽음과의 동행, 그리고 그의 주변을 점령하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영들의 세계로부터 도피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과연 형은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것일까? 형 안에는 귀신이 사는 것일까? 형은 자기 몸에서 떠나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자기 안으로 더 깊이 빠져 버리는 것일까?"

형의 발작과 관련된 끊임없는 질문들은 저자에게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 속에서 안내자를 구하게 한다. 일상적인 죽음에의 공포 때문에 그는 세계대전의 죽음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던 외할아버지와 관련된 새 머리를 한 인간, 그리고 어두운 숲의 그림자와 같은 정령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들은 가족의 질병으로 인해 외로운 저자에게 친구가 되어준다. 주인공은 그들과 매일매일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사실상 그것이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라는 것은 저자 자신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밤의 수호신들을 창작물 속의 주인공으로 탄생시킨다.

저자가 영적 세계에 대한 환상과 신비주의적 체험, 죽음에 대한 성찰에 매몰되지 않고 의식적으로 이들을 창작물로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이 자전적 이야기 전체에서 어쩌면 가장 의미있는 부분일 것이다. 그는 때로 형이 자발적으로 세상을 피해 발작 뒤로 숨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그 자신도 광기 뒤로 숨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작가가 창작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무의식을 표현하고 정리해 나가면서, 어느 순간 그는 이 죽음의 지난한 여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형을 병자로서 직시해 나가게 된다.

▲ <발작> 중에서. ⓒ세미콜론

작품의 1권에서 형의 발작은 고대의 용 상징으로 표현된다. 이 용은 형을 얽어매고 고통 속에 휘감기게 하고, 가족을 태우고 다양한 신비주의 공동체로 안내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어느덧 형을 하나의 병자로서 인식하게 되었을 때, 발작의 용은 사라진다. 갑자기 그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오랜 병치레로 망가지고 비만해진 형의 얼굴이다. 발작은 형을 휘감고 괴롭히는 악령이 아니라 단지 '병'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가족의 투병의 그림자로 얼룩진 한 개인의 자전적 텍스트인 동시에 오래된 예술의 기능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저자는 자신이 사로잡힌 무의식의 세계를 작품으로 그려냄으로서, 스스로를 구원한다.

예술은 오랫동안 영적인 세계의 그림자, 혹은 무의식의 통로로서 존재해 왔다. 고대의 이미지들은 죽음 앞에 불가항력적인 인간의 바람들을 반영하고 있었다. 주술적 예술의 시대와 종교적 도상의 시대가 끝나고 공식적으로 예술이 종교와 결별한 이후에도 여전히 신비주의는 일상생활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객관적 세계의 토대가 흔들릴 때, 인간이 이성주의가 문제해결의 준거 틀로 작용하지 못함을 깨달을 때, 죽음에의 공포가 무력감을 느끼게 할 때 사람들은 태곳적부터 면면히 이어지는 영적의 세계로 도피해 왔다. 계몽주의적 혁명의 이념이 무기력해지면서 상징주의 미술경향이 유럽 미술사 속에서 대두되었고, 꾸준히 서양 미술사의 주요한 흐름으로 존재해 왔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공포가 무의식을 예술의 세계로 송환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다비드 베의 그래픽 노블 <발작>이 마치 태곳적 이미지로 얽힌 상징주의적 텍스트로 보이는 것은, 이 작품이 자전적 작품인 동시에 가족의 긴 투병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질병과 죽음 앞에 무기력한 가족은 신비주의로 피신했으며 성장 과정에서 접한 비교적인 이미지들과 텍스트는 이 작품의 시각 언어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그리는 독특한 지점은 저자가 한 사람의 창작자로서, 신비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들을 자신의 의지의 통제 하에 놓고 자유로이 자신의 언어로 운용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한 점은 내러티브와 시각적 이미지 모두에 드러난다. 가령 어린 시절 형의 발작을 둘러싼 고통들, 신비주의적 체험과 관련된 기묘한 영적 존재들보다 더욱 악마적으로 기괴하게 그려진 것은 형의 발작을 구경거리로 삼는 '정상인들'의 시선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 형과 그가 말을 타고 승천하는 장면은 묵시록의 기사들, 혹은 영혼의 승천을 연상시키지만, 그것은 형의 병으로 인한 오랜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방되는 과정의 은유인 것이다. 아마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형의 질병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형의 얼굴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장면일 것이다. 형의 얼굴은 고대 종교의 마스크의 형상으로 변화하지만 결국 그 안에는 저자 자신의 얼굴이 들어 있다. 이는 사실상 형의 투병이 온전히 형의 것이 아닌 자신 안에서의 죽음과의 내적 투쟁이었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다비드 베의 <발작>은 아마도 내적인 이미지텔링의 가장 탁월한 예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 실세계와 영적인 세계,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의 불분명한 경계들은 작가가 걸어온 삶의 긴 여정이자 작품의 독특한 예술적 스타일을 낳은 배경이기도 하다. 이미지는 이야기가 표현할 수 없는 무의식적 세계를 원초적 상징과 은유, 차용과 표현주의적인 터치 등을 통해 표현한다. 한 개인의 이야기는 일련의 사건의 연속일 뿐 아니라 무의식적인 과정이며 감정적이고 영적인 색채를 지니기도 한다. 표현주의적인 터치들은 감정적인 동요들을 표현하지만 주술적 도상들은 원초적인 시각언어로서 작가와 독자 간의 무의식의 다리를 놓는다. 이는 아마도 그래픽 노블 형식의 예술적 승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오랫동안 죽음의 공포와 무의식의 세계를 다뤄왔다. 오늘날 상징주의적 이미지와 종교적 도상들은 환상적 스토리텔링에 기반한 예술작품 속에서 흔하게 소비되지만, 이러한 주술적 도상들이 여전히 개인적 맥락 안에서 유효하게 작용하며, 예술이 개인을 치유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의 감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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