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최민식은 2009년 출간한 <사진은 사상이다>(눈빛 지음)에서 끝없이 사진의 본질과 정수에 대해 말했다. 제목이 잘 보여주듯, 이 책은 리얼리즘 사진을 위한 프로파간다 텍스트라 할 만하다. '인간', '메시지', '감동', '사회', '삶-인생', '가치', '깊이' 등의 단어가 끊임없이 반복해 등장한다.
그리고 이영준은 2012년에 출간된 최민식의 사진집 <휴먼 선집>(눈빛 펴냄)의 서문을 썼다. 재미있는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서문에서 이름을 막 발견했을 때는 조금 웃었던 것도 같다. 서문은 예상대로 (이제 와 비평적 요소로 삼기에는 곤란한) 최민식의 휴머니즘과 리얼리즘에 대한 열망 이외의, 동시대에 비평적으로 적용 가능한 특성을 찾았다. 동시에 최민식의 사진들이 사진가 본인의 의도대로 작용하기는 이미 늦은 것이 아닌가 하고 아쉬움을 전한다.
"훌륭한 작가를 뒤늦게 알아봤다는 상대적인 차원에서 늦은 것이 아니라, 범주적으로 늦은 것이다. 즉 그의 사진이 한참 시대의 결을 거스르고 빛을 발할 때는 못 본 척하다가 시절이 좋아지고, 뭐든지 표상 가능하고, 따라서 그의 사진의 힘이 상대화하여 흐물흐물해지고 나서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최민식의 사진은 너무 일찍 나타났거나 너무 늦게 나타났다."
사진가가 세상을 뜨고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서문은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운 헌사처럼 보였다. 최민식의 사진이 소비될 수는 있으되 작동하기는 어려운 상황. 나는 거기에 대해 부연하고자 한다. '사진가 최민식'이 위대한 인간임을 증언하는 말들은 이미 많으므로, 그의 유일한 유산인 사진들의 작동 여부에 대해 말함으로써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리고 싶다.
▲ <휴먼 선집>(최민식 지음, 눈빛 펴냄). ⓒ눈빛 |
최민식이 사진을 찍기 시작할 전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두 가지 요소를 생각하면 최민식 사진의 지류에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인간 가족전' 사진들이며, 또 하나는 화가 밀레다.
'인간 가족전'은 20세기 중반에 사진가이자 기획자인 에드워드 슈타이켄이 기획한 대규모 전시회였다. 많은 사진가들의 작품들 중에서 휴머니즘을 표방하는 작품들이 선택되었다. 사진이 찍힌 조건은 다양했다. 부자와 빈자, 선진국과 후진국, 핵가족과 대가족…. 사진 속의 사람들이 처한 환경은 다양했지만 그들은 모두 공통된 태도, 즉 가족을 위시한 국지적 소집단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을 보여주었다.
'인간 가족전'은 반복되는 '훈훈한 휴머니즘'을 통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인류라는 하나의 대가족을 느끼게 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거대한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어떤 위기나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약하지만 꺼지지 않는 촛불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가족전'의 주제는 이토록 노골적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류의 보편적인 미덕, 사랑 말이다.
최민식은 이 사진전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그가 남긴 사진들 중에서 유명한 작품들은 대부분 '인간 가족전'적으로 기능한다. 고난 속에서도 피어오르는 인생의 희로애락. 민중에 대한 애정과 그들에게 희망을 부여하고자 하는 의지는 최민식의 사진들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식이다.
따라서 최민식의 사진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을 확인하기 위해 '인간 가족전'이 비평가들에게 비판받았던 지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전시회는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각기 다른 사회경제적 처지에 처한 사람들이 보편적인 애정을 통해 하나로 묶이면서, 그들은 단일한 인류처럼 보인다. 불공평한 사회경제적 조건들은 뒤로 숨겨지고 '인류 보편적인' 사랑의 메시지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인간 가족전'이 순회 전시되던 세계 대도시의 관람객들은 사진에 찍힌 '몇몇' 열악한 환경의 드라마틱한 피사체들을 양심의 거리낌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인류 보편이라는 감수성은 사진 속의 사람들을 자신들(관람객들)과 같은 위치로 손쉽게 끌어올려 '존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미국 중산층의 가정과 아프리카의 험난한 상황 속에서 지은 웃음이 같은 것일까? 한 번 웃기 위해 극복해야 할 고통의 양은 동일한가? '인간 가족전'은 답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진들 속의 웃음은 그런 질문을 거부한다.
최민식의 사진들이 '인간 가족전'과 똑같은 약점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참담한 민중의 삶을 보여주려던 작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와 비슷한 경우가 발생한다. 인터넷 서점의 어떤 최민식 사진집에는 철암 출신의 한 독자가 쓴 리뷰가 있다. 그는 타지 사람들이 철암을 찍은 사진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으로 구경거리화하는 대중적 사진 소비 방식 때문이다.
▲ '인간 가족전'에 포함되었던 작품 '플룻 연주자'. ⓒ유진 해리스(Eugene Harris) |
최민식의 사진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이상 '인간 가족전' 유의 인류 동조화 시스템은 언제든지 동작 가능하다. 게다가 그 시스템의 동작 가능성은 더욱 높아져 가고 있다. 최민식이 사진을 찍은 시대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가족전'이 공간적(선택된 대도시)으로 사진 소비자들을 비극적 현실과 격리시켰다면, 최민식의 사진들은 시간적으로 사진 소비자들로부터 서서히 격리된다. 최민식의 사진들은 정말로 너무 늦게 다가온 것이다.
사진이 동시대에서 벗어나 노스탤지어로 진입하는 순간, 사진의 고발은 '그때는 그랬었지'라는 회고의 형식으로 바뀌거나 아예 '겪어본 적 없는 시대의 일'로 타자화된다. 이 두 가지 반응의 공통점은 무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해함은 '우리(시공간을 넘어선 희로애락의 공동체)는 같은 인간'이라는 '인간 가족전'적인 반응으로 이어진다.
이는 민중의 삶을 기록하고 고발한다는 최민식 사진이 맞닥뜨리는 커다란 딜레마다. 특정 시공간에서 벗어나 보편성 속으로 던져진 고발은 작동 가능한가? 시몬느 베이유는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고발은 이미지 속의 인간-피해자를 사물화된(인간성을 박탈당한) 존재로 표현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왜 인간이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는가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민식은 반대의 방향을, 낮은 곳에서의 역설적인 존엄을, 폭력 또는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고 우는, 신성불가침의 휴머니즘을 선택했다.
<만종>이나 <이삭 줍는 사람들>처럼 밀레의 대표작들은 주로 노동하는 농민들의 삶을 많이 다루었다. 이 노동들은 정적이며 거의 종교적일 정도로 엄숙해 보인다. 그 엄숙함은 자기 완결적이어서 질문을 일으키지 않는다. 밀레의 그림 속 인물들은 노동을 노동 이상의 행위로 치환함으로써 노동과 농민의 삶에 대한 질문을 차단시킨다.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에 밀레의 농민 그림들은 열렬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인간과 노동을 감동과 숭고함으로 치환하면서 불안의 그림자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민식은 인텔리였던 밀레와는 달리 민중을 삶 속에 직접 품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밀레처럼 노동자를 엄숙화한 미적 사물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밀레의 그림처럼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 최민식의 '부산, 1965'. ⓒ눈빛출판사 |
저널리즘 사진의 한 분야인 피처(feature) 사진은 어떤 사실의 전달보다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통해 간접적인 정보 전달과 감정적인 자극을 목표로 하는 분야다. 최민식의 능력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을 꼽으라면 바로 이 피처 촬영 능력이다. 때로 구도 등에 아랑곳 않고 완전히 피사체 자체에 집중해 결정적인 제스처를 잡아내는 그의 능력은 단연 눈에 띈다. 민중의 희로애락을 포착하는 그의 뛰어난 능력은 인상 깊은 표정을 잡아내는 과정을 통해 피사체를 어떤 특별한 위치로 이끈다. 그런 사진들 속에서 가난한 민중들은 빛이 난다. 위엄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화면 전체를 장악한 피사체가 강렬한 감정적 제스처를 뿜어내는 순간, 사진이 주는 이야기는 완결되어 버린다. 사진 속의 표정과 몸짓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끈 뒤에 자신이 표출하는 감정을 이야기의 종결로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피사체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한 장의 사진이라는 작은 세계의 의미계를 장악하는 순간에 그 피사체는 그 사진 속의 신이 된다. 이것은 어떤 숭고함, 즉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부조리를 일거에 상쇄시키는 편리한 숭고함이다. 던져질 수도 있었던 질문과 불편함은 피사체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감정(이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 인간성인가)이라는 편리한 형태로 번역되어 보는 이를 안심시킨다. 보는 이는 마음 편히 감동에 임하면 된다.
이렇게 되면 사진은 고발할 힘을 잃어버린다. 최민식의 사진들이 휴머니즘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들이라고 불리는 순간, 휴머니즘은 고발이라는 본래의 의도를 무력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감동의 형태로 번역된 휴머니즘은 민중을 위한 것일 수 있는가? 그의 삶은 완전히 민중과 함께하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맞추었던 초점이 그가 지향하던 곳을 정말로 향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최민식은 2007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바로가기 "[김문이 만난사람] '가난한 인간'만 찍은 원로 사진작가 최민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정심이나 측은지심이 아닌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고발이야. 고난과 시련을 겪는 인간으로서의 아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지.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인물의 고통에 직면하게 했어. 이것은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동정적 의미보다 인간이 누리고 있는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아픔이기도 해."
그러나 그 존엄성이 사진을 향해 던져졌어야 할 물음을 차단하지는 않았는가? 폭력적인 비극에 인간미와 숭고함을 덧붙였을 때, 그리하여 사진이 스스로 답을 던져주었을 때 누가 사진을 향해 질문할 것인가?
3년쯤 전에 후배와 저녁을 먹었다. 후배는 최민식 사진가를 얼마 전에 만났다고 했다. 후배가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더니 그는 '아주 열심히 할 게 아니면 얼른 그만 두라'고 답했다 한다. 최민식 사진가는 워낙 힘들게 작업을 해 오신 분이니 그런 고생쯤 각오하라는 의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별다른 조언은 아니어서 금방 잊어버렸다. 그러다 얼마 전 선생의 추모 웹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지나간 기사들을 뒤지던 중에 후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래 부분을 볼 때였다.
"내 사진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게 끝없이 천착해온 인간이란 주제가 정말로 정직한 것이었던가 그는 이 책에서 되풀이해 묻기를 그치지 않는다. 어느 날 딸이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팔아서 자신을 자랑하려는 거예요"라고 따졌을 때, "딸아이가 나에게 던졌던 말이 수도꼭지에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나를 괴롭혔다"고 고백한다. (<한겨레> 2006/12/15 기사)(☞바로가기 "인간이 거기 있기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 )
▲ 사진가 최민식(1928~2013). ⓒ눈빛출판사 |
나는 후배가 조언으로 구해 들었던 '열심히'라는 말이 단지 외부적인 고난을 의미한 게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추호도 인간을 위한 리얼리즘을 의심한 적 없다는 그가, 의심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과 얼마만큼 싸워야 했을까 싶어서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잦아드는 회의와 의심을 평생 동안 '아주 열심히' 막아내며 살아야 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 자기 확신의 과정이 최민식의 사진에 힘을 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앞서 그 힘이 도리어 원래의 의도를 벗어나게끔 조장한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그게 결코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달리 어쩌겠는가. 그렇게 사랑하는데, 그토록 좋아하는데 어떻게 아닌 척하고 두 발짝 물러나 사진을 찍고 빈 공간을 통해 질문을 던지겠는가 말이다. 이제 나는 <휴먼 선집>을 타협할 수 없는 인민에의 사랑으로 살아 온 한 인간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읽는다. 아니, 그렇게 읽혀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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