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2월 22일
2월 19일 입법의원 제205차 본회의에서 격렬한 사태가 벌어졌다. 설립 후 14개월 만에 가장 격렬한 사태였던 것 같다.
19일 입의의 205차 본회의에서는 서상일 의원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총선거와 독립 정부 수립을 돕기 위하여 내조한 유엔 위원단을 맞이하고 있는 역사적 이 순간에 있어 민의의 대표 기관인 입의로서 아무 태도를 표명치 아니하였음은 유감이다. 그러므로 "유엔 위원단은 우선 가능한 지역만의 총선거 실시를 감시하고 법적 자주 독립 통일 정부 수립을 협조할 귀 위원단의 신속한 임무 완수를 간청함"이라는 주문의 결의를 요구하는 신익희, 서상일, 김도연, 김법린, 백관수 각 의원 이하 43명의 연서로 된 긴급 동의안을 계출하는 동시에 설명을 하자, 장내는 긴장한 가운데에 엄우룡 의원으로부터 "이것은 너무 중대한 문제이니 검토할 시간을 주기 위하여 금일은 보고 형식에만 그치자"고 하였으나 서 의원으로부터 "시급한 문제인 만큼 본 회의에서 단호하게 결의 통과할 것을 요망한다"고 주장, 이에 대하여 김학배 의원은 흥분된 어조로 "유엔 조위는 아직까지 남한만의 선거 운운은 말하지 않는데 우리가 먼저 남한만의 선거를 주장함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일이며 이러한 불순한 안은 더러워서 상대치 못하겠다"고 모욕적 언사를 던지고 퇴장하자, 저놈을 빨리 잡으라는 등 장내는 아연 소란하여지며 일시 혼란 무질서 상태에 빠졌었으나 얼마 후 진정됨을 기다려 신기언, 박건웅 의원으로부터 "유엔의 목적은 남북 통일 총선거에 있는 것인데 가능한 지역만의 선거는 무엇이며 남에서 이렇게 한다면 북에서도 이와 같은 조치를 할 것이 아닌가. 여하간 이 안은 질문 토의의 가치가 안 된다"고 공박하자, 서 의원으로부터 "소련이 거부한 이상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유엔은 선거를 할 권한이 있다"는 등 맹렬한 논전이 있은 후, 여운홍 의원으로부터 이 안을 검토할 시간을 가지기 위하여 휴회하기를 동의하였으나, 성립되지 않고 서우석 의원으로부터 계속 토의하자고 응수 동의를 하는 등, 또다시 장내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윤기섭 의장대리는 이 안 토의는 다음 회의로 미룬다고 한 후 4시 반경 휴회를 선언하였다.
원래 본 결의안은 법안이 아닌 이상 재적 의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과반수 찬성이 있다면 결의안이 성립되는 것으로 현재 재적 의원 86명 중 과반수인 신익희 의원 이하 43의원의 연서로써 제출된 이상 본회의에 상정 토의하는 것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의원의 결의로써 본안이 성립될 때에는 반대 제 의원은 총사직까지도 각오할 것이며 결국 입의의 존폐 문제까지 우려되는바 앞으로 의장의 직권으로서 회의 소집을 중지하느냐 혹은 결의안을 통과함으로써 반대 의원은 총사직하게 되느냐 라는 본 결의안을 위요하고 입의는 또다시 기로의 운명에 서게 된 바 20일의 본회의가 극히 주목되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8년 2월 21일)
애초의 민선 의원 45인 중에는 한국민주당과 독촉 세력이 압도적이었고 관선 의원 중에도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입법의원에서는 이승만 노선 추종자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개원 초기에도 그 과반수를 이용해 반탁 결의안을 채택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 총선거 결의안을 채택하려고 나선 것이다.
1946년 10월 전국적 소요 사태 속에서 치러진 입법의원 선거는 자금력, 경찰력, 폭력을 독점한 극우 반공 세력의 독무대였다.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서둘러 총선거를 치른다면 전번 선거와 같은 결과를 얻을 것을 그 세력은 확신하고 있었다. 입법의원 구성 때 견제를 위해 중간파를 집중 투입했던 관선 의원 제도도 이번에는 없을 것이므로, 이남 총선거를 통해 구성될 의회를 그들이 지배하게 될 것은 확실한 일이었다. 그래서 총선거 조기 실시에 입법의원의 이름을 걸고 나서려는 것이었다.
김규식이 20일 오전 하지 사령관 사무실을 방문한 것은 이 총선거 동의안 때문인 것으로 관측되었다. 19일 저녁 김구, 이승만과 함께 하지의 관저 경무대를 방문했는데(<동아일보> <경향신문> 1948년 2월 22일) 이튿날 아침 따로 다시 찾아갔기 때문이다.
20일 상오 10시 입의 의장 김규식은 반도호텔로 하지 중장을 방문하여 요담한 바 있었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김 박사는 동 회담에 있어서 19일 입법의원에서 민선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43명의 연명으로서 제출된 긴급 동의안에 대하여 절대 반대의 의견을 표명하였다 하며 만일 동안이 입의를 통과하는 때에는 자기는 즉시로 의장을 사임할 의사를 표명하였다 한다. (<서울신문> 1948년 2월 24일)
김구, 김규식, 이승만 3인을 가리키는 '3영수'란 말이 1947년 12월부터 부쩍 많이 쓰이고 있었다. 정치 지도자로서 김규식의 위상이 크게 자라난 것이다. 엊그제 인용한 최영희의 글에(<격동의 해방 3년>(한림대학교 출판부 펴냄), 450쪽) "미군정은 김규식을 초대 대통령으로 밀 방침이었으며, 유엔 한위 각국 대표들도 그에게 큰 비중을 두고 접촉하고 있었다"란 대목이 있다. 1946년 여름 좌우 합작 사업 지원을 시작하면서부터 미군정은 김규식의 역할을 중시했고, 단독 건국 가능성이 떠오르는 데 따라 김규식이 미군정의 선택이라는 설이 파다하게 떠돌았다.
미군정 전체는 몰라도 하지 사령관의 개인적 선택이 김규식이었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는 김구와도 이승만과도 사이가 대단히 나빴기 때문이다. 김규식은 입법의원 의장을 맡으면서 입법의원의 독립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미군정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는데 그 입장이 어느 정도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하지의 각별한 신뢰 덕분이었을 것이다.
정용욱은 <존 하지와 미군 점령 통치 3년>(중심 펴냄)에서 1947년 봄 미군정 수뇌부가 김규식을 '1인자'로 발탁하려 한 계획을 "기만적"이고 "그 자체가 모순에 가득 찬 것"으로 폄하하면서도 그 계획이 상당한 실체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미군정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막후 작업을 계속하고 있을 때에도 우익 진영의 반탁 소요 기도가 꼬리를 물었다. 또 입법의원에서도 신익희 법안, 서상일 법안과 같이 한국인이 정권 수립 문제에서 이니셔티브를 쥐려는 기도가 계속되었다. 이들은 입법의원에 각각 '행정조직법초안', '남조선과도약헌'이라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 법안들은 입법의원을 통해 행정권 또는 입법-행정-사법의 권한을 한국인에게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와 같이 우익이 미군정의 통제 밖에서 정부를 수립하려는 기도를 계속하자 미군정은 이러한 기도를 제압하고 자신의 주도하에 과도 정부 수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확고한 조치의 하나로 김규식을 '1인자'로 지명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은 '계획'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김규식의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일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계획을 처음 제안한 것은 러치 군정장관이었다. 러치는 제안 이유를 밝히면서 "우리 앞에는 세 가지 대안이 있다. 그 중 하나만이 현재 우리의 목표와 일치한다. 신익희의 계획은 생각할 수 없다. 둘째는 한민당안(서상일 법안)이고, 셋째는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하는 것이다. 셋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입법의원이 행동에 옮기는 계획으로 우리의 계획을 교체해야 할 지경에 이를 것이고, 그 대안은 이승만이다"라고 적고 있다.
러치와 브라운은 3월 초순 당시 워싱턴에 소환되어 있던 하지에게 이 계획의 실행을 속히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도 이 계획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 실행을 자신의 귀임 때까지 미루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러치는 3월 하순에 하지가 돌아오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는 전제하에 김규식에게 행정 수반으로 취임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의 초안까지 작성해 놓았다.
(…) 이 서한에 의하면 군정장관의 권한으로 김규식을 보통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대통령 대리로 임명하고, 이렇게 지명된 행정 수반은 군정장관이 행사하는 권한을 대부분 행사하지만 군정장관과 주한 미군사령관에게 거부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러치는 김규식이 대통령직을 받아들인다면 안재홍을 부통령으로, 정일형을 민정장관으로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군정을 '남한 과도 정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시했다. 미군정은 김규식의 대통령 취임을 과도 정부 수립 계획의 완결로 이해하였다. (178~180쪽)
이 계획을 김규식이 거부한 것은 하지 사령관의 '임명'을 통해 미군정에 의존하는 조직의 대표를 맡을 경우 반탁 세력의 집중 공격 앞에 희생되고 말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정장관을 맡은 안재홍이 바로 그런 상황에서 직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은 것을 보더라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걱정이다.
대신 김규식은 입법의원 운영에 전력을 기울였다. 선출-구성에 문제가 있는 조직이지만 명목상 민의 대변 기관인 입법의원을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운영하는 것이 건국 준비를 위해 중요한 일로 여긴 것이다. 강만길과 심지연의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1 : 항일 독립 투쟁과 좌우 합작>(한울 펴냄) 243~288쪽에 입법의원 개원 초기 김규식의 활동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데, 정치인 김규식의 생각과 자세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서술이다.
김규식이 의장으로서 입법의원의 움직임에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일은 1947년 1월 20일의 반탁 결의안 통과였다. 그의 비서로 있던 송남헌은 신탁 통치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렇게 회고했다.
모스크바 3상 결정에 규정되어 있는 신탁 통치 문제에 대해 내가 알기로는 처음에 김 박사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제주도에 정부를 세우더라도 신탁 통치를 받지 않는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런 정부가 수립된다면 이를 중앙 정부, 또는 합법 정부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김 박사의 이러한 견해는 3상 회의 결정의 전문이 공개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면서, 3상 결정에 따라 정부를 수립하고 그 정부가 자주적으로 탁치 문제를 결정하도록 한다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3상 결정을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김 박사는 3상 결정이 탁치의 실시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한반도에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후원하며 이 정부가 자립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1946년 1월 7일의 4당 공동 코뮤니케, 즉 3상 결정은 지지하나 탁치 문제는 자주 정신에 기초하여 결정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김 박사는 3상 결정에 따라 소집되는 미소공위에 협조하여 임시 정부의 수립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탁치 문제는 수립된 정부가 자율적으로 판단하도록 하자고 강조한 김 박사는 반탁 운동에 앞서 임시 정부 수립 문제를 앞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계속 견지했고 이것은 후일 좌우 합작 7원칙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72~73쪽)
김규식은 과도한 반탁 운동이 3상회의 결정에 입각한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의 길을 가로막을 것을 걱정했고, 입법의원의 반탁 결의안 채택은 건국 준비의 사명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보아서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는 잠시 칩거했을 뿐, 의장직을 사퇴하지는 않았다. 그 자신 신탁 통치 반대의 근본적 취지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고, 입법의원이 아직 태동 단계였기 때문에 더 나은 운영의 길을 찾을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입법의원에서 조기 총선거를 위한 결의안 채택 움직임 앞에서는 퇴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기 총선거 주장이 단독 건국에 목적을 둔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히 드러나 있었고, 입법의원의 활동도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으니까. 2월 20일 하지를 찾아간 것은 퇴진 계획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조기 총선거 추진 결의안은 2월 23일 이상한 모습으로 입법의원에서 채택되었다.
"총선거 추진안 가결로 입의 존폐 기로에 봉착-김 의장과 군정의 태도가 주목처"
입법의원에서는 지난 19일 서상일 의원 외 42의원이 연서로 제안한 남조선 총선거 실시를 요청하는 결의안 상정을 위요하고 관-민 양측이 대립되어 있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23일 개회된 206차 회의에서 의장 이하 주로 관선 의원이 퇴장한 후 민선 의원만으로써 동안을 다소 수정한 후 가결하였다 한다.
즉 23일의 입법회의 경과는 김규식 의장 이하 66의원 출석 하에 개회되어 처음에 의장은 비공식 회의를 진행시키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이어서 김규식 의장은 "재적 의원 3분지 2 이상 출석에 과반수 가결로 처리할 것"을 동의하였으나 이것도 부결되자 동안에 책임을 질 수 없다 하여 퇴장하자 동씨에 따라 관선 의원 23인이 퇴장하였는데 민선 측에서는 그대로 회의를 진행하여 백관수 씨를 임시 의장으로 선출 재석 의원 42명으로 별항과 같이 제안 주문을 수정 통과시키고 하오 6시경 산회하였다 한다.
그리고 동 결의문은 24일 딘 군정장관 및 유엔 조위에 전달되었는데 관선 측 일부에서는 23일 회의 진행에 있어서 임시 의장 선출은 재적 의원 3분지 2 이상이 필요하다고 하여 동 회의를 위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원법에는 이에 관한 의원수를 규정한 것이 없다고 한다.
주문 : "유엔 조선 위원단은 위선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 실시를 감시하여 조선 국민 정부로서 승인을 얻도록 하여 국제적 협력 하에 조선의 완전 통일을 기할 것을 요청함."
한편 동안이 통과되면 의장 김규식 씨는 사직하겠다는 것을 지난 20일 하지 중장에게 표명하였다고 전문되는 바 앞으로 동씨의 거취가 주목되는 터로 관선 의원 측의 공동 보조가 예상되어 바야흐로 입의는 존폐 기로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민선 측에서는 끝까지 강경한 태도로서 모 의원은 "이제 입의 해산 책임을 어느 편이 지는가 하는 문제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미군정의 태도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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