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의 <신문학사>(1939~1941, 한길사 펴냄) 이후 우리는 여러 편의 문학사를 얻었고 그것은 당대에 충분히 도전적이었다. 프로문학의 관점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한국 문학사를 서술한 임화의 문학사가 그러했거니와, 외국 문예사조의 유입을 문학사적으로 파악한 백철의 <조선 신문학 사조사>(1947~1949), 해방 이후 순수 문학의 정통성을 정립하려 한 조연현의 <한국 문학사>(1956), 식민사관을 극복하려는 학풍에 힘입어 '근대 문학'의 내재적 발전론을 써나간 김현·김윤식의 <한국 문학사>(1973, 민음사 펴냄), 그리고 해금 조치 이후 복자로 얼룩진 문학사를 복원하고 남북한 문학을 통합하려는 <한국 근대 민족문학사>(1993, 김재용·이상경·오성호·하정일 지음, 한길사 펴냄) 등 문학사는 변화된 인식틀(에피스테메)에 따라 기존의 문학사의 한계를 딛고 끊임없이 새롭게 쓰여 왔다.
▲ <한국 현대 소설사>(조남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서문에 해당하는 저자의 '서술 정신과 방법'에 기대어 좀 더 세밀하게 이 책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되도록 많은 소설을 읽었다. 과거의 문학사 기술이나 소설 기술에서 월북 작가의 소설, 수준 이하의 소설, 무명작가의 소설 등의 이유로 정독, 분석, 해석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소설들을 가급적 많이 읽었다."
이 방법론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으로, 다루어진 작가와 작품 편수에 있어서 이 책은 지금까지의 문학사 혹은 소설사 중 최대치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실례로 2급 혹은 주변부로 취급되었던 김광주, 최독견, 박노갑, 임노월 등의 작품들이 대거 편입되어 서술되고 있다.
"둘째, 대상 작품의 객관적 평가에 힘썼다. (…) '역사는 해석'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역사 기술은 문제작을 새롭게 작성하고 논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 현대 소설사는 비평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하고 독자 반응사의 자장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이 두 번째 방법론은 기존의 과거 문학사의 '근대성' 탐구나 베스트셀러 편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로 읽히며 '2급, 주변부 작품'의 대거 편입으로 실천되고 있다.
"셋째, 소설은 종합 문학의 양식이라는 인식을 용인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 입장은 곧 소설이라는 장르와 '담론, 서사'와의 관련성을 새롭게 진단한 것으로, 개화기 소설 서술에서 '논설' '정치소설' '과학소설'과 같은 주변 양식에 대한 적극적인 조명으로 입증되고 있으며 한편, 이후 소설사에서는 의미 있는 관련 담론을 맥락적으로 들여옴으로써 실천하고 있는 부분이다. 가령, <경향신문> <만세보>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신문에 실린 신소설 주변 작품, 백학산인의 '만인산'이나 일우생의 '오갱월' 등을 해석한다든가 이광수, 김남천, 이기영의 소설을 그들의 평론과 함께 읽는 독법 등이 그러하다.
"넷째, 작품과 작품의 관계에 주목하여 의미단위를 만드는 데 힘썼다."
의미 단위는 본문에서 '신소설, 농민소설, 노동자소설, 주의자 소설, 관념소설, 예술가소설, 경향소설' 등의 유형과 '귀농 모티프, 술 모티프, 금광 모티프, 야학 모티프, 전향 모티프' 등 반복 모티프의 분석 등으로 나타난다.
"다섯째, 한국 현대 소설은 한국 현대사나 사회 또는 한국인에 대한 가장 정확하면서도 충실한 담론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저자는 개별 작품을 낭만주의, 계몽주의, 사회적 리얼리즘 등과 같은 기존의 거대 이데올로기 혹은 도식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류하는 대신, 개개의 현실인식 태도를 '작은 이데올로기'로 명명하며 추출하고 있다.
"여섯째, 날카로운 시선과 따뜻한 눈길을 교차시키는 가운데 작품 하나하나의 핵심을 건져내는 데 힘썼다."
개별 작품은 단순한 언급이나 목록 나열에 그치지 않고 줄거리에서부터 심화된 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 분석되고 있다.
"일곱째, 어떤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든지 모든 소설 유형은 현실 부정을 행사한 것과 현실 극복책 제시를 꾀한 것을 나눌 수 있다."
저자는 지식인 소설, 농민소설 등의 유형 아래 '보여주기'와 '실천적 의지의 표출'이라는 현실 태도를 구분하여 소설을 정리하고 있다.
이상 저자가 제시한 방법론에 의해 결과로 나온 이 소설사의 특징과 성과를 독자의 입장에서 다시 정리하자면, 1) 방대한 작품을 담고 있으며 작품은 최소한 줄거리 이상으로 조명되고 있다. 2) '소설'이라는 근대 양식에 대한 맹목에서 벗어나 논설이나 주변 서사에 적극적으로 의미 부여 하고 있으나 개화기 이후의 소설사에서는 주변 서사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3) 문학사적 체계를 볼 때 이 소설사는 모티프, 유형론 등 주제사와 형식사를 취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일관된 문학사적 체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1930~31', '1930년대 전기(1932~35)' 등의 장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실제적으로는 연대기별 정리에 가깝다.
즉 이 책은 크게 연대기별로 작품 군을 나누고 그 밑에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을 분류, 그리고 다시 단편소설을 지식인, 노동자, 농민, 주의자 등의 유형으로 분류하고 서술하고 있다. 이 유형은 다시 현실 태도에 따라 '보여주기와 응전'으로 나뉜다.
4) 이 유형 구분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기존 문학사의 리얼리즘,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구분을 해체한 대신 현실 인식 태도에 기반을 두고 작품을 분류하고 있다. 5) 논설 등의 서사양식 등을 적극적으로 편입시키는 데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소설, 시, 수필 등의 근대장르의 도식적 구분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으며, 이러한 서사 확장은 '예술과 자아와 사랑에의 개안' 같은 장 설정과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 문학 연구의 성과를 반영한 것이다.
위의 특징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리 시대의 달라진 인식 틀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거대 담론과 서사 대신 미시 담론으로의 변화이다. 이는 리얼리즘/모더니즘 구분의 해체 뿐 아니라 2급 작가, 작품 군에 대한 적극적인 조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기존의 지배 담론과 지식 권력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정전의 해체이다. 90년대 이후 과거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여겼던 '고전'(classic)이나 '정전'(canon)은 끊임없이 도전받아왔다. 그리하여 시대와 장소, 주체에 따라 얼마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고 인식되기 시작한 '정전'의 목록은 여러 가지 방향에서 새롭게 제시되고 있으며, 이 소설사는 그러한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저자가 기존 문학사의 비평사적 태도와 독자 반응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셋째, 필연성 대신 우연성에 대한 강조이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 임화의 문학사는 물론 발생론적 구조주의나 내재적 발전론(김현·김윤식), 민족적 창조적 정신의 진화와 유기체적 역사관(조윤제)에 바탕을 둔 문학사들은 시대와 문학적 양식 혹은 문학적 변화에서 어떤 필연성을 발견하려는 모색이었다. '연대기적 구성'과 "자족적이며 독립적인 소설사 목표"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의 문학사적 서술은 필연성보다는 우연성에 가깝다. 물론 저자는 소설 작품과 현실과의 관계, 그리고 당대 작품 군과 개별 작가의 작품 군 사이의 상호텍스트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이 인과관계들은 여타의 문학사에 비해 느슨하고, 또 개별 작품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 묻혀 희미해져 있다.
저자는 1장 '소설사의 역사철학적 함의'라는 장에서 선적 모형, 순환적 모형, 혼돈의 모형으로 나눈 윌리엄 드레이의 역사철학을 논하면서 선적 발전론이나 진화론을 비판하고 '순환적 모형, 혼돈의 모형'을 각별히 주목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등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순환적 모형의 수용으로, 연대기적 구성과 개별 작품의 파편적 나열은 역사의 불연속성과 우발성을 강조한 혼돈의 모형의 수용으로 볼 수 있다.
'거대 담론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 '정전의 해체', '근대문학 장르의 해체와 불연속성'에 이르기까지 이 책이 기반하고 있는 시대정신은 포스트모던과 해체주의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 역사관은 기존의 사실과 객관에 대한 믿음, 발전과 진보, 구조와 총체 대신 사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픽션에 가까운 역사, 왕조사와 정치사 대신 스캔들, 편지, 변기, 범죄 등으로 이루어진 일상사, 풍속사, 미시사를 불러왔다. 2000년대 이후 우리 문단과 학계 또한 이러한 영향에 힘입어 기존의 지배 담론 대신 다양한 주변부를 호명해왔다. 작가론이나 작품의 미학적 탐구 대신, 잡지를 비롯한 매체에 대한 폭넓은 연구와 이를 통한 미시적 조명 등이 그 실례이다.
그리고 2급 작가, 작품의 방대한 서술로 이루어진 조남현의 소설사는 이 흐름의 '문학사적 반영물'이자 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사에 의해 기존에 주변부로 밀려났던 작가와 작품은 새롭게 생기를 얻고, 그로 인해 우리 현대 소설사의 지평은 한껏 확장되고 두터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사를 읽으려는 이유 중 하나, 즉 문학사적 이해를 통해 '지금 우리 문학'의 방향과 문학적 전진을 가늠하려는 욕구를 시키기에는 부족하다. 이는 조남현의 현대 소설사 뿐 아니라, 지금 우리 학계의 트렌드에 대한 아쉬움이기도 하다. 수많은 잡지와 글들을 뒤지고 읽어야 되는 이유, 그것은 비록 임화처럼 "절박한 현실적 필요"에 의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카데미안의 무미건조한 해석과 분석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2급 작가와 작품이 조명되어야 하는 이유는 2급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어야 한다. 새로운 문학사를 읽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모든 개별 작품을 균등하게 평가하는 민주적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류 삼류라고 치부했던 것이 사가의 새로운 문학적 가치 척도에 의해 새로운 지평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나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이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서는 '라이언 일병'에 집중해야 하며, 그 구출의 필연성과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조남현의 <한국 현대 소설사>의 뛰어난 성과는 군소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재조명과 더불어 정확한 원전에 의한 작품 해석과 서지학적 정리이다. 이 책에 수록된 많은 군소 작가의 작품들을 저자는 당시 발표된 매체 뿐 아니라 출판 단행본과 비교하면서 직접 읽고 정리해놓고 있다. 그러나 군소 작품과 개별 작품에 대한 애정과 배치는 이 저술을 문학사라기보다는 백과사전에 가깝게 만들어놓고 있다. 이 백과사전은 과거 프랑스의 백과전서파가 그러했듯, 무지한 독자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파하는 '계몽'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 계몽에 의해 새로워진 지평에서 문학사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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