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야할 길>은 그가 중년으로 넘어가는 시기 인생의 중간 점검과 그 안에서 찾아야 할 삶의 가치와 의미를 주로 다루었다면, 이 책은 그로부터 20년 후, 그가 인생을 정리하는 64세경의 노년기가 되면서 죽음에 대해 본질적이고 구체적인 고민을 하면서 쓴 책이다. 나는 무엇보다 저자가 자신의 현재 나이에 맞닥뜨리는 고민을 쌓아온 삶의 궤적과 누적치 안에서 풀어내는 책이 진짜배기라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스캇 펙 박사의 이 책은, 자세를 바로하고 찬찬히 읽어 볼만 했다.
▲ <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스캇 펙 지음, 조종상 옮김, 율리시즈 펴냄). ⓒ율리시즈 |
저자는 먼저 꼭 삶을 이어갈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죽음이 분명한 상황에 오로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주렁주렁 튜브를 꼽고, 피를 뽑아대고, 강심제 등을 넣으며 인위적으로 혈압을 유지해서 삶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치료이고 합당한 행동인가라는 물음이다. 실제로 자기가 치료하던 말기 환자의 강심제 투여 속도를 늦춰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경험을 담담히 소개하기도 한다. 동시에 자신의 할머니에게 지나치다 싶은 수준의 치료를 하던 의사들을 바라보던 학생 때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며칠 만에 기적적으로 감염에 의한 생명 위협의 순간에서 벗어나면서 그 후 몇 년 동안을 건강하게 살았던 생생한 반대의 사례를 얘기한다. 이는 결국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인간이 결정할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러면서 현재 현대 의학에서 벌어지는 안락사와 관련한 논쟁이 자기 의사 결정의 문제나 삶의 의미와 철학, 생명이 누구로부터 부여된 것인가의 문제, 고유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고민 없이 경제적 측면에서만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즉, 나아질 희망이 없는 환자에게 의료진의 시간과 병상을 사용하게 하는 것은 가족의 경제적 부담 측면을 떠나서 사회적인 비용 측면에서도 부정적이고 위급한 환자들의 기회를 뺏는 일이 될 수 도 있다는 논지다.
삶의 양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삶의 질'이라는 것,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야한다는 얘기이고 더 큰 시각으로 문제를 보자는 것이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생명 연장의 가능성은 획기적으로 발전했지만 그 와중에 간과되어온 것이 삶의 질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수술 불가능한 폐종양이 있고 방사선 치료로 신체 상태가 극도로 나쁜 상태가 된 멜컴이라는 환자가 끝까지 병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일 때 반대로 "당신은 분명히 지쳐있어요. 포기하는 것이 꼭 좋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나쁜 일이 될 수 도 있을 거예요. 결정은 순전히 당신의 몫입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포기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겁니다"라는 뜻밖의 상담을 했던 사례를 소개했다. 이후 멜컴은 더 이상의 치료를 받지 않고 퇴원했고, 집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으며 저자는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꼭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현실적이지 않은 희망을 갖고 질 것을 아는 투쟁을 하며 전선에 서있는 것보다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모든 환자에게 이런 사례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런 조치가 필요한 최소한의 지침으로 네 가지를 들고 있다.
1) 환자가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고 말기 내지는 마지막 단계일 것.
2) 죽음에 이르는 병의 육체적 요인을 고려하되 궁극적으로 의학적 결정이어야 한다.
3) 의사 뿐 아니라 환자와 가족 모두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4) 이익이나 인도적 판단이 아닌 경우에는 공식에 따라 결정해서는 안 된다.
그 과정에 들어감에 있어서 신체적·정서적 고통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말하면서, 가장 집중하는 것은 의사가 고통을 다루는 방법이다. 전반적으로 의사들은 말기 환자들의 고통을 조절하는데 인색한 면이 있고, 또한 공식에 따라 정해진 양만 정해진 시간 간격으로 쓰는 경향이 있다. 환자를 진통제 중독으로 만들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사실 말기 환자라면 중독이 되는 것이 사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문제제기를 하고, 또한 환자 자신이 직접 진통제를 주입하는 PCA라는 기기를 사용하는 경우 전체 평균 사용량은 도리어 자기가 조절할 수 있다는 심리적 조절감에 의해서 훨씬 줄어들어있다는 연구 결과도 소개하고 있다.
어찌되었건 인간이 죽음을 일찍 맞이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고통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고통은 절대 객관적으로 수치화하고 계량화할 수 없고, 주관적이며 정서적인 면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기에 개인차가 클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어서 죽음의 다른 측면으로 살인과 자살에 대해 논한다. 합법적 살인 제도로 사형과 낙태를 들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타인의 의지에 반해서 다른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과 죽음을 허용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즉 위에 열거한 상황과 같이 꽤 명확한 환경에서 과도한 조치를 제거하는 것은 살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에 대해 생각할 사례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자살은 질병 내지는 죄악시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다가 80세가 넘어서 여러 번의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해지고 우울증이 발생한 여성의 사례가 나온다. 그녀가 최소한의 먹을 것을 거부하고 약물 복용을 거절하는 상황이 소개되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삶을 영위하느니 차라리 굶어 죽기를 바란 것이다. 의사는 그 여성의 뜻을 존중하였고, 가족들과 충분한 대화를 한 후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결국 48시간 뒤 죽어갔다. 일종의 자살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의 끝을 선택한 것으로 가족들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이 사례에 대해 저자는 이 여성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행위가 과도한 조치이고 자살이 무조건 범죄라고 여기기보다 반대의 과도한 조치가 도리어 더 큰 범죄일지 모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현실에 이런 정도의 자기 결단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저자는 자연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신의 은총' 수준의 선물이라고 했다. 저자 본인도 나이가 들면서 병이 들었고, 운동을 하지 않으면 척추가 굳어서 곧 거동이 불편해지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매일 운동을 할 때마다 망설인다고 했다. 살고 싶은 욕망이 있어 운동을 하지만 동시에 죽을 수 있길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여러 이유로 죽음을 훨씬 뒤로 미루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이 책이 결국 본인 자신의 실존의 고민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고민 끝에 그는 안락사에 대해 자기 나름의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진정한 안락사는 현재 앓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의 마지막 단계에서 육체적인 죽음에 처한 경우, 고유한 생존적, 정서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받거나 또는 도움 없이 자살하는 행위다."
"유사 안락사는 치료될 희망이 없는, 노령 또는 만성적 활동 불능성 질병에 처한 경우, 생존적, 정서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받거나 도움 없이 자살하는 행위다."
이렇게 정리를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안락사는 논쟁 중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는 이 정의로 문제가 정리될 것이라 보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본질적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라는 두 가지 쟁점만이 존재하고 서로가 밀접하게 엮여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심리학과 의학, 그리고 신학은 분리되어 수 세기를 내려왔으나 이 본질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서 통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인간의 조건이란 '나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에서 의지를 지닌 존재로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또 삶에 대해 거시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인문학적이고 철학적 태도를 갖추는 것이, 살아가는 과정뿐 아니라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것임을 얘기한다.
이런 관점에서 스캇 펙 박사가 찾은 해결법은 영성적 차원에 대한 인식과 받아들임이다. 그는 세속성에서 벗어나 영혼의 불멸성과 인간 개인의 차원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그걸 이해하고 나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도 배움과 깨달음의 길이 될 수 있다. 사는 동안 놓치지 않은 힘과 완벽, 지배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아야한다. 이는 세속의 자아가 갖는 환상이고 영혼은 이런 세속적 의미에 가치를 주지 않는다. 신체적 통제를 잃어 소변을 지리는 일이 벌어진다면 부끄럽고 존엄성을 상실한 일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아의 문제일 뿐 영혼은 이런 세부적이고 피상적인 것, 남에게 보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하물며 육체의 죽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결국 궁극의 깨달음은 '자기 자체를 비우는 과정'이 되어야한다고 역설한다. 이를 위해서 저자는 영적 신앙 체계가 있어야한다고 말미에 강조하고 있다.
비록 말미의 영성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지만, 저자의 본질적이고 원칙적인 고민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궁금해진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의식이 대중적으로 퍼질 수준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조건적으로 오래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서서히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소극적 안락사의 관점에서 '무의미한 연명 치료의 중단'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 된 바 있다. 2011년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의하면 72퍼센트가 찬성을 하는 입장이었고, 그 이유로는 가족의 고통, 치료가 고통을 줄 뿐이라는 것, 그리고 경제적 부담을 들었다. 한편 반대하는 이유로는 생명의 존엄성에 따라 외부에서 인위적 사망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과 생명은 신의 영역이라는 견해와 안락사 남용의 위험 등이 있었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삶의 질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고 무조건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이나 신학적 측면만을 강조한 연명 치료보다는 생명의 연장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동의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회적 추세로는 그렇게 여긴다 하더라도 막상 자신의 가족의 문제가 된다면?이라는 물음은 남는다. 그때는 분명히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실제 임상 현장에서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의식이 또렷할 때 가족이 아닌 환자 본인이 자신의 신체와 생명을 어떻게 할 것이지, 치료 방침에 대해 적극적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많은 병원에서 말기 환자들에게 사전 의료 의향서를 받을 수 있도록 비치하고 있다. 이 서류를 통해 판단 능력이 없어질 때를 대비하여 자신이 받고자 하는 치료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자신에 대한 의료 행위의 의사 결정, 대리인의 지명, 심폐소생술 거절, 원하지 않는 치료 행위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아직까지 가족들이 대행해 주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추세는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재다. 그런 면에서 안락사를 매개로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중요하다. 그는 정신의학자로서 의학적 측면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신학자적 관점에서 영성의 면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오랜 기간 삶의 태도에 대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해온 저술가로서 유려한 문체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 생생한 상담 사례를 담고 있는 복합적인 책이다.
이제는 잘 사는 것, 경쟁에서 이기는 것, 많은 성취를 하는 것, 오래 사는 것 같은 '웰빙(well-being)만큼이나 인생의 정점을 찍고 난 다음 하산을 하는 과정에 잘 마무리를 하는 것, 머문 자리를 잘 치우는 것이라는 '웰 다잉(well-dying)'에 대한 고민을 동시에 해야 할 시대다. 이는 언젠가 내 자신의 문제가 될 수 도 있고 내 주변과 가족이 당면한 문제다. 이를 현대 의학의 효율성과 경제적 측면에서 일차적으로 수행하는 삶의 시간을 연장하는 차원에서만 봐서는 안 되고, 삶과 죽음이라는 평생의 고민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는다는 훨씬 큰 그림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아직 젊다고 느낄 때'부터 해나가기 시작해야한다. 끝은 바로 내일 올 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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