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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협상…여운형이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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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협상…여운형이 있었다면!

[해방일기] 1948년 2월 27일

1948년 2월 27일

김구와 김규식이 보낸 편지가 어제 오늘 사이에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전해졌을 것 같다.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은 그 편지 부치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48년 2월 16일 나는 그녀(러시아어에 능통한 송남헌의 지인 고릴리)와 함께 왜성대로 갔다. 당시 남산 경성 방송국 부근에 있는 일제 때의 총독부 관사촌을 사람들은 왜성대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소련군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갔을 무렵이 저녁때였는데, 마침 우리는 저녁 식사 후 산보를 나온 소련군 장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유창한 소련어로 사정 이야기를 하며 북한에 편지를 보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소련군은 하루 전에 평양으로 가는 기동차가 이미 출발하여 지금 당장은 안 되고 일주일 후인 2월 25일 기동차가 다시 출발할 때 반드시 보내주겠으며, 그렇게 보내면 3월 1일경에는 두 사람에게 편지가 전달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두 종류의 편지를 주었다. 하나는 김일성 김두봉에게 보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시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인 코르토코프 장군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소련군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는 김일성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니 수고스럽지만 전달해달라는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남북의 정치인이 직접 만나 한반도 통일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자는 백범과 우사의 북으로 가는 편지는 이러한 방식으로 해서 북쪽에 전달되었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99쪽)

이 편지를 보낼 방침을 정한 것은 2월 4일의 민족자주연맹(민련) 정치위원 상무집행위원 연석회의에서였다고 송남헌은 회고했다. 그 무렵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 조선 위원단 대표들과 잦은 접촉을 통해 남북 협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편지를 보낼 계획도 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편지 송달에 협조하지 않을 것을 의심했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만난 소련군 장교에게 전달을 부탁했던 것이다. 미군정의 후원 하에 정치 활동을 펼쳐온 김규식 측에서 미군정의 태도에 이런 의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편지 송달을 유엔 위원단에 맡기는 방안도 의논되었던 모양이다. 2월 6일 김구와 김규식이 위원단을 방문해 메논 의장, 호세택 사무국장, 잭슨 제2분과위원장과 만났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김규식 김구 메논 호세택 잭슨 간의 회의에서는 북으로 발송하는 서한에 대하여 유엔 위원단 캐나다 대표로 하여금 주한 영국 대사관에 의뢰하여 영국-소련-북한으로 이어지는 외교 루트를 통해 정식으로 전달되도록 할 것이 확약되었다. 위원단 측은 남북 요인 정치 회담안을 위원단 회의에 정식으로 상정하여 머지않아 열릴 유엔 임시 총회에 반영을 하겠으므로, 이 서한의 회신이 도착되는 대로 즉시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메논은 임시 총회 개회 중에 회신이 도착하더라도 즉시 전문으로 알려줄 것을 당부하였다. (<남북 협상-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서중석 지음, 한울 펴냄), 132쪽)

김구-김규식-민련 측은 2월 16일자 편지를 사사로운 것이라 하여 그 내용은 물론 발송 사실도 공표하지 않고 있었다.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첫째, 편지를 주고받는 양측 사이에 공식적 관계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신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남북 협상 반대 세력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셋째, 받는 쪽에서 불필요한 부담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다.

요컨대 없던 길을 새로 만드는 단계에서 될수록 조용히 일이 진행되기를 바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유엔 위원단에 맡겨 공식 외교 루트를 통해 전달하는 공식 편지를 따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쪽이 너무 시간이 걸릴 것 같기 때문에 따로 편지를 보내면서 사신의 명목을 취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비밀은 억측을 낳기 마련이다. 3월 7일자 <동아일보>에 악의적 기사가 나타났다.

"양 김 씨 남북 회담 요청 북조선서 거절 통고"

열화 같은 민중의 총선거 지지를 그대로 묵살하고 김구 김규식 양 씨는 지난 2월 9일 유엔조위의 메논 의장에게 남북 요인 회담 알선을 탄원한 바 있었거니와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양 김 씨는 또다시 북조선 스티코프 장군에게 김일성 김두봉 양 씨와 함께 남조선에 내림하여 남북 요인 회담을 하여 달라는 서한을 발송하였었다는데 최근에 북조선에서는 이를 거부하는 서한을 남조선 양 김 씨에게 전달하였다고 한다.

그 이튿날 기자 회견에서 김구는 편지 발송 사실을 시인했다. "편지는 보냈는데 아직 회답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9일) 그러나 편지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3월 25일 평양에서 남북 협상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나오자 김구와 김규식은 3월 31일에 김일성, 김두봉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함께 2월 16일자 편지의 요지를 공개했다. 김구는 김두봉 앞으로, 김규식은 김일성 앞으로 편지를 썼는데 형식은 달라도 내용은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김규식이 보낸 편지의 요지는 이런 것으로 발표되었다.

1. 우리 민족의 영원 분열과 완전 통일을 판가리하는 최후의 순간에 민족 국가를 위하여 4, 50년간 분주치력(奔走致力)한 애국적 양심은 수수방관을 허하지 않는다는 것.

2. 아무리 외세의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이라는 것.

3. 남북 정치 지도자 간의 정치 협상을 통하여 통일 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주 국가의 건설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자는 것.

4. 북쪽 여러 지도자께서도 가지실 줄 믿는 데서 위선 남쪽에 있어서 남북 정치 협상을 찬성하는 애국 정당 대표 회의를 소집하여 대표를 선출하려 한다는 것. (<남북 협상-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135~136쪽)


강신주는 <벽초 홍명희 연구>(창작과비평사 펴냄) 503쪽에서 2월 16일자 편지를 보내는 데 홍명희의 역할도 있었음을 밝힌다. 남북 협상 추진의 지지 기반이 남북을 통해 다각적으로 형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처럼 김구-김규식과 같은 거물급 정치 지도자들이 남북 요인 회담을 추진하게 된 이면에는 홍명희의 역할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일련의 증언에 의하면 홍명희는 남북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의 지도자들과 직-간접적인 교섭을 누차 가졌다고 한다. 1947년 12월 김일성은 남한에서 활동 중이던 북조선노동당 정치 공작원 성시백을 불러들여 남북 합작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에 따라 성시백은 홍명희를 만나 협의하는 한편 김구-김규식의 측근 인물들과도 연계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또한 민주독립당 서무책임위원으로 홍명희의 측근이던 유석현에 의하면, 1948년 2월경 비밀리에 남하한 백남운이 홍명희를 만나 남북 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를 수립하도록 하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홍명희는 이러한 제의에 동조하여 김규식에게 연락을 취했으며, 김규식은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 요인 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공동 명의로 보내는 데 대한 김구의 동의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김구-김규식의 서한을 받은 뒤 북조선노동당 측은 대남연락부장 임해를 서울에 급파하여 홍명희 등과 접촉하고 김구-김규식의 측근 인물과도 만나 남북 요인 회담을 제안한 진의와 배경을 타진하게 했다고 한다. 귀환 후 임해는 김구-김규식의 남북 회담 제의는 그들의 애국적 결단에 따른 것이며, 거기에는 민족자주연맹의 홍명희와 박건웅-권태양 등의 노력이 적지아니 작용한 것으로 보고했다고 전해진다.


김구와 김규식의 연합 제의에 대해 이북 지도부는 그 '진의와 배경'을 따져볼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한 가지는 반공-반탁에 앞장서서 최근까지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던 김구의 진의를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이남 중간파를 무시해도 된다는 남로당 측 주장을 검증할 필요였다.

2월 8일자 일기에서 남로당의 '2·7 구국 투쟁'을 설명할 때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펴냄)에 수록된 노동당 간부 출신 박병엽의 증언을 소개했다. 1947년 12월 초와 1948년 1월 말의 남북노동당연석회의에서 박헌영과 이승엽이 "남로당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유엔 한국 위원회의 활동을 파탄시킬 수 있다", "남한에서의 단정 반대 세력과의 연합은 현 단계에서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같은 책 326~327쪽에는 남북 협상 제의 서한을 둘러싼 북로당의 논의 내용에 대한 박병엽의 증언이 실려 있다.

김구-김규식의 남북 협상 제의 서한은 외교 경로와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북한에 공식적으로 전달됐습니다. 그러나 북로당은 민련의 2월 4일 결의, 김구의 성명, 심지어 김구-김규식의 편지 내용까지 미리 입수했어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 공작원 성시백이 민련과 한독당에 끈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동향은 북로당 중앙에 무전으로 즉각 타전됐습니다.

(…) 북로당은 2월 18~20일 이례적으로 사흘간 남측의 협상 제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지도부의 관심은 민련이 대북 서한을 띄우기로 한 결정이 빨리 나온 배경이 무엇이냐에 쏠렸습니다.

허가이 등 소련파는 김규식의 협상 제의를 당시 고조되고 있던 남북 협상 움직임을 깨려는 미군정의 '입김'이라고 주장했어요. 이들은 그 근거로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들이 뻔질나게 김규식의 사무실을 들랑거렸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맞서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파는 "미국의 작용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김구-김규식의 애국적 결단이라는 측면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김일성-김책 등 빨찌산파도 연안파를 지지하는 입장을 폈습니다. 갑론을박을 계속한 결과 대세는 김구-김규식의 제의에 호응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지만 마지막 날까지도 결론을 내지 못했어요.

(…) (2월 22일 서울에 파견되었던) 임해는 귀환 직후 2월 24일부터 재개된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서울 사정에 대해 간략히 보고를 했습니다. 그는 김구-김규식의 남북 협상 제의는 그들의 애국적 결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어요. 그리고 여기에는 민련의 홍명희-박건웅-권태양 등의 노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임해의 보고가 끝난 다음날 김일성은 남한 우익 지도자들의 애국주의를 높이 평가하고 환영함으로써 이들과 연합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여운형이 비워놓은 자리로 다시 눈이 간다. 왜 이제야 남북 협상인가? 유엔 위원단이 들어와 있어야 남북 협상이 필요한 것이고 가능한 것인가? 여운형은 좌우 합작의 궁극적 목표를 남북 합작에 두고, 북로당 지도부와의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환갑의 몸을 끌고 38선을 십여 차례나 넘어 다녔다. 좌우 합작의 쌍두마차로 여운형과 함께 김규식을 일컫지만, 좌우 합작의 연장선 위에서 남북 합작을 추진할 인물은 단연 여운형이었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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