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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인왕산, 알고 보니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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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인왕산, 알고 보니 통했다!

[꽃산행 꽃글] 꽃들의 전략

1

발 없는 식물이 자손을 퍼뜨리는 방법은 기발하다.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기도 한다. 봉선화처럼 손 대면 톡, 터져서 주위로 힘껏 흩어지기도 한다. 나도물통이처럼 흰 연기를 내며 빵, 터지기도 한다. 도꼬마리처럼 갈고리가 있어 지나가는 등산객의 엉덩이에 슬쩍 올라붙기도 한다.

지난 해 가을. 백암산 갔을 때였다. 꽃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뒷정리를 하는데 도꼬마리 씨앗이 배낭과 등산복에 붙어 있었다. 어릴 적 보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씨앗이었다. 떼내려고 해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로 도망가려 하지도 않고 손이 간지럽도록 악착같이 붙어 있는 씨앗들. 그 씨앗을 보려는데 슬며시 회심의 용도가 떠올랐다. 서울로 데리고 가자! 집에 와서 수험생인 아이 둘을 불렀다. 녀석들의 어깨위에 도꼬마리를 붙여 주었다. 엿이나 떡보다는 합격을 기원하는 데 훨씬 더 영험한 기운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식물들의 기발한 전략을 일천한 상식의 내가 어찌 다 알겠는가. 자연계에는 내 머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할 방법이 동원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방법이 있다. 꽃은 벌을 유인하여 꽃가루를 묻혀 수정을 한다.

여름 휴가에 찾은 강원도 인구항 어느 골목길. 바닷가 마을이라 돌담이 넙데데하게 쌓여 있고 그 위로 호박이 줄기를 우렁차게 뻗고 있었다. 호박꽃이 적나라하게 벌어진 곳에서 노란 꽃가루를 허벅지게 묻히며 놀고 있는 꿀벌을 만났다. 어느 식물학자는 벌을 '날아다니는 음경(陰莖)'이라고도 한다. 호박꽃은 벌에게 꽃가루를 잔뜩 묻히며 그들의 전략을 차질없이 실천하고 있었다.

▲ 꿀벌이 맘껏 노닐도록 품고 있는 호박꽃. ⓒ이굴기

▲ 호박 꽃가루를 흠뻑 묻히고 있는 꿀벌. ⓒ이굴기

2

지리산 칠선계곡. 칠선교를 지나 제법 가파른 경사 길을 올랐다. 양지바른 따뜻한 등성이에 무엇인가 특이한 게 눈에 띄었다. 그것은 낙엽과 잔돌이 뒤섞인 진흙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어느 누가 눈 똥이었다. 똥의 규모로 보아 제법 덩치가 나가는 새이거나 짐승일 것 같았다. 그 무더기에는 소화가 아직 덜된 노박덩굴의 열매와 겨우살이의 열매가 들어 있었다.

그 똥을 눈 짐승은 그 열매를 아주 맛있게 먹을 것이다. 그런데 왜 미처 소화도 덜 된 채 그것을 바깥으로 내놓았을까. 그것 또한 식물의 전략일 것이다. 이렇게 동물의 내장을 한 바퀴 돌고 나온 씨앗은 발아도 훨씬 잘된다고 한다. 흐물흐물한 태(胎)처럼 투명한 막을 덮고 있는 그 씨앗들은 보온 효과도 누리면서 천천히 흙으로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날 것이다. 지금쯤 시원하게 똥 누고 또 먹이를 찾아 어느 골짜기를 헤맬 그 짐승과 달리 식물의 씨앗들은 흐뭇하게 웃고 있는 것 같았다.

▲ 지리산 칠선 계곡에서 본 어느 짐승의 똥. 그 안에는 씨앗들이 들어 있었다. ⓒ이굴기

3

사무실 근처에 있는 인왕산에 자주 오른다. 먼 산에서 본 꽃을 인왕산에 다시 만나면 헤어졌던 형제라도 만난 듯 아주아주 반갑다. 석굴암 올라가는 중턱에서 조금 비켜난 곳에 있는 샘터. 인왕산 아래 주민에게 좋은 약수를 공급하는 그곳은 낮에 가면 깨끗하게 빗질이 되어 있고 정갈한 분위기가 물씬하다. 작년 여름 그곳에서 제비꽃을 만났다. 태백산에서 보았던 제비꽃과 종류가 같았다. 잎이 어린아이의 가는 손가락처럼 쭉쭉 째진 제비꽃. 그것은 남산제비꽃이 아닌가. 비록 그것이 아주 흔한 제비꽃이라 해도 인왕산에서 발견했기에 나는 충분히 놀라고 마음껏 반가운 것이다.

계사년 들어 처음으로 인왕산에 올랐다. 이번에는 부산에서 온 식물 전문가와 동행했다. 그간 숱하게 인왕산에 올랐으나 아무런 나무 이름을 몰랐으니 그저 문맹인 채 오르고 내렸던 셈이다. 이번에는 좋은 기회라 아주 작정하고 나무 이름을 묻고 배우고 외우기 시작했다. 인왕산에는 제법 많은 나무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자하문 쪽에서 올라 정상을 지나 범바위를 지날 때였다. 그분이 고개를 숙이고 작은 열매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은 마지막 잎새처럼 줄기에서 하나만 외롭게 달려있는 것이었다. 때가 때이니만큼 물기가 바짝 없어 바싹 마르고 있는 중이었다. 얼른 달려가는 나의 눈으로 노랗게 달려드는 열매. 아! 그것은 노박덩굴의 열매였다! 이럴 수가! 지리산에서 만난 똥속의 노란 열매, 그 노박덩굴의 열매를 인왕산에서 또 만나 줄이야!

틈 나는 대로 노박덩굴 열매의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으면 봄도 어느덧 내 차지가 될 것 같았다. 아주 감격에 겨워 범바위 돌계단을 내려오는데 지리산 칠선 계곡에서 지금쯤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노박덩굴 씨앗이 떠올랐다. 송찬호의 시 한 편도 떠올랐다.

산토끼가 똥을 / 누고 간 후에 // 혼자 남은 산토끼 똥은 /그 까만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 지금 토끼는 / 어느 산을 넘고 있을까?(송찬호, '산토끼 똥' 전문)

▲ 인왕산 범바위 옆의 노박덩굴 열매. ⓒ이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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