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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버리자"고? 굴복의 다른 이름!

[장석준의 '적록 서재'] 니코스 풀란차스의 <국가, 권력, 사회주의>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유럽이 계속 시끄럽다. 재정 위기와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올해 들어 그리스가 좀 진정세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심상치 않다. 자본주의의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유럽이 졸지에 세계 자본주의의 화약고 신세가 된 것이다.

작년에 그리스는 심각한 경제 위기와 이에 대한 유럽 엘리트의 대응, 즉 긴축 정책이 어떠한 정치적 격변을 낳을 수 있는지 생생히 보여주었다. 1970년대 민주화 이후 수십 년간 서로 번갈아가며 집권하던 양대 정당, 우파 신민주주의당(ND)과 좌파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당(PASOK)은 이제 더 이상 독점적 양당 구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후자는 급격히 소수 정당으로 추락했다.

반면 평소 3퍼센트 정도 지지율을 보이던 PASOK 왼쪽의 정치 조직, 급진좌파연합(SYRIZA)이 급부상했다. 5월의 1차 총선에서는 16퍼센트를 득표하더니 한 달 뒤 다시 실시된 선거에서는 득표율을 27퍼센트로까지 올렸다. 비록 유럽 기득권 세력의 집중 지원을 받은 ND에 밀려 집권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삽시간에 그리스의 정치 지형을 바꾸며 강력한 제1야당으로 성장했다.

SYRIZA의 놀라운 성장에 다른 유럽 국가들의 좌파도 한껏 기대에 부푼 모습이다. 프랑스에서는 좌파전선(FG, 좌파당과 공산당 등의 연합)이, 스페인에서는 연합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연합)가 유행처럼 저마다 자기네 나라의 SYRIZA가 되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런 가운데, 다른 한 편에서는 좌파 특유의 날선 논쟁도 벌어진다.

주로 트로츠키주의 세력들 사이에서 전형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입장의 비판들이 나오고 있다. SYRIZA가 집권해봤자 개혁(개량)주의 노선이기 때문에 결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PASOK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민중이 바라는 변화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으레 1917년 10월 혁명의 재연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끝나곤 한다.

하지만 급진 좌파 내에도 이런 의견만 있는 것은 아니다. SYRIZA가 이제까지 신자유주의에 굴복해온 상투적 개혁주의와는 차이가 있다며 이 차이에 주목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이들은 SYRIZA가 긴축 철폐를 위한 구제 금융 조건 재협상, 외채에 대한 국제 시민 사회의 공개 감사, 은행 국유화 등을 진지하게 주창한다는 점에서 '좌파' 개혁주의 혹은 '급진' 개혁주의라 규정한다.

만약 이러한 좌파 개혁주의가 유럽 한 복판에서 정치적 기회를 갖게 된다면, 이 사태는 과연 유럽 전체,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어떠한 충격을 던져주게 될까? 이것은 확실히 남미의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에서 벌어진 일들이 그랬던 것보다는 훨씬 커다란 해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SYRIZA를 동지적 연대의 상대로 바라보는 이들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에 주목한다.

SYRIZA의 젊은 대표 알렉시스 치프라스 자신이 만약 SYRIZA가 집권하게 된다면 그리스에 '칠레 모멘트'가 닥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칠레 모멘트'란 무엇인가? 1970년에 칠레에서 인민연합(사회당과 공산당 등 칠레 좌파의 결집체)의 살바도르 아옌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을 말한다.

당시 아옌데의 새 정부가 선거 공약이었던 구리 광산 국유화 등 급진 개혁 조치들을 진지하게 추진하자 칠레에는 일촉즉발의 팽팽한 대치 상태가 벌어졌다. 국내 기득권 세력과 미국이 손잡고 인민연합 정부를 포위하며 총공세를 펼쳤다. 당연히 위기와 혼란이 뒤따랐다.

하지만 위기만은 아니었다. 1972년 자본가들이 파업을 단행하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그간 선거에서 좌파 정당에 표를 던지는 데 그쳤던 노동자, 민중이 직접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사장 없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조업을 재개했다. 동네에서는 유통업 사보타지에 맞서 주민 자치 조직들이 생필품 공급을 책임졌다. 덕분에 자본가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민중 권력'이라 불린 새로운 힘이 그 위력을 과시한 것이다.

이러한 '칠레 모멘트'가 이제 자본주의 중심부 유럽에서 눈앞의 가능성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런 예사롭지 않은 시대의 조짐을 마주하며 나는 한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실험이 결국 군부 쿠데타라는 비극으로 끝나는 것을 바라보며 유럽에서 좌파의 정치 이론과 전략을 고뇌했던 인물, 니코스 풀란차스가 그 사람이다.

SYRIZA의 '그람시', 풀란차스

SYRIZA는 본래 여러 정당, 정치 조직들의 연합이다. 그러면서도 선거나 일상 활동에서 '하나의' 정당처럼 움직여왔다. 최근에는 실제 한 정당으로 통합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연합의 중심에는 그리스 공산주의 운동의 한 갈래에서 연유한 '좌파 운동 생태주의 연합(Synaspismos)'이라는 당이 있다. 그런데 이 당의 부설 정책 연구소 이름이 다름 아니라 '니코스 풀란차스 연구소(NPI)'다.

'니코스 풀란차스'라는 이름을 정책 연구소 명칭으로 내세울 정도로 풀란차스는 SYRIZA의 중심 조직인 Synaspismos에게 소중한 존재다. 과거 이탈리아 공산당에서는 안토니오 그람시가 당의 이념적 상징 역할을 했었는데, Synaspismos에게 '그리스의 그람시'라 할 인물이 풀란차스다.

풀란차스가 프랑스어로 저서를 냈기 때문에 프랑스인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조국은 그리스다. 1936년에 아테네에서 태어났고, 아테네대학 법학부를 나왔다. 그리고 청년 무렵부터 그리스 공산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한국과 같은 시기에 비슷하게 좌우 사이의 내전을 경험한 그리스에서는 이 시기(1950년대)에 공산당이 비합법 지하 정당 상태였다.

풀란차스는 1960년대에 프랑스로 유학 가서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루이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젊은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풀란차스도 그 세례를 받았다. 5월 봉기로 프랑스 사회가 들썩이던 1968년에 나온 그의 출세작 <정치 권력과 사회 계급>(홍순권 옮김, 풀빛 펴냄, 1986년)은 정치학 방면에서 알튀세르 학파를 대표하는 저작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풀란차스는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으로만 남지는 않았다. 1970년대에 조국 그리스를 비롯해 스페인, 포르투갈 등 아직 군부 독재나 권위주의 정권이 잔존하던 남유럽 국가들에서 반독재 민중 투쟁이 폭발했다. 풀란차스는 이들 나라의 민주화 과정을 분석하면서(<군부독재, 그 붕괴의 드라마>(강명세 옮김, 사계절출판사 펴냄, 1987년)) 점차 자신의 이론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개념들을 추출해 번잡한 논의를 전개하던 접근법은 당대의 구체적 투쟁들에 대한 긴장된 분석에 길을 내주었다.

이 무렵 그리스 공산당은 국내파와 국제파라는 두 분파로 갈라졌다. 국제파가 소련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수한 데 반해 국내파는 그리스 국내의 대중운동을 중심에 놓고 이념, 노선을 혁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국내파의 고민은 1970년대에 이탈리아 공산당 등에서 대두한 이른바 '유럽 공산주의' 흐름과 궤를 같이 했다. 유럽 공산주의의 출발점은 소련 추종 노선에서 벗어나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자국의 독특한 경로를 찾자는 것이었다.

풀란차스는 그리스 공산당의 두 분파 중 국내파를 대표하는 이론가였다. 그리고 지금의 Synaspismos는 국내파가 1980년대 말에 국제파, 즉 현재의 그리스 공산당(KKE)과 최종 결별하고 따로 만든 당이다.

▲ <국가, 권력, 사회주의>(니코스 풀란차스 지음, 박병영 옮김, 백의 펴냄). ⓒ백의
1978년에 나온 <국가, 권력, 사회주의>(박병영 옮김, 백의 펴냄, 1994년)는 풀란차스의 이러한 이론적 전환의 성과들을 집약해놓은 저작이다. 그런데 1년 뒤 풀란차스는 갑자기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결국 이 책은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되고 말았다.

사실 <국가, 권력, 사회주의>는 읽기 수월한 책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풀란차스에게 여전히 짙게 남아 있는 알튀세르 학파의 그림자가 가장 커다란 장벽이다. 알튀세르 사단 특유의 복잡한 개념들과 논리 전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정말 친해지기 힘든 책으로 다가올 것이다.

게다가 또 다른 난점이 있다. 이 책은 1970년대 말 프랑스 좌파의 이론적 논쟁들에 대한 풀란차스의 응답이다. 그래서 저자가 맞수로 삼은 당대의 논객들, 즉 미셸 푸코나 질 들뢰즈 같은 후기 구조주의자들을 비롯해 알튀세르 학파 내에서 풀란차스와 서로 길이 엇갈리게 된 에티엔 발리바르, 자주 관리 사회주의를 주창하던 사회당 주변 인물들, 우파로 전향한 신철학의 개창자들이 어지럽게 출연한다. 이들의 논쟁 구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고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권력, 사회주의>는 사회 변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도전해보지 않을 수 없는 책임에 분명하다. 좌파 정치 이론이 도달한 최전방 지대가 이 책 안에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쓰인 30여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이론과 그 변혁 전략에 관한 한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국가는 '사물'이나 '주체'가 아닌 '관계'

<국가, 권력, 사회주의>를 처음 펴들면, 우선 다음과 같은 단호한 언명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짧은 '서문'의 마지막 문단이다.

"독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으로 명명된 것들과 관련된 모든 인용을 나의 이전 저작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저작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을 인용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 이유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신성한 교조와 텍스트를 지키는 사람으로 행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그러한 텍스트로 나 자신을 치장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반대의 이유 때문이다. 즉 나는 나 자신의 이름으로만 내가 쓰고 말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진다." (<국가, 권력, 사회주의>, 4쪽)

이 문구의 정신이 <국가, 권력, 사회주의> 전체를 지배한다. 이 책은 당시 프랑스 사회당이 대표하던 개혁 노선, 즉 선거로 집권하기만 하면 사회 변화를 '집행'할 수 있다는 생각을 논파할 뿐만 아니라 오래된 그 반대 노선 또한 비판한다. 기존 국가는 '분쇄'의 대상일 뿐이라는 코민테른 혁명 노선이 그것이다. 한때 풀란차스 자신도 이 노선의 동조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개량주의니 수정주의니 하는 낙인과 파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 시대의 길을 찾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국가, 권력, 사회주의>의 전반부는 이러한 모색을 위한 이론적 정초 작업이다. 당대의 논쟁 구도에 대한 진단이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법', '국가' 등 국가 이론의 근저에 자리한 쟁점들에 대한 사색이다.

말하자면, 본론으로 나아가기 위한 긴 서론이다. 초심자들을 질리게 만들기 딱 좋다. 그래서 나는 앞부분을 과감히 건너뛰고 2장('정치 투쟁 : 세력 관계의 응축으로서의 국가')부터 읽는 독서 전략을 추천한다. 2장 이하의 내용을 먼저 읽고 흥미를 느끼면 다시 첫 머리로 돌아와 '서론' 및 1장('국가의 제도적 물질성')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2장의 첫 머리에서 우리는 이 책의 핵심 주제와 마주친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풀란차스의 새로운 정식화다.

"나의 이전의 정식들 중 일부를 명확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즉 (자본주의) 국가는 본질적인 실체로 간주될 수 없으며, '자본'과 마찬가지로 세력 관계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계급들과 계급 분파들 사이의 세력 관계(항상 특수한 형태로 국가 안에서 표현된다)의 물질적 응축이라고." (165쪽)

한 마디로, 국가는 어떤 '사물'이나 '주체'가 아니라 '관계'라는 것이다. 다만 '응축된' 관계다. 쉽게 역전되거나 유동화될 수 없고 일정하게 틀이 짜여 지속성을 지니는 세력 관계. 이러한 정식화의 노림수는 다음의 문구를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가를 세력 관계의 물질적 응축으로 이해한다면, 국가를 (…) 전략적 장과 과정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그 결과 유동적이고 모순적인 전술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전술의 일반적인 목표 그리고 제도적 결정화는 국가 장치에서 구체화된다.

이러한 전술이 국가에 각인된다는 제한된 수준에서, 종종 대단히 명백한 전술들이 이 전략적 장을 가로지른다. 이러한 전술들은 서로 교차하고 경쟁하며, 어떤 장치를 목표로 하거나 다른 전술에 의해 단락됨으로써, 마침내 국가 '정치'를, 즉 국가 안에서 적대 관계를 가로지르는 전체적인 세력의 선을 그린다." (174~175쪽)


즉 자본주의 국가는 '무대'다. 이 무대에서는 계급 권력을 지닌 자본가 세력이 항상 주연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어쨌든 피지배 계급 역시 이 무대 위에 분명히 출연한다. 주연이 있고, 조연들이 있으며, 배역들 사이의 관계가 있다. 이들 사이의 투쟁이 항상 무대를 채운다. 이것은 확실히, 자본주의 국가를 자본가들만 착석한 이사회 테이블로 바라보거나 이들이 휘두르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국가에 주로 관철되는 것은 물론 지배 계급의 권력과 이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시각 전환은 우리에게 이 과정이 그렇게 자동적이거나 순탄하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국가는 '그 때 그 때'의 계급 세력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국가가 자본가 계급을 향해 쏠리는 것도 항상 기계적으로 보장된다고 볼 수는 없다. 아니, 이것은 '그 때 그 때' 확인되고 또 재확인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 과정은 사회의 여러 투쟁들에 노출된 시끄럽고 골치 아픈 것이다. 그렇다면 '때에 따라서는' 국가 안에 자본가 계급의 뜻을 관철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제 비로소 국가는 바위 덩이 비슷한 게 아니라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무엇으로 다가오게 된다.

'장악'이나 '분쇄'가 아닌 '변형'의 전략

국가를 이렇게 바라본다면, 이제 어떠한 정치 전략이 필요한가?

기존 사회주의 운동의 양대 흐름, 즉 개혁적 사회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의 밑바탕에는 서로 다른 국가관이 있다. 개혁주의자들의 경우는 보통선거권 쟁취를 통한 상황 변화를 일방적으로 강조한다. 노동자들도 이제 정당을 만들어 여당이 된다면, 국가를 자기 것으로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들에게 국가는 누구든 선거를 통해 손에 쥘 수 있고 일단 손에 쥐면 자신의 무기로 삼을 수 있는 무엇이다.

반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보통선거가 실시된다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국가는 애초부터 계급 지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온통 그 목적으로 짜여 있다. 설사 선거로 진보 세력이 최상층 공직 몇 개를 차지한다고 해도 국가 전체의 성격이 변하지도 않을 뿐더러 고분고분 명령에 따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물건을 어찌할 것인가. 애당초 노동자, 민중이 차지할 수 없는 무기라면 그저 파괴해버릴 수밖에. 즉, 혁명 노선에서 국가는 지배 계급의 무기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와 생리를 지닌 것으로서, 오직 '분쇄'의 대상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위의 두 흐름 모두 고유의 난점에 봉착했다. 개혁주의자들의 낙관과는 반대로, 좌파 정부의 개혁이 기득권 세력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항상 일이 벌어졌다. 언제나 국가 기구 안에서부터, 기득권 세력과 긴밀히 연관돼 있는 부분들이 개혁을 사보타지하고 나섰다. 이들이 오히려 좌파 개혁 세력을 포위하여 무력화시키곤 했다.

국가를 '장악'한다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개혁주의자들의 국가관에 대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이 곧 우리의 대안인가? 그렇게 답할 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20세기의 교훈은 그런 편한 답변을 허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기존 국가 기구를 '분쇄'했던 역사적 경험, 즉 러시아 10월 혁명이 초래한 뜻밖의 결과였다. 혁명 러시아에서는 기존의 의회 대신 새로운 대의 기관으로 소비에트(노동자 농민 병사 평의회)가 등장했다. 구체제의 경찰과 군대도 해산되고, 국가 기구 전체가 새로 조직됐다.

그런데 이 새로 등장한 국가가 과거의 차르 정부는 댈 것도 아닌 관료 독재를 펼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미 다 아는 이야기다. 10월 혁명의 이러한 변질은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혁명 노선이 대중의 신뢰를 잃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상이 외부에 그대로 알려지는 게 우파의 어떠한 반공 선전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국가, 권력, 사회주의>가 제안하는 정치 전략은 이러한 실패들을 딛고 출발한다. 국가 '장악' 노선의 한계를 넘어서려 하면서도 국가 '분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를 시도한다. 그래서 나온 게 국가 '변형'의 시나리오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전망에서, 인민 대중과 그들의 정치적 조직의 권력 획득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 과정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며, 반드시 국가 장치의 변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176~177쪽)

선거 정치만으로는 안 된다. 풀란차스에 따르면, 관건은 대중 운동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국가가 '세력 관계의 응축'이라면, 국가를 바꾼다는 것은 세력 관계를 뒤집는다는 것이고, 노동자, 민중 편에서 그 힘은 대중 운동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인민 대중의 조직적 자율성"(195쪽)에 기초한 대중 운동들이 있어야 하며, 이 운동들은 "국가 장치의 물리적 공간에 현존"하면서도 "국가 장치로부터 거리를 둔 거점과 조직망"(같은 쪽)을 확보해야만 한다.

이러한 운동들은 결국 기존 국가 기구 바깥의 새로운 권력 거점으로까지 발전해야 한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러시아와 서구의 혁명 과정에서 등장한 노동자 평의회이다. 1972년에 칠레에 등장한 '민중 권력'도 그 맹아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전통적 혁명론과 풀란차스의 주장 사이에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곧바로 길이 갈린다.

10월 혁명 경험에 기반한 코민테른식 혁명론은 새로운 민중 권력 기관이 기존 국가 기구를 포위하고 결국은 후자를 분쇄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풀란차스는 국가 '밖' 대중 운동들이 국가 '안'으로 확장되어 국가 안과 밖 모두에 걸쳐 투쟁이 전개되는 것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국가 '바깥의' 대중 운동들의 힘으로 국가 '안의' 투쟁들을 촉발하고 그래서 결국 국가의 구성과 작동 방식이 그 밑바탕에서부터 바뀌어가는 것('변혁' 혹은 '변형(transformation)')으로 보자는 것이다.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길에 있어서 권력 장악의 장기간에 걸친 과정은, 기본적으로 국가 조직망에서 대중이 항상 가지는 분산적인 저항의 중심이 국가라는 전략적 지형에서 실질적인 권력의 현실적 중심이 되는 형태로 새로운 저항의 중심을 창출, 발전시키고 보급, 발전, 강화, 지도하는 과정이다." (334쪽)

이러한 구상은 풀란차스와 마찬가지로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성공과 실패를 바라보며 우리 시대의 변혁 전략을 고민한 또 다른 좌파 정치 이론의 거장, 랠프 밀리밴드의 결론과도 유사하다. 밀리밴드는 한때 자본주의 국가 이론 영역에서 풀란차스의 치열한 논적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정치적 결론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일치한다.

"경제 구조, 사회 구조 그리고 정치 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정부는 국가 권력과 병존하고 국가 권력을 보완하는, 그리고 시기적절한 '대중 동원'과 대중 행동의 효과적 지도를 위한 굳건한 토대를 이루는 권력 기구의 망을 건설하기 시작하고 고무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취하는 형태들(노동자들의 작업장에 존재하는 노동위원회, 지역별 시민위원회 등)과 이러한 기구들이 국가에 '융합'하는 방식은 청사진으로 제시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가 가장 적합한 형태이든 간에, 그것은 결성해야 할 필요가 있고, 또한 결성해야만 한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사회 변혁 운동 : 칠레 혁명과 아옌데 노선 연구>(강문고 엮고 옮김, 친구 펴냄, 1990년), 301쪽)

이러한 전략은 확실히 통상적인 개혁주의와는 구분된다. 고도로 '응축'된 세력 관계의 역전은 단순한 개혁의 누적 이상의 충격을 요구한다. 그 충격에 어떠한 이름을 붙이든, 그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어떠한 다양성을 보이든, 그것은 기존의 정치 관념이나 관행을 넘어서는 사건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국가 내부의 세력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점진적이고 연속적으로 개량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라는 기관실의 부품을 하나씩 정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단순히 정부의 포스트나 상층부를 점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실질적인 단절의 과정인데, 국가의 전략적 지형에 있어서 세력 관계가 인민 대중에 유리한 형태로 변화할 때, 그 절정에 도달한다." (<국가, 권력, 사회주의>, 335쪽)

그럼에도 풀란차스는 별 생각 없이 '혁명'이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것은 피하려 한다. 굳이 이렇게 말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및 자유(이것 역시 인민 대중이 획득한 성과이다)의 확대, 심화와 직접 기층 민주주의의 확장 및 자주 관리적 거점의 분산, 확대를 접합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근저적으로 변혁하는 것"(331쪽)이라고. 여기에는 '서문'의 단호한 어구들과 쌍을 이루는 다음과 같은 확고한 문제의식, 20세기가 우리에게 안겨준 고뇌가 깔려 있다.

"나는 이 저작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있어서 국가 장치의 근저적 변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 이 표현은 두 가지 진입 금지를 표시하는 일반적 방침을 지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제1의 진입 금지.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길에 있어서 국가 장치의 근저적 변혁은 더 이상 국가 장치의 분쇄 또는 파괴라는 전통적으로 지시되었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길 및 민주적 사회주의가 정치적 다원주의(복수 정당제) 및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 보통선거의 역할에 대한 승인, 모든 정치적 자유(반대파의 정치적 자유를 포함)의 확대, 심화 등을 의미한다면, 말장난이 아닌 한 국가 장치의 분쇄 또는 파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338~339쪽)


'정치'를 우회할 수는 없다

<국가, 권력, 사회주의>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정치 이론의 완결 편은 아니다. 이 책은 오히려 미완성의 느낌이 더 강하다. 국가론의 새 바이블이라기에는 비어 있는 구석이 많고, 핵심 주제라 할 국가의 정식화나 변혁 전략도 앞으로 좀 더 다듬어져야 할 제안이나 가설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이 한 더미의 헐거운 구상들이 지금 우리에게는 가장 앞선 출발점이다.

더구나 우리가 마주한 시대의 독특한 상황이 풀란차스의 마지막 메시지를 더 절실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한 세기의 좌파 운동의 역정은 '사회주의'를 '국가주의'의 동의어로 만들었다. 어쩌면 사회주의의 그나마 남아 있는 현실 영향력(그게 스웨덴 사회민주당을 통해서 나타나든 중국 공산당으로 나타나든)도, 거기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생각이 들지 못하게 막는 거대한 역사적 제약도 다 이 '사회주의=국가주의'라는 경험에 바탕을 둔다.

그래서 국가 기구 아닌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에서 새로운 사회의 희망을 찾으려는 흐름이 그 어느 때보다 힘을 얻고 있다. 국유화 대신 노동자 자주 경영이나 협동조합에 주목하는 것도, 100년 전의 길드 사회주의가 다시 발굴되는 것도, 아나키스트 운동의 어떤 측면이 새삼 긍정적으로 부각되는 것도 다 이런 흐름의 표출이다.

하지만 이러한 양상에는 30여 년 전 풀란차스가 우려했던 그 역편향의 위험이 존재한다. 국가 '바깥'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마치 국가를 우회하거나 포기하고서도 근본적 사회 변화가 가능할 것처럼 생각하는 편향 말이다. 이런 태도는 결국 다양한 반(反)정치주의 입장, 즉 정치적 기권주의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굴복의 또 다른 방식일 뿐이다. 국가를 우회하는 것은 기존 국가 기구를 통한 지배 권력의 온존을 용인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렇게 방치된 권력은 어떠한 국가 '바깥'의 시도도 쉽게 기존 권력 망 안으로 포획해버릴 수 있다. 국가라는 무대에 참여함으로써 포획될 경우보다 더 무력한 흡수이기에 그 위험성은 더 크다. 즉, 국가주의의 극복은 국가의 우회나 포기로 이뤄지지 않는다. 정치를 포기하고서는 어떠한 진지한 변화도 불가능하다.

국가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도 우리는 국가 '안에서' 싸워야 하고, 현재의 정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대중 운동과 좌파 정당의 강력한 연합에서 출발해야 한다. 30여 년 전 신자유주의의 태동기에 전개된 고뇌의 산물 <국가, 권력, 사회주의>는 한 세대를 건너뛰어 신자유주의가 낙조를 드리우는 시대를 마주한 우리에게 이 역설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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